인민항쟁가(人民抗爭歌) - 글 : 임화, 곡 : 김순남, 노래 : 제주 놀이패 '한라산', 연주 : KBS 교향악단 <-- 듣기
혁명같은 삶을 살았던 시인 - 임화(林和)
김외곤(서원대 미디어창작과 교수, 문화와 나 2004 가을호)
도시의 가출아, 문학과 운명처럼 마주치다
우리의 근대사에서 임화(1908~1953년) 처럼 문제적인 인물은 흔치 않다. 그는 열정적 낭만주의 시인이자 날카로운 안목을 소유한 문학 비평가였고, 독자적 문학론을 정립하고 우리 근대문학사를 정리한 이론가이자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주의 문학 운동 을 지휘한 실천가이기도 했다.
또한 해방 이후에는 민족 문학론을 소리 높이 외친 문학 운동가였고 북한에 가서는 현실 정치에 깊숙이 관여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만큼 문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를 한 마디로 규정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임화는 1908년에 서울 낙산 아래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가정 형편이나 가족 상황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다만 13세 때인 1921년에 보성중학에 입학한 사실이 기록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해방이후 정치적 운명을 같이하는 이강국(李康國, 19061955년)을 비롯하여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대표 주자 이상(李箱, 1910~1937년), 해외 문학파의 일원인 이헌구(李軒求, 19051982년), 친구로서 카프 (KAPF) 가입을 권유한 윤기정(尹基鼎, 1903~1955년)등과 선후배 사이였지만,
17세 때인 1925년에 이르면 보성중학마저 중도에 그만 두고 가출을 감행한다.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가정의 파산이 중요한 이유였다.
가출 소년인 임화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근대화정책에 따라 한창 근대 도시로 성장하던 경성(서울)을 무대로 자신의 젊음을 불태웠다.
?그는 교과서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당시 유행하던 조타모(鳥打帽)를 사 쓰고 일본인 거주지인 본정 본정(本町)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곳의 서점에서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잡지『개조(改造)』와 크로포트킨(P. A. Kropotkin, 18421921년)의 저작 등을 구입해서 읽는데, 이것이 임화가 문학 청년으로서 내디딘 첫 걸음이었다.
이후 그는 리카도, 마르크스, 니체, 괴테 등의 저작을 섭렵하기도 하고 미래파나 표현파에 빠져 그림습작을 하기도 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다이즘(dadaism)에 경도되어 실험적 시를 창작하는시인이 되기에이른다.
이러한 임화의 성장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과거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전통적 문학에는 관심이 없었고 처음부터 서구의 근대적 문학에 심취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근대화되어 가던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부모의 품을 떠나 거리를 배회하는 스트리트 보이(street boy)가 되었기 때문에 가부장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과거의 유산 따위를 우습게 여기면서 근대적 유행에 민감한 인간으로 성장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가출 이후 별다른 거부감없이 당시 유행하던 전위적 문학에 기울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문학 진영의 젊은 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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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번째 아내 이귀례. 이귀례는 카프 도쿄
지부를 이끌던 이북만의 여동생이다. 임화는
도쿄에서 식객노릇을 하다가 이귀례를 만났다 | |
얼마 동안 다다 풍의 실험적 시를 쓰던 임화의 의식 속에 새로이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은 사람은 사회주의 문학단체인 카프를 이끌 던 박영희(朴英熙, 1901~?)이다.
어린 시절부터 길러온 예민한 감각으로 노동자라는 새로운 계급의 등장을 알아차린 임화는 1927년 무렵 박영희의 영향 아래 문학 활동의 일대 방향 전환을 도모한다.
다다이즘 계열의 전위 시인에서 사회주의 혁명 시인이자 문학 비평가로 거듭난 것이다. 얼마 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이북만(李北滿, ?~?)이라는 또 다른 지도자를 만나 사회주의 연극 운동을 시작하는데,
그러는 동안에 조직 활동도 익히면서 점차 강경론자가 되어 갔다. 한편 길지 않았던 동경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귀국선에 올랐을 때, 그의 곁에는 극단에서 함께 활동하던 이북만의 누이동생 이귀례(李貴禮)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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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프의 김유영이 감독항 영화 '혼가'(昏街)
에 주연으로 출연한 임화.카프에 가입한 무렵
그는 조산영화예술협회에 참가하면서 '유랑'
(流浪)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에 대한 임
화의 관심은 현대 전위예술에 대한 연장이었
다. | |
귀국 후에 임화가 살았던 삶은 그야말로 치열한 투쟁과도 같았다.
그는 영화〈유랑〉과〈혼가(昏街)〉(1928년)의 주연 배우로서 활약하였고「우리 오빠와 화로」나「네 거리의 순이」(1929년) 등을 통해 ‘단편 서사시’ 라는 새로운 시 형식을 창조해 내었으며,
김기진(金基鎭, 1903~1985년) 등과 벌인 대 중화 논쟁을 통해서는 비평가로서도 활동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카프를 책임지는 서기장의 직책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 와중에 사랑하는 딸 혜란을 얻었지만 동시에 폐병이라는 지병도 얻었고, 카프 제1차 검거 사건(1931년)으로 일본 제국주의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두 번에 걸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카프의 활동이 침체기에 접어들던 1930년대 초반에 그는 조직의 책임자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했는데, 김남천(金南天, 1911~1953년)과 벌인‘「물!」논쟁’등 창작 방법 논쟁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논쟁의 과정에서 그는 일본과 소련의 이론을 직수입하지 않고,
그 대신 조선의 현실을 문제 삼으면서 자생적 리얼리즘 문학 이론을 수립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불꽃 튀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상황은 그가 바라는 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외부적으로는 사상 탄압이 더욱 강화되어 스승이었던 박영희를 비롯한 많은 동료들이 전향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개인적으로는 이귀례와 헤어지고 폐병이 도져 마산으로 요양을 떠나야만하는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식민지 지식인의 좌절과 오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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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화와 그의 두번째 부인인 소설가 지화련
(池河連) | |
마산에서 문학 소녀인 이현욱(필명 지하련)과 함께 돌아온 임화는 카프 제2차 검거 사건(1934년)으로 거의 전 동맹원이 감옥에 갇히는 상황이 발생하자 이듬해에 김기진, 김남천과 합의하여 마침내 카프 해산계를 종로 경찰서에 제출하게 된다.
카프 해산 이후에도 그는 시인으로서, 문학사가로서, 비평가로서 활활동을 계속 하였는데, 이 시기에 남긴 문학적 성과는 오늘날까지 도그평가를둘러싸고논란이일고있다.
두말할것도 없이 식민지 문학자인 임화에게 주어진 가장 커다란 임무는일본제국주의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방도를 찾는 것이었는데, 처음부터 일본을 통해 ‘근대성’개념을 수용하면서 문학 활동을 전개했던 그에게 그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근대적 문물로써 일본을 넘어서야 했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일본 열도의 긴 그림자를 바라보는 게다. 흰 얼굴에는 분명히 가슴의‘로맨티시즘’이 물결치고 있다. 예술, 학문, 움직일 수 없는 진리 … 그의 꿈꾸는 사상이 높다랗게 굽이치는 동경(東京), 모든 것을 배워 모든 것을 익혀, 다시 이 바다 물결 위에 올랐을 때, 나는 슬픈 고향의 한 밤,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리라. 청년의 가슴은 바다보다 더 설레이었다.
- 임화, 「해협의 로맨티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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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에 나온 임화의 시집 '현해탄'. 화가
구본웅이 표지그림을 그렸다. 거친 붓터치로
묘사된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과 사나운 물결
이 임화를 휩쓸었던 시대를 상징하는 듯 하다. | |
이 시에 등장하는 청년처럼 임화를 포함한 식민지 조선의 많은 젊은이들이 현해탄을 건너가 근대적인 모든 것을 배워 오고자 했지만,
그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임화는 그의 대표작「현해탄」(1936년) 에서“어떤 사람은 건너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 어떤 사람은 돌아오자 죽어갔다 / 어떤 사람은 영영 생사도 모른다 / 어떤 사람은 아픈 패배에 울었다”고 읊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보다 먼저 근대 국가를 형성한 일본에 대하여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가진 정신적 열등감을 오늘날‘현해탄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하지만 사실 현재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 임화가 추구하던 근대성과 연결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그 콤플렉스가 쉽게 비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한편 임화는 개화기 이래의 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근대 문학이 근대 조선 사회를 토대로 하고 있지만 서구의 근대적 문학 장르를 이식하였다는 점을 밝혀낸다.
그리고 우리가 서구 문학을 직접 수입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경유하여 간접적으로 수입하였기 때문에 일본메이지(明治), 다이쇼(大正) 문학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조선의 근대 문학이 일본을 통해 서구 문학을 받아들이면서 성립 되었다는 주장은 흔히‘이식 문학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이론적 비주체성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임화가 문학을 수입하는 주체로서 조선인이 보여준 능동적 역할을 언급하기는 하였지만, 궁극적으로서 구문학의 수입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입장에 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시 창작과 문학사 서술뿐만 아니라 비평 영역에서도 임화는 중요한 업적을 남긴 바 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그의이론적 활동은 ‘주체재건론’으로 요약된다.
더 이상 사회주의적 문학 활동을 계속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전향마저 강요당했을 때 많은 수의 작가들은 자신의 신념을 잃어버린 채 이른바‘주체 상실’의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임화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고 문학을 되살리기위해서는‘본격 소설’을 확립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서구적 의미의 완미(完美)한 개성을 지닌 인간상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시대적 상황과 문단의 상황은 그로 하여금 본격 소설을 확립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세태 소설론, 통속 소설론, 생산 소설론 등을 내세우며 돌파구를 찾으려는 노력을 이어 간다.
파시즘의 물결이 더욱 높아져만 가던 1930년대 말에 이르러 임화는 고려영화사와 학예사에 깊이 관여 하면서 영화와 출판에 종사하였고, 어느 정도 일본 제국주의의 정책에 부응하는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결국 자신이 모델로 생각해 왔던 근대적시민 문화를 식민지 조선에서 성취하려는 희망마저 포기하는 단계에까지 가게 된다. 그의 눈에는 서구 문명 전체가 히틀러의 파시즘에 굴복한 것으로 보였던것이다.
▲ 임화의 학예사에서 발행한 조선민요선으로 편저자가 임화로 되어있음.
열정의 불꽃이 다시 타올라 시들기 까지
해방이 되었을 때 임화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새나라만들기에 앞장섰다. 식민지시대에 거의 해체되다시피 한 문학 단체를 재정비하기 위해 해방된 지 이틀만에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했으며,
이어서 조선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작업에 임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식민지 시대에 변절 해버린 친 일 부르주아 계급으로는 민주주의 혁명을 이룩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진보적 지식인등을 아우르는 ‘인민’을 민족의 주축으로 삼아 혁명을 이룩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게 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일종의 계급 연합적 성격을 띤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그는 문학 활동에 못지 않게 정치 활동도 활발하게 펼치는데, 구체적으로 보성중학동창인 이강국이 사무국장으로 있던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기획차장으로 활동하면서 박헌영(朴憲永, 1900~1955년)이 이끄는 남로당의 문화 정책 수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가 남로당의 활동이 불법화되자 박헌 영 등의 지도부와 마찬가지로 월북을 하게 된다. 그는 평양으로 가지 않고 해주에 머무르면서 제일 인쇄소를 거점으로 대남 활동에 종사하였다.
얼마 뒤에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임화는 다시 고향인 서울로 내려와서 문화 공작을 하였다. 그 기간에그는 전선시를 묶어 마지막 시집『너 어느 곳에 있느냐』(전선문고, 1951년)를 출간하였는데,
바로 이 시집에 실린 시 때문에 그의 운명은 최후를 맞게된다. 주지하다시피전쟁이소강상태에이르렀을때북한에서는남로당 숙청 작업이 시작되었거니와, 임화가 창작한 전선시는 엄호석(嚴浩奭, 1912~1975년)으로부터 전쟁터에 나가있는 군인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비판을 받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이승엽(李承燁, 1905 1953년) 등과 함께 체포되었고, 북한정권전복음모와 간첩 행위 등의 혐의로 심문을 받았다. 안경알로 동맥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53년 8월 6일 임화는 이승엽 등과 함께 북한 최고 재판소 군사 재판부로부터 사형을 언도 받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월남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시체는 묻어주는 사람이없어 방치되었다고 하며, 처 지하련과 슬하의 자녀들도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임화가 살다간 삶의 역정은 격동기의 한국 근대사를 압축시켜 놓은 것처럼 굴곡 많고 험난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꿈꾸던 세상을 이루지 못한 채 파란만장한삶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그가 고민했던 문제, 즉‘어떻게 하면 주체적인 삶을 살 것인가?’하는 문제는 여전히 우리 앞에 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 보다도 우리의 삶이 여전히 근대적 기반 위에 서 있고, 우리가 아직도 통일된 민족 국가를 이룩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김외곤 : 서원대 미디어창작과 교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현대 문학으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한국 근대 리얼리즘 문학 비판』, <한국 현대 소설 탐구>, <문학과 문화의 경계선에서>등이 있다.
임화문학연구
김용직(임화문학연구, 세계사, 1991)
우리 현대사와 문학사에서 임화(林和)처럼 아픈 상채기로 열린 이름도 드물 것이다. 그는 우리 사회가 갓 근대적 차원을 구축하기 시작한 1920년대 중반기에 시인으로 우리 문단에 등장했다.
이후 그는 외곬으로 좌파이데올로기에 매달린 가운데 전 문단을 제패한 듯 보인 카프에 관계하여 그 핵심적인 활동분자가 되었다.
그 무렵 그의 행동지표는 계급투쟁을 축으로 한 반제(反帝)·사회주의 문학건설 쪽에 놓여 있었다. 이런 임화(林和)의 행동은 당연한 사태의 귀결로 총독부 사찰진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끊임없는 감시
, 규제의 대상이 되었고 거듭 소환, 구금, 투옥에 처해진 바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임화(林和)는 일제치하(日帝治下)에서 가장 핍박받는 예술가 또는 지식인으로 산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 민족이 해방된 8·15를 맞고나서도 그런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8·15와 함께 총독정치는 패퇴하고 우리 민족에게는 자유가 주어졌다.
그러나 임화(林和)와 그가 신봉한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그것은 표면적인 자유, 해방의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8·15 후 일본의 총독정치를 청산시키기 위해 남쪽에 진주한 것은 미합중국의 군대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체제에 의해 38선 이남의 지배 통치가 이루어짐을 뜻했다. 임화(林和)와 그가 신봉한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그런 것은 투쟁, 격파해야 될 당면의 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곧바로 그 자신과 그가 규합한 문학, 예술인들을 동원하여 반미·반제투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그의 활동은 시와 비평, 논설을 통한 문예분야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때로 그 틈서리에는 직접적인 파괴행위도 끼어든 듯 보인다. 어떻든 임화(林和)의 이들 활동은 38선 이남의 통치세력인 미군을 격발, 분노하게 만들었다. 결과 그에게는 다시 소환·구금의 명령이 떨어지고 체포영장이 발부되기에 이르렀다.
연보에 따르면 1947년 임화(林和)는 그에게 떨어진 체포령을 피해서 38선을 넘어 월북의 길을 택했다. 북쪽에서 그는 다소간 그쪽 문학예술단체의 활동에도 가담한 바 있다.
그러나 거기서 그가 주로 관계한 것은 박헌영(朴憲永), 이승엽(李承燁)파의 일원으로 남쪽의 혁명투쟁을 지휘, 통솔, 선동, 조직하는 일로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월북 후 임화(林和)는 주로 해주에 머물면서 대남공작에 목적을 둔 당기관지 "노력자"를 편집하는 일을 담당했다.
거기에 그는 수많은 선전·선동 논설과 시를 썼고 때로는 강연, 토론회를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말할 것도 없이 임화(林和)가 그 나름의 사명감에 입각해서 시도했을 것이며 거기서 보람도 느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들 사정이 감안된다고 해도 월북 후 그의 생활이 순편하고 안정되었다 볼 수는 없다.
한편 그들이 조국전쟁이라고 부른 6·25 동란은 임화(林和)에게 결정적 파국을 몰고 왔다. 전쟁이 발발하자 다른 대부분의 북쪽 문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남침한 인민군을 따라 전선에 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때 그는 최전방인 낙동강 전선에까지 이르렀고, 그후 인민군이 패주하게 되자 멀리 국경선을 넘어서까지 내쫓겼다. 그리고 1953년 8월 6·25 패전의 책임을 묻는 북쪽의 권력 다툼 틈바구니에서 처형되어버리는 것이다.
처형 당시 그에게 내려진 북쪽 사법당국의 죄목은 국가전복을 위한 테러행위와 미제의 고용간첩 노릇을 했다는 것이었다. 임화(林和)의 인간과 예술, 시를 다소간이라도 살핀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가지 사실에는 명백한 이야기가 성립될 것이다.
그것은 임화(林和)가 30년 가까운 동안 계급주의 유물사관의 신봉자였다는 점이다. 그런 그가 파당의 논리에 따라 북쪽의 집권세력에 맞서려는 입장을 취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지 않다. 그가 20년대 중반 이래 외곬으로 믿고 추구해 온 것은 다름 아닌 사회주의사회의 찬란한 무지개였던 것이다.
그런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어쩌면 6·25를 전후해서 북쪽 집권세력이 보여준 작태는 있을 수 없는 추태로 비쳤을 공산이 있다. 이에 그는 그들의 거세, 추방을 시도한 이승엽 일파의 기도에 동조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모로 보든 그가 미국의 고용간첩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전혀 그 자신이 범한 바 없는 죄목을 목에 차고 그것도 일제치하에서 애타게 외치고 바란 사회주의 조국의 이름으로 처형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쪽에서 임화(林和)는 전혀 복권될 기미가 없다. 북쪽에서 나온 "조선문학사"는 이런 경우의 우리에게 좋은 증거자료가 된다.
이 문학사는 모두가 다섯 권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 셋째권이 일제시대의 문학사다. 그런데 여기서 임화(林和)는 전혀 시인으로 문제된 것이 없다. 다만 한두 곳의 문학론에서 그의 주장이 처음부터 반동패배주의의 본보기로 단죄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곧바로 얼마간의 물음을 던지도록 만든다. 대체 임화(林和)가 그렇게 믿고 추구하려던 시와 예술이란 어떤 것이었던가. 그리고 그가 모든 행동의 구심점으로 삼은 이데올로기는 어떤 성격을 지닌 것이었던가. 이제 우리가 시도하는 임화론(林和論)은 이런 각도에서 시작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