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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올해의 책
굶주림과 공포를 극복하는 방식
─ 『갈라진다 갈라진다』, 김기택 시집
김 성 규
시대가 어두울수록 사람들은 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 자본주의 사회의 이단아들, 시인들은 올해 어떤 시를 썼을까. 모두 사력을 다해 시를 쓰는 그들에게 시란 과연 어떤 존재이기에 시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시 때문에 서로 다투고, 심지어는 자신의 경제 활동까지 포기하게 만드는 것일까. 시 쓰는 일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기택 시인의 『갈라진다 갈라진다』는 첫 시집에서부터 보여주었던 세계를 확대해 보여주고 있다. 방법론이나 주제의식에 있어서나 그동안의 연장선에서 진행된 시집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펼치는 순간 쉽게 덮지 못한다. 놀라움 속에서 굶주림과 공포는 자신을 선연히 드러내며 생명은 끈질기게 이어진다. 선명한 이미지와 시 속의 이야기는 추울 때, 배고플 때, 새나 쥐를 보았을 때, 깨진 유리와 송충이를 보았을 때, 장애인을 마주칠 때, 갈비집 앞을 지날 때 우리 의식 속에서 튀어나와 김기택 시인이 이런 시를 썼었지,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먹자골목을 지나며」 같은 시를 읽고 나는 한때는 고기를 먹기가 곤욕스럽기도 했다.
죽은 살이 타는 냄새임이 분명할 텐데/ 왜 이렇게 달콤할까?/ 이것은 죽음의 냄새가 아니고 삶의 냄새란 말인가/ 필시 그 죽음에는 오랫동안 떨던 불안과/ 일순간에 지나온 극도의 공포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 냄새에는 그런 기미가 전혀 없다,/ 오로지 감칠맛나기만 해서 천연덕스럽고 뻔뻔스럽다/ 정말 이것이 죽음의 맛일까
─ 「먹자골목을 지나며」 부분, 『바늘구멍 속의 폭풍』
고기 냄새가 난다/ 불판 위에서 맹렬하게 들썩거리는 소리가 난다/ 지독한 발음 냄새가 난다/ 살려 주세요
─ 「할여으에어」 부분, 『갈라진다 갈라진다』
역설적이게도, 고기 냄새는 죽음의 냄새인 동시에 삶(생명)의 냄새다. 고기 냄새는 죽은 동물의 살이 타는 냄새이며 살이 타는 순간 고기에서는 “일순간에 지나온 극도의 공포”가 제거되고 “감칠맛나기만 해서 천연덕스럽고 뻔뻔스”러운 냄새가 뿜어져 나온다. 그러나 어쩌랴. 이 죽음의 냄새가 식욕을 자극하고 우리는 허겁지겁 냄새를 먹는다. 죄의식도 없이 생명이 먹고 싶은 것이다. 고기 냄새를 맡고 식욕을 느끼는 것은, 죽음의 냄새를 삶의 냄새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이 유기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단순히 식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넓게 보자면 다른 생명을 섭취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인간, 그 폭력성을 내재한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이 시를 확대해 보면 인간은 결과적으로 생명 착취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무서운 결론,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시집을 읽고 나면 놀라움 속에서도 인간이 지닌 폭력성과 죄의식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진다.
고기 냄새에는 “지독한 발음 냄새” “살려 주세요”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냄새를 맡고 식욕을 느끼는 뻔뻔스런 인간의 육체는 무엇인가. 이 시에서 육체는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은 가치중립적 육체다. 배고프면 화가 나고 배부르면 평화로운 육체, 그 육체에는 선악도 없고 미추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스스로 생명을 이어가려는 유기체에 불과한 육체다.
김기택 시인의 이런 세계관은 육체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첫째, 육체는 폭력성을 내재한 존재로서 타자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 따라서 평화와 일상에 숨어 있는 육체의 발톱을 시 속에서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는 육체가 지닌 폭력의 유산(유전자)에 대해 다소 긍정적으로 보여준다. 육체가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존재하는 폭력 속에 타자에 대한 사랑, 자연의 유구한 아름다움이 간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예로는 『태아의 잠』에서「호랑이」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이번 시집에서는 「여친 어머니 살해사건」으로 나타난다.
길고 느린 하품과 게으른 표정 속에 숨어 있는 눈/ 풀잎을 스치는 바람과 발자국을 빈틈없이 잡아내는 귀/ 코앞을 지나가는 먹이를 보고도 호랑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위장을 둘러싼 잠은 무거울수록 기분 좋게 출렁거린다/ -중략- / 그러나 멀지 않아 텅 빈 위장은 졸린 눈에서 광채를 발산시키리라/ 다리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어슬렁어슬렁 걷기 시작하리라
─ 「호랑이」 부분, 『태아의 잠』
그가 폭발물이었다는 것을/ 온몸이 뇌관으로 덮여 있었다는 것을/ 작은 진동만으로도 온몸의 뇌관이 반응한다는 것을// 여친도 그녀의 어머니도 몰랐다고 한다.
─ 「여친 어머니 살해사건」 부분, 『갈라진다 갈라진다』
동시에 그 폭력성이 긍정적인 형태로 나타날 때는 『태아의 잠』에서 볼 수 있는 신비로움,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모녀」 등에서 보여주는 자연의 부드럽고 강한 힘으로 나타난다. 폭력이 주는 공포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부드러운 힘도 인간의 삶에서 엄청난 힘으로 인간의 생명을 유전시키는 하나의 요인이다. 이런 이미지는 물 이미지와 빛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이 두 가지 힘이 길항하며 인간은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녀의 배 위에 귀를 대고 누우면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작은 숨소리 사이로 흐르는 고요한 움직임이 들린다 따듯한 실핏줄마다 그것들은 찰랑거린다 때로 갈비뼈 안에서 멈추고 오랫동안 둔중한 울림이 되어 맴돌다가 다시 실핏줄 속으로 떨며 스며든다 이 소리들이 흘러가는 곳 어딘가에 새근새근 숨 쉬며 자라는 한 아이가 숨어 있을 것 같다
─ 「태아의 잠 1」 부분, 『태아의 잠』
방금 딴 사과들이 가득한 상자를 들고/ 사과들이 데굴데굴 굴러 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 그녀는 서류뭉치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고층 사무실 안에서/ 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빛깔을//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사과를 나르던 발걸음을/ 발걸음에서 튀어 오르는 공기를/ 공기에서 터져 나오는 햇빛을 햇빛과 과즙과 햇빛 향기를//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지금 디딘 고층이 땅이라는 것을/ 뿌리처럼 발바닥이 숨 쉬어 온 흙이라는 것을/ 흙을 공기처럼 밀어올린 풀이라는 것을
─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부분, 『소』
딸의 얼굴이 조금 들어가 있는 엄마가/ 소곤소곤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딸이 엄마의 웃음을 똑같이 그리며 웃고 있다./ 두 웃음이 하나의 얼굴에서 웃는다./ 엄마가 나직나직 이야기할 때/ 두 얼굴은 모두 엄마가 되었다가/ 딸이 생글생글 이야기하면/ 두 얼굴은 금방 명랑한 딸의 얼굴이 되곤 한다./ 두 몸에서 나온 하나의 얼굴./ 두 얼굴에 맞붙어 있는 한 눈, 한 웃음./ 한 웃음 속의 두 입, 두 웃음소리./ 서로 단단하게 붙어 있는, 둘로 갈라져 버리면/ 바로 피가 날 것 같은 하나의 얼굴.
- 「모녀」 부분, 『갈라진다 갈라진다』
폭력과 생명의 신비가 동시에 간직되어 있는 인간의 육체를 영속시키기 위한 절대적 존재는 무엇일까. 인간은 다른 생명을 섭취함으로써 육체를 영속시키므로 먹이가 부족하거나 외부 환경이 취약할 때 생명이 다하므로 배고픔, 추위, 더위 등이 인간 생명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굶주림, 추위, 공포는 모두 같은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춥다는 것, 배고프다는 것은 모두 유기체의 활동을 중단시킬 수 있는 공포의 다른 이름이다. 책을 읽다 보니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초기에 출간한 시집의 첫 시들은 대부분 굶주림과 관련이 있다.
비닐봉지 향기로운 쥐약이 붙어 있는 밥알들/ 거품을 물고 떨며 죽을 때까지 그칠 줄 모르는/ 아아 황홀하고 불안한 식욕
─ 「쥐」 부분, 『태아의 잠』
하얀 사기 그릇 하얀 김 하얀 밥/ 머리 가득 밥 생각 마음 가득 밥 생각/ 한 그릇 밥처럼 환해지고 동그래지는 얼굴
─ 「밥 생각」 부분, 『바늘구멍 속의 폭풍』
배고프면 더 신나게 흔드는 추위/ 숨 쉴 때마다 텅 빈 위장에 밥 대신 들어앉아/ 배고픈 배 흔들며 뛰어노는 추위
─ 「겨울을 기다림」 부분, 『사무원』
굶주림, 죽음, 폭력의 공포 속에서 떠는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까. 굶주림에 빠진 육체는 무엇인가 먹이를 찾아 온 신경을 집중할 것이고, 죽음 직전의 육체는 닭살이 돋을 것이고, 공포와 슬픔 속에서 인간은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극복해 낸다. 고체성에 비해 부드러운 액체성은 「태아의 잠」에서도 생명의 신비로움과 결합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이미지다. 액체성은 기존 대상의 형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형체를 부여하는 죽음과 재생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특히 인간의 눈물은 기존의 고통을 녹여내 새로운 힘을 갖게 만드는 요소다. 김기택 시인의 시에서도 울음은 외부 세계를 받아들여 재창조해 내는 죽음과 재생의 의미로 나타난다.
울음 우는 바람을 들이마셨네/ 꿈틀거리는 먹이처럼 목구멍과 식도를 지나며/ 바람은 소리죽여 떨었네 떨림은 두껍고도 굵어/ 첨벙첨벙 가슴을 흔들며 떨어졌네 –중략- 울음 우는 바람을 불어 날렸네/ 지느러미 흔드는 육중한 소리가 되어/ 더 큰 바람을 끌고 다니는 노래가 되어/ 원통형 굵고 긴 몸뚱이는 꿈틀거리며 나왔네/ 떼 지어 날아다니는 울음들 속에 내 노래도 섞이겠네
─ 「노래에 대하여」 부분, 『태아의 잠』
그의 내부에서 무엇이 녹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은 어둡게 일그러져 있었지만/ 녹으면서 뿜어 나오는 빛으로 내부는 환했을 것이다
─ 「울음」 부분, 『바늘구멍 속의 폭풍』
콘크리트 밑에 깔린 수많은 물줄기들이/ 봄이 오면 깨어나/ 밖으로 솟구쳐 나오려다 목이 꺾여 죽으면/ 새 물줄기들이 몰려와 다시 들이받기 때문이다
─ 「풀」 부분, 『갈라진다 갈라진다』
첫 번째 시 「노래에 대하여」를 보면 화자는 “울음 우는 바람을 들이마”시고 그것을 자기화해 다시 불어 날린다. 자기화하는 불어 날린 울음은 “지느러미 흔드는 육중한 소리가 되어/ 더 큰 바람을 끌고 다니는 노래가” 된다. 이 시에서 화자는 처음에 울음 우는 바람을 받아들이는 피동적 입장이다. 그러나 그 울음을 소화시킨 후 다시 울음 우는 바람을 불어 날릴 때 화자는 주체적 입장으로 변한다. 이것은 다음 시 「울음」에서도 마찬가지다. 울음을 우는 자의 내부는 “얼굴이 어둡게 일그러져” 있다. 그러나 울음을 거친 후에 긍정적이며 주체적 화자로 바뀐다. 왜냐하면 그의 내부에서는 고체가 액체화되며 사라진 자리, 형태가 사라진 자리에는 더 큰 것을 담을 수 있는 허공이 생겼기 때문이다. 즉 무화되는 순간이 재창조의 순간이 된 것이다. 무화하는 상태는 동시에 재창조되는 과정의 일부이며, 텅 빔으로 가득 찬(공기와 빛과 바람이 가득 찬) 상태가 되는 역설의 의미가 숨어 있다. 형체의 무화화는 물 이미지와 불 이미지가 결합하여 탄생과 부활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의 내부는 “녹으면서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환하다.
「풀」은 위의 시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물 이미지가 대상을 어떻게 파괴하고 재창조하는가 잘 보여준다. 콘크리트 밑에 깔린 물줄기들은 단단한 것에 어떻게든 균열을 일으키고 틈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작은 힘이지만 끊임없는 반복과 맹목성을 통해 대상을 파괴한다. 이런 장면은 식물뿐 아니라 인간들이 어떻게 죽음을 이겨내고 살아갈 수 있는지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물줄기들이 강력한 콘크리트를 어떻게든 비집고 나오는 장면은 그 자체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든다. 외부로 솟구치는 물줄기가 곧 억압을 뚫고 분출되는 인간의 무의식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 인간이 지닌 본성(佛性)이나 욕망, 민중의 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풀이 지닌 물 이미지는 강약의 대비, 순간과 영원의 대비를 통해 “약하다는 것이 강하다는 것보다 더 두렵다(「유리에게」)” 혹은 강하다 정도의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며, 순간은 약해 보이지만 그것이 지속될 때 영원성을 지닌 강함을 획득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이렇게 살펴보았을 때 김기택 시인에게 시라는 존재는 굶주림과 공포를 받아들이며 동시에 무너트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소화기관이다. 또한 굶주림과 공포의 형태를 울음으로 녹여 자기화하며 동시에 노래를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시 쓰기의 작업이다. 이때 녹이거나 태우며 발생하는 빛, 공포와 죽음이 뿜어내는 빛이, 울음으로 변한 슬픔이 콘크리트를 들이받고 결국 콘크리트를 갈라지게 만든다. 이렇게 보면 시(노래)는 형태를 파괴하고 다시 만드는 행위 즉 우는 행위다. 결국 시(노래)는 우는 것이고 노래하는 행위 그 자체가 죽음을 삶의 의미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에 시인들은 쓰고 또 쓴다. 살기 위해, 울고 또 운다. 죽음과 공포를 울음으로 녹여내기 위해, 언어로 우리 자신을 증명하고 내가 여기 살아 있다고 말하기 위해 쓰고 또 쓴다.
재주 많고 활발하고 재미있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시 쓰는 일 말고는 달리 취미도 재주도 할 일도 없는 내 뛰어난 무능력과 활발한 지루함과 앞뒤 못 가리는 성실성(「시인의 말」)”을 가진 선배들이 아직도 문학을 하고 있다. 재주 많은 우리들이 재주 없는 그들과 함께 시를 쓴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X세대, Y세대, N세대에서 엄지족까지 출현했다고 말하지만, 과연 우리는 얼마나 새로웠으며 얼마나 세계와 싸우며 시를 썼을까.
배고픔과 공포, 죽음이 우리 살을 파고들 때 오히려 인간은 배부름과 웃음과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는다. 배부르게 누워 따듯한 방에 누워 있을 때 우리는 과연 시를 떠올릴까. 우리가 누려 온 풍요, 인류 역사상 거의 처음 맞이하게 된 풍요 속에서 우리는 어떤 문학을 생산해 낼 수 있을까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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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규 / 1977년 충북 옥천 출생. 2004년〈동아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
《문장웹진》2013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