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가을, 제25회 ＜시로 여는 세상＞ 신인상 당선작- 프로페셔널(외 4편)/ 권현지

[강인한]

  제25회 <시로 여는 세상> 신인상 당선작

                                          _ 심사위원 : 이영주, 박성준

  프로페셔널 외 4편

     권현지

겁 많은 빨간 목도리 안으로

한쪽 눈만 보여주는 표범 무리가 있다

의심스럽게 반짝이는 숲의 근원을 찾아 나선다

물 위로 떠다니는 구멍 난 치즈처럼

맨다리의 촉감을 생각하며 준비운동을 한다

호루라기를 문 오리들의 삐, 신호음이 들려와

나는 연못 안으로 뛰어든다

움직이면 조금 더 커지는 바다를, 떠올리며

바닥 위로 자라나는 가시들은 온통

촉감 인형처럼 간지럽다

양동이를 뒤집어쓴 마을은 내게 걸어온다

온통 머리는 하얗고 들판처럼 투명하다

나는 두 다리를 가슴 쪽으로 모으고

조금씩 작아지려는 태아처럼,

피리들의 아지트 안에서

빈 병을 바라본다

너는 이제 울어야 해,

물 위로 둥둥 떠오르는 식빵의 마음으로

트리 위에 양말을 걸고 싶다

저 멀리, 검은 표범을 타고 파란 수염의 여자가

달려온다 돋보기로 나를 확대한다

나는 인중을 최대한 오므린다, 눈을 가운데로 모은다

그러나 웃을 때 치아가 보이지 않는 콤플렉스는

가장 높은 빨간 에나멜 구두가 되고 싶다

조금씩 방향을 다투어 회전하는 숲들

진열장은 휘청거리고, 병들은 바닥 위로 굴러떨어진다

유리 파편 사이로 집게를 버린 전갈들

유심히 나를 바라본다

양파의 시간

새파랗게 돋아나는 양파의 싹은 왠지 불안했습니다

물안경을 쓰고 커피 하우스를 지날 때

나무에서 떨어진 부엉이 한 마리

정도껏 날았어야지, 너 어쩌다가 내 손에 담겼니

다리가 부러진 부엉이를 가방 안에 담고

지퍼를 올리면, 폭죽 소리가 들려옵니다

누군가의 결혼기념일 같습니다

초콜릿 케이크 위 빨간 리본을 풀듯

나는 재빨리 재킷을 벗습니다

온몸에 크림이 묻었습니다

조용한 숲으로

뒷짐을 진 두 손으로

말 걸고 싶은 고목들에게 다가갑니다

흔들리는 잎사귀들, 손전등으로 비추면

침묵의 웅덩이 밖으로 거기,

회전문을 밀고 나오는 양파

새파랗게 돋아나는 양파의 싹

파란 세계를 꿈꾸는 뒤통수는

바라보면 눈물이 납니다

울면서 크림을 핥아 먹습니다

이제, 요리할 시간입니다

트레비 기차

눈 가린 말들의 혼잣말이 들려와 나는 트레비 호수에 동전을 던진다

가늠할 수 없어서 이것은 몇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진 기차입니까

퍼레이드를 향해 나아가는 기차가 있다 코코아를 마시면서 꿈에 관해 이야기하는 아이들이 있다

가정의 대문은 활짝 열려 있고, 모두가 잠든 새벽으로부터 기차는 망토를 끌어모은다 불꽃이 터지고, 타오르는 바퀴들은 누군가 잃어버린 기억 같아서 나는 유령이라고 명명한다

지붕 위로 올라가 탄산수를 마시며 기차의 행렬을 내려다보는 소년, 그 맨발을 올려다보는 당신의 뒷모습은 투명망토를 닮았다

말의 고삐를 잡고 밤의 언덕을 오른다

오늘의 창문 위로 말굽 소리가 당도하면, 안대를 벗고 거울 앞에 선다

당신과 맨 얼굴로 면담하고 뜨거운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이곳은 수감된 자들의 노래가 들려오는 감옥, 수인번호들이 절벽 위로 기어오르고

내가 내민 손가락을 잡는다면 이 기차는 다시,

달려나갑니까 동굴 속 괴한들이 묻어놓은 안전모는 이제 영원합니까

주머니 속 지도는 폐기되었고, 칸막이 뒤로는 밤의 테라스가 있다

아무도 먹지 않은 빛나는 접시,

조금씩 거대해지는 퍼레이드의 행렬, 거리의 악사들은 퍼레이드의 리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다

유령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당신은 즐거운 퍼레이드의 행렬로 나아가는 중이다 거울 위로 서로의 얼굴을 비추어보는 아이들, 자라나는 꼬리들,

태어나는 문장들을 다독이면서, 방향을 더듬으면서

이것은 가늠할 수 없어서 몇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진 기차입니까

트레비 동전들 기억을 반추하며 젖은 망토를 끌어모은다

비상구

노랑

노랑

쏟아진다

입 벌려

혼돈 속에서 납작 엎드려 있어

휘날린다, 언덕들의 몽유

긁는다고 열리지 않아

우편함 속에서 쓰다듬고 싶어

소리 나는 조개껍데기 밖으로

헝클어진 그림자, 기어 나온다

맞이할 팔은 짧아서

티셔츠의 구멍 밖으로

다락의 검은 쥐들이 들락거리는 14월

알람은 울리지 않고

생일도 까먹을 수 있어

자꾸만 닳아가는 케잌 위의 작은 초들,

괜찮아?

목걸이를 물고 달아나는 부리가

내 이름표를 놓칠 때

둥지를 파헤치는 손등

무덤을 바라보는 부러진 안경 위로

올라가 피리를 분다

구멍 사이로 흘러내린다, 아이스크림

발룻(Balut) *

요트 안으로 멈춘 오후 3시,

당신을 내려다보며 파라솔 위의 점심을 추억하는 중이다

피의 사원으로 나온 여행자 가족들은 즐거운 저녁 메뉴를 떠올린다

거리의 산책자처럼, 당신도 유유히 흘러가는 중이다

금발의 여인들은 받침을 걸친 듯 비문 없는 완전한 언덕을 향해 걸어간다 구두를 잃어버린 주인처럼, 당신은 가끔 고독에 합류한다 이편을 향해 탈출하고 싶다

방전된 핸드폰 안으로는 소속되지 않은 전화번호들이 넘쳐나고, 당신은 언제나 번호들을 폐기하고 싶지만

들개들이 기지개를 켜는 오후는 지루하다 긴 소매의 구멍, 검은 제복을 입은 신부들의 목청에서 성가의 화음이 지붕을 휘감으면 역사는 반추되는가 액자 위에 걸린 왕비의 붉은 웃음은 사진 안에서만 영원히 흡혈하는가

초상화의 액자 위로 빛이 반짝, 이면 사원의 과실수는 허기를 느낀다 사과 한 알이 바닥 위로 툭, 떨어지면 균열 사이로 노을이 깃든다

유폐된 요트로부터 해가 들어서면 당신의 하루는 천천히 시작을 더듬는다

당신에게는 냄새가 없다 달걀의 얇은 막처럼,

주머니를 뒤집으면 말라비틀어진 담배 한 개비가 만져질 뿐이다

네바 강을 바라보는 요트 안의 시체

녹슨 캠벨 통조림과 말라비틀어진 과일 조각

염분으로 보존된 책상 앞의 시선은

녹슨 철제 시계를 바라보고 있다

파라솔이 접힌다

당신은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본다

부화 직전의 발룻.

*발룻(Balut): 부화 직전의 오리 알을 삶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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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현지/ 1991년 경기도 시흥 출생. 단국대 문예창작과와 대학원 문예창작과 전공. 2016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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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

권현지의 탄생

       박성준 (시인, 문학평론가)

  상반기 신인상에서 심사를 맡은 심사위원이 하반기에도 동일하게 심사를 한다는 편집부 방침에 따라, 두 계절이 지나 다시 이영주 시인과 마주 앉았다. 심사는 아주 간단했지만 심사 결과에 도달하는 과정은 다소 복잡한 기분이었다. 망설임이나 어떤 이견도 없이 우리는 권현지의 ｢발룻｣ 외 9편을 밀었다. 권현지의 시는 다른 어떤 응모작들보다 월등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시가 될 수 있는 방식들을 전시하는 재기(才氣)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왜 이것이 ‘권현지의 시’가 될 수 있는지, ‘알아가게 하는’ 가편들이었다. 응모된 작품들을 당선작으로 밀어도 손색이 없었다. 오래 자기 시를 궁리해본 흔적들은 물론이거니와 제 목소리를 안착시키는 발랄함까지 고루 갖추고 있었고, 육성과 이미지들 사이의 시차로 하여금 세계를 가볍게 묵인하거나 봉인하는 언술방식들이 이미 기성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한데 권현지처럼 시를 쓰는 기성은 딱히 만나본 적 또한 없어서, 신인이 으레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오인되는 기시감마저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특히 적절한 색감의 농도차를 통해 구현하고 있는 세계의 일그러짐의 강도는 한 번 빠져들면 헤어 나오기 힘들 정도였다. 이런 신인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시로여는세상》의 입장에서도 심사를 보았던 우리들에게도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반가웠지만 곧 참혹해졌다. 조금 더 솔직하고, 냉정해져야 했다.

우리는 당선작을 이미 뽑아놓고 ‘당선작 없음’과 ‘당선’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 것이다. 우리 잡지뿐만이 아니라 시 전문 계간지 신인상이 가지고 있는 위상이란, 유수 깊은 전통이 있는 중앙 종합문예지들이나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 상당한 자본력을 동원할 수 있는 몇몇 문예지들과는 비할 바가 전혀 못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소위 ‘중앙’에서 등단한 시인이 아니라면, 그 활동 폭 또한 제한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때때로 시는 그다음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기형적 현실에 대해 꼬집어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 시인의 탄생에 대해 모지 격인 여타 문예지들이 해야만 하고, 해줄 수 있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한국의 어떤 시 전문 계간지라도 모두 해당이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지면도, 자본도 늘 풍족하지 못한 형국이고, 게다가 걸출한 시인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나는 권현지의 탄생에 대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고, 결국 시인으로서 혹은 평론가로서 권현지의 시를 좀 오래 지지해볼 작정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더 이상 심사 경위라 할 수 없다. 그러니 응모된 작품 전체를 두고 말해볼 수밖에 없다.

“양동이를 뒤집어쓴 마을”이라니! ｢프로페셔널｣에서 공간을 지각해내는 주체의 몸에 관해서만 언급하더라도 권현지가 지각하는 세계는 이미 다른 세계다. 이 마을을 “겁이 많은 빨간 목도리 안”이거나 “움직이면 조금 더 커지는 바다” 혹은 “회전하는 숲”, “피리들의 아지트”라 달리 불러보아도 좋겠다. 이곳에서 소모되고 있는 공간들은 붉음과 빈 것, 헛것들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 모두 율동성을 내재하고 있는 낭자한 촉감들로 가득한 것이 특장이다. 주체는 이 공간들과 끊임없이 연루되면서 반면에 전혀 그곳들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공간들이 쥐고 있는 억압들과 비껴 나가며 나약해짐과 동시에 그곳들을 더 깊이 겪어 들끓어 오르는 형국인 것이다. 즉 나를 확대하고 오므리는 일의 반복 하면서 죽어 있는 것도 살아있는 것도 아닌 어떤 이상 세계의 입구를 개방하고 또다시 폐쇄시킨다. 권현지의 시는 이 반복을 멈추지 않는다. “물 위로 둥둥 떠오르는 식빵의 마음”처럼 굴었다가도 “가장 높은 빨간 에나멜 구두가 되고 싶다”는 소망처럼 자지러지기도 하고, 그저 어쩔 수 없는 가운데, 정말 어쩔 수 없는 최대와 최소치의 자기 주체성의 난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이토록 큰 진폭의 울음을 가진 당신에게, 울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지 못한 우리가 얼마나 직무유기를 하고 있었던 것인가.

“누군가 가위를 들고 사각사각”(｢크로키｣) 제 그림자의 어느 부위를 자른다손 치더라도 이런 당신이 과연 아프기나 하겠는가. 아니 더 지독하게 아플지도 모르겠다. 배워본 적 없거나 배움을 거부하려는 가운데에서 시작된 이런 아픔들을, 더 가혹하게 느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애초부터 “맞이할 팔이 짧”(｢비상구｣)은 운명으로 태어난 당신이 어찌 쉽게, 삶의 도피처나 비상구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며, “이 밤의 안전을 선언”(｢아나키스트의 빛나는 체인｣)할 수 있었겠는가. “누군가 자꾸 태어나는 이 지겨운 환상”(｢아나키스트의 빛나는 체인｣)까지도 맥없이 제 몸의 일부인 듯, 길들이고 사는 그런 언어들에게 복무하고 있으니, 이 지독하게 차갑고 뜨거운 몸을 “뜨거운 아이스크림”(｢트레비 기차｣)이라 불러 보아도 무방할 듯싶다. 그렇다. 끊임없이 녹아가면서 뜨거워지는 몸의 저주를 감내하고 있는 “당신에게는 냄새가 없다”(｢발룻｣) 냄새 대신 이국의 유령들만 가득해서 도통 모르겠는 통점들로 쿵쾅거리고, 사랑하게 되고, 끝끝내 사랑 따위는 못하게 될 운명이라 그저 아프다. 심장을 바깥에 꺼내놓고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꿈꾸는 뒤통수는/ 바라보면 눈물이”(｢양파의 시간｣) 난다고도 하겠고 “퍼레이드를 향하여 나아가는 기차”(｢트레비 기차｣)와도 같다고도 할 만한데, 나는 때문에 더 궁금한 것이다. 결정지을 수 없는 곳으로 치닫는 그 파랗고 빨갛고 노랑의 우울 아닌 우울의 세계를 더 궁금하다 말할 수밖에……. 좋은 동료 시인이 생긴 것 같아 기쁘다.

끝으로 밝혀둘 이름들이 있다. 예심을 통해 건너온 응모자는 총 김재아, 김태희, 권현지, 권성조, 이서윤, 이영예 지주현, 한휼 등 여덟 분들이었다. 이 중 김재아, 김태희, 이서윤의 투고작이 나름의 자기 목소리들을 내고 있었다. 김재아 분은 지난 신인상 투고작들보다 정돈이 된 느낌이다. 이런 목소리의 결을 가진 사람이라면 시를 정돈하는 것은 독일 수도 있다. 김태희 분은 불규칙 속에서 규칙을 보는 안정성 때문에 색을 너무 많이 칠했거나 덜 칠한 느낌이 강하다. 어느 쪽이든 선택이 필요할 것 같다. 이서윤 분은 그 반대로 규칙 속에서 불규칙을 만들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그럼에도 시적 주체의 육성은 무모하게 질러질 때가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세 분 모두, 일정 수준 이상에서 자기 시를 쓰고 계시다. 위로를 전하고, 정말 죄송스럽다.

        —2016년 《시로 여는 세상》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