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겨울바다가 그립다.
바다를 느끼고 온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건만 매섭도록 추운 겨울바다가 또다시 그리운 이유를 뭐라 설명해야 하나? 생명의 보고(寶庫)이자 천지창조의 신비를 간직한 바다는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을 지녔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휴가 때만 되면 바다로 떠나는 걸까.
겨울 흑산도를 다녀왔다. 전남 신안군에 속한 흑산도에서 전복 양식장과 식당을 운영하는 조인기(마르코, 63, 흑산본당 선교분과장)ㆍ이영숙(실비아, 58)씨 부부를 만나 겨울 전복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겨울바다목포에서 뱃길로 115㎞ 떨어져 있는 흑산도는 한반도 서남단 끄트머리를 장식하는 섬이다. 목포에서 쾌속 여객선으로 2시간이 걸린다. 거리가 먼 만큼 날씨에 따라 뱃길이 자주 끊긴다. 특히 겨울엔 센 바람이 잦아 배가 뜨지 않는 날이 많다.
조씨 부부도 이번 설에 목포에 사는 조씨 어머니를 찾아 흑산도를 떠날 때 예정보다 하루 늦게 출발했고, 돌아올 때도 하루 늦게 올 수밖에 없었다. 기상청 '주의보'가 뜨면 여지없이 뱃길은 끊긴다. 배가 뜨더라도 날이 선 칼처럼 매서운 겨울 바닷바람이 파고를 올리는 바람에 이리저리 배가 흔들리기 일쑤다.
1월 26일 오전 7시 50분 목포에서 출항하는 첫배를 탄 기자는 배 안에서 조씨 부부를 만나 함께 흑산도로 향했다. 출항 30분 전쯤 동쪽하늘이 선분홍빛 파스텔색조로 물들었다. 해를 품은 바다가 품속에서 해를 밀어낼 때, 배는 바닷물을 힘껏 밀어내며 겨울 속 흑산도로 향한다.
"아따 이 정도 파도는 파도도 아니지라. 기자님은 운이 좋은 거요잉. (파도가) 3미터가 넘을 때면 배가 요동을 친당께. 그럴 때면 우리(섬 사람)도 워메 그냥 죽어부러."
자주 목포에 드나든다는 이영숙씨도 겨울철 높은 파도가 고역이긴 고역인 모양이다. 그는 "흑산도에 대한 외지인들 인상은 딱 둘로 나뉜다"고 했다. '다시 오고 싶다'는 부류와 '다시는 안 오겠다'는 부류다. 전자는 보통 여름철 바다가 잔잔할 때 온 이들이고, 후자는 겨울철에 오느라 뱃멀미로 심하게 고생한 이들이다.
#바다의 기운을 품은 겨울 전복홍어와 전복의 고장 흑산도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려 1분쯤 걸었을까, 부부가 운영하는 라파엘수산 식당이 눈에 들어온다. 주위를 살펴보니 라파엘수산 옆에 요한수산이 있고, 다시 그 왼쪽으로는 젬마수산이 있다. 처음 보는 식당인데도 친근감이 든다. '흑산도가 교우촌인가'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조씨는 "다들 신자잉께 (가게 이름이) 그러지요. 쪼기 남영수산과 평화수산도 신자 집이랑께"라며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신자 가게 자랑에 여념이 없다.
흑산도를 포함해 섬으로 이뤄진 전남 신안군은 섬 개수가 1004개여서 '천사마을'로 불린다. 천사마을 중 하나인 흑산도에서 라파엘 천사를 비롯한 여러 성인들(?)을 만난 것은 여간 기쁜 일이 아니다.
전복과의 만남은 그의 배 '라파엘호'를 타고 흑산항에서 뱃길로 1㎞쯤 떨어진 전복 양식장에 도착해서 이뤄졌다. 그는 가로 세로 2.5m 크기의 가두리 양식장 170여 개에서 20만 마리가 넘는 전복을 기른다.
조씨가 기계로 그물을 올려 '전복 아파트'라고 부르는 전복 집을 건져 올리자 제법 알이 굵은 것들이 붙어 나왔다. 전복은 '바다의 웅담'이라는 별명답게 예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았다. 2월부터 제철인 전복은 자양강장은 물론 시력회복과 원기회복에 효험이 있다.
사진 찍는 데 열을 올리는 기자에게 조씨가 방금 잡은 전복을 맛보라며 건넨다. 생전 처음 먹는 전복회에서 겨울 바다 냄새가 난다. 바다에서 방금 꺼내 짠맛이 강했지만 '또각'거리며 씹히는 신선한 감촉과 바다 내음은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젊은이들이 떠나간 외로운 섬
흑산도에 사람이 붐볐던 시절은 1970년대까지다. 당시는 홍어가 풍년이던 시절이어서 흑산항에는 홍어를 팔려는 어민과 이를 사려는 상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조씨는 "1970년대 이후 홍어 어획량이 줄면서 섬을 떠나는 주민이 크게 늘었다"며 "육십이 넘은 나이에 앞으로 얼마나 더 흑산도를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
본당에서 선교분과장과 재정분과장을 겸임하고 있는 그는 "젊은이가 없어 두 개 분과 일을 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하다"고 털어놨다. 섬에는 주로 노인만 있다 보니 생업부터가 걱정이어서 선교에도 한계가 많다는 것이다.
흑산도를 포함한 흑산면 일대 섬 주민 인구는 4600여 명이지만, 도서민용 뱃삯을 내려는 일부 얌체 낚시꾼들이 자신의 주소를 흑산도로 옮긴 경우가 많아 실제 인구는 훨씬 적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최근 들어 흑산도 해산물이 일본에 대량 수출되는 것이 그나마 이곳 주민들 숨통을 틔워준다. 지난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인들 주문이 크게 늘었다. 흑산도에 한 번이라도 다녀간 일본 관광객들은 흑산도의 깨끗한 바다와 자연경관, 해산물을 잊지 못한다는 후문이다.
조씨는 "하느님께서 지으신 깨끗한 바다를 느끼고 싶다면 언제든지 흑산도를 찾아달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겨울이면 강해지는 파도를 미워하기보다 자연의 위대함을 몸소 느껴보라는 하느님 말씀처럼 다가온다.
이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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