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공원 월악산 밑에 있는 부럭이 마을에 언제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부근의 교우촌인 ‘건학’과 ‘여우목’과는 산길로 불과 20~30리 내에 있다. 그러므로 이들 세 교우촌은 처음부터 서로 빈번한 접촉을 하면서 이웃집 드나들듯이 서로 긴밀하게 연락하고 서로 도와가며 열심한 교우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병인박해 직전인 1865년 가을에 박해의 손길이 이곳에도 닿았다. 예천 고을에 살던 양반 계급의 냉담자인 황가는 품행이 고약하여 전 재산을 탕진하여 도둑질을 일삼는 악한이었는데, 이자가 다른 도둑들과 짜고 문경 지방 여러 고을의 교우촌을 유린하였다. 교우들이 합심하여 퇴치하자 원한을 품고 예천 고을 포졸을 앞세워 이곳 신자촌을 덮쳤다.

그때 이 부럭이 신자촌에는 덕망이 높은 박 프란치스코를 비롯해서 11호의 신자 가정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갑자기 포졸들이 마을에 들이닥치자 미리 이 사실을 연락받은 박 프란치스코는 피신을 해버렸다. 그러자 포졸들은 모든 신자 가정을 약탈하고서 온 마을에 불을 질러 버렸다. 그러고는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끌고 갔다. 이렇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전해들은 이웃 신자들은 건학과 여우목에서 약탈자들을 쫓기 위해 몽둥이를 들고 달려 왔으나 이미 약탈자들은 마을을 떠나고 보이지 않자 돌아가 버리고 다만 용감한 건학의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여우목의 이 시몬만이 약탈자들을 추격했다가 도리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래서 잡혀 갔던 이 마을의 부녀자들과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석방되고 대신두 사람은 예천 아문으로 잡혀 가서 문초를 받은 후 다시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곧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관장은 귀찮은 절차와 오랜 지연을 피하기 위하여 옥중에서 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 두 순교자는 치명하니 1865년 12월10일경(음)으로 전 하비에르는 49세요 이 시몬은 24세였다.

이렇게 하여 폐허가 된 이 마을은 그 후 다시 복구되었고, 병인박해가 끝난 뒤에도 얼마간은 신자들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구한말 1895년부터 나라 안에 의병 운동이 일어나서 이 마을에 사는 위당 박종하와 건학의 김용락이 의병 대장으로 활동하자 이곳은 건학과 함께 의병 활동의 본거지가 되었고 왜경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래서 박종하 대장과 마을 사람들은 모두 건학 교우촌 등지로 옮겨 가고 이 마을은 그 후 다시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다.
이곳은 현재 행정 구역상으로 제천시에 속해 원주교구에 속하나 여우목, 건학 교우촌들과 이웃해 있던 박해 시대 교우촌이라 이해를 돕기 위해 안동교구에 포함시켰다.
▒ 을미의병(乙未義兵)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분격한 유생(儒生)들이 근왕창의(勤王唱義)를 내걸고 친일 내각의 타도와 일본 세력의 구축을 목표로 일으킨 항일 의병이다. 전국적인 의병의 봉기에 놀란 조정은 선무사를 파견하는 한편 주력 부대를 지방으로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혼란의 틈을 근왕 세력인 이범진 등의 정동파(貞洞派)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함으로써 친로 내각(親露內閣)이 등장하였다. 새 내각은 단발령의 철폐와 의병의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냈으며, 이와 함께 각종 공세를 탕감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의병 봉기의 명분을 없애기에 노력하였다. 이후부터의병 활동은 사그러 들었다.
■ 부럭이 교우촌과 용하 9곡
부럭이 교우촌 터는 경북 문경시 문경읍 신평리 박마을에서 북쪽으로 대미산을 향해 가파른 산길을 2km 올라가서 부리기재에서 북쪽 용하계곡으로 약 2km 내려간다. 부리기재는 백두대간을 산행하는 사람들의 탈출로로 쓰이고 있다. 이정표에는 부리기재 해발 879.1m, 우측방향으로 대미산 정상 1.2Km(백두대간 등산로), 올라온 길인 박마을 2.0Km 표기하고 있다. 우측에서 약간 북측방면은 이정표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부럭이 교우촌 터를 지나 용하구곡이 있는 억수리로 내려서는 산길이다.

부리기재에서 용하수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사람의 출입이 적어 자연 상태의 식생을 잘 유지하고 있다. 약 30분 내려가면 심마니들이 만들어 놓은 비닐하우스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비닐하우스 집에는 온돌시설까지 마련되어 있고 불 땐 흔적도 찾을 수 있다. 이곳을 지나면서 바로 계곡물을 만날 수 있다. 이 계곡 주변에 집터들이 몇군데 나누어져 있는데 그 주변 모두가 부럭이 교우촌 터이다.
여기서 다시 얼마간 내려가면 월악산 동쪽 용하수 골짜기의 절경인 용하구곡을 만날 수 있다. 용하구곡은 하류에서 상류 쪽으로 그 번호가 매겨져 있으므로 부리기재에서 내려가면 부럭이 교우촌 터를 지나 제9곡을 맨 처음 만나게 된다. 월악산 동남쪽 기슭에 흐르는 용하9곡은 용하(用夏)라는 이름이 말하듯 여름을 위한 계곡이다. 용하9곡은 상류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다. 문경과 경계인 대미산에서 발원한 용하수는 강서대, 활래담, 수용담, 선미대, 청벽대를 이루고 만수봉에서 시작되는 계류는 수문동폭포, 병풍폭포, 수곡용담 등 즐비하다.
부럭이 교우촌 터를 조금 내려가면 용하구곡의 끝 부분인 아홉 번째 골짜기 활연대(豁然臺)가 있다. 활연대란 눈앞이 확 트이는 바위를 말한다. 그런데 현장에서 이 글자가 새겨진 바위를 찾을 수 없다. 이 9곡의 바로 아래 제8곡이 있다. 8곡의 이름은 활래담(活來潭)과 강서대(講書臺)이다. 활래담은 물이 활기차게 내려와 못이 된 곳을 의미하고 강서대는 글을 가르치는 바위를 말한다. 물길의 한쪽 널찍한 바위 위에 강서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아마 박세당 선생이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글을 읽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건너편 바위에 활래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로 물이 떨어지면서 맑은 못(潭)을 이루고 있다. 이 못이 바로 활래담이다. 그리고 활래담 위 강서대 건너편 바위 위에 무이구곡가 제8곡에 나오는 풍인욕개(風煙欲開)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다. "팔곡에 바람 불어 안개를 몰아내려 하고(八曲風煙勢欲開)"에서 인용했다.
의당 박세화 선생의 문인인 확재 이원우에 따르면 제7곡이 세심폭(洗心瀑)이고 제6곡이 우화굴(羽化窟)이다. 여기서 세심폭이란 마음을 씻는 폭포란 뜻이고, 우화굴이란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이 새로운 경지에 이르는 굴이란 뜻이다. 활래담에서 아래로 5분쯤 내려가면 물이 폭포처럼 떨어져 용추(龍湫)를 이룬 곳이 있다. 이곳이 세심폭이다. 그러나 용추 위에서 세심폭이라는 글자를 찾을 수 없었고, <용하구곡 실기>에 나오는 것처럼 봉우비천(峰雨飛泉)과 양병협영(兩屛夾映)이라는 글자도 찾을 수 없었다. 봉우비천이란 봉우리에 내리는 비와 흩날리는 샘을 의미한다. 여기서 흩날리는 샘이란 물이 떨어지면서 퍼지는 폭포를 말한다. 그리고 양병협영이란 양쪽에 좁은 협곡이 용추에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뜻이다. 제6곡 우화굴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세심폭에서 다시 15분쯤 아래로 내려가면 제5곡인 수룡담(睡龍潭)이 나온다. 수룡담은 용을 잠을 자는 곳으로 못이 아주 깨끗하고 편안하다. 이 못 위 바위 위에는 산고운심(山高雲深)이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다. 무이구곡가 '오곡산고운기심(五曲山高雲氣深)'에서 따왔다. 이를 번역하면 '5곡의 산은 높고 구름 기운은 깊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어딘가 있을 수룡담이라는 글자는 찾을 수 없었다.
■ 순교자
◆ 전 프란치스꼬 사베리오(1816∼1865)
전 프란치스꼬는 한국 천주교가 들어올 때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중인(中人) 집안의 구교우 가정으로 충청도 내포지방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은 오랫동안 회장직을 맡아 훌륭하게 교회에 봉사하였고 그도 부친의 뒤를 이어 회장이 되었다. 그는 충청도에서 살다가 칠곡 한티로 피난가서 살았으며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대구 부근의 달비골(달서구 상인동)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건학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며 아내와 세 자녀와 더불어 조용히 살았다. 그리고 알려진 지식과 온화한 성격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열성으로 모든 사람들의 애정과 존경을 받았던 분이었다.
◆ 이 요한 시몬(1841∼1865)
이 요한은 여우목 회장인 이윤일 회장의 아들로 3대째 구교우 집안이며 고향은 충청도 내포지방이다. 중인(中人) 집안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이며, 벌써 3명이 순교 월계관을 받은 순교자 가문의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부친도 명망이 높은 분으로 몇 달 후인 1867년 1월(양)에 순교하여, 103위 성인이 되었다. 이 요한은 신자촌을 두루 다니며 신자들의 재산을 약탈하던 예천의 황가라는 사람에 의해 포졸에게 체포되어 관아로 끌려갔다가 공주 감사에게 압송되어 배교할 것을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으므로 옥중에서 교살 당하여 순교하였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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