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숙시인, 2010년 대구시인협회상 수상자로 선정!
ㅡ2010년 대구시인협회상 수상시집:강문숙 시집 '따뜻한 종이컵'
따뜻한 종이컵
종이컵이 따뜻하다. 공원 한 귀퉁이에 허름한 중년처럼 앉아 있는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아 마시다가, 문득 객쩍은 생각을 해 본다.
짚둥우리 속에서 막 꺼낸 달걀은 암탉의 항문으로 나온 게 안 믿어질 만큼 희고 따뜻하다, 매끈하다.
혓바닥 아래 고인 침처럼 상긋하게 피어난 옥잠화의 흰 살결. 벌의 항문을 거쳐서 피어난 꽃들, 그 향기도 대저 항문의 그것이니
쿰쿰한 엄마를 열고 나온 신생의 애물단지들아. 희고 아름다운, 향기롭고 따뜻한 것들의 떠나온 문은 하나다. 종이컵을 내려놓고 슬쩍, 만져본다
ㅡ강문숙 시 <따뜻한 종이컵> 전문.
사물에 대한 생명의 근원적 모성애를 공원 한 귀퉁이 자판기의 '따뜻한 종이컵'에서 발견한다. 기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상상력을 극대화 시키면 '종이컵' 뿐만이 아니다.
'옥잠화'는 '벌의 항문을 거쳐서 피어'나며 '달걀'은 어떤가. '암탉의 항문으로 나온' 것이다. 이런 것들을 시인은 생명에 대한 외경심으로 '엄마를 열고 나온 / 신생의 애물단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희고 아름다운, 향기롭고 / 따뜻한' 이런 '것들의 떠나온 문은 하나다'라 했듯이 시인은 공원 한 귀퉁이에 허름한 중년처럼 / 앉아 있는 자판기'의 '커피 한 잔 뽑아 마시다가' 생각해 낸 편린들을 예사롭지 않게 풀어내고 있는데 그게 생명의 근원을 찾아가는 시인의 싱싱한 상상력인 것이다.
'시인은 어딜 가나 시인이다'라는 말이 강문숙시인을 통해서 성립된다 해도 과언은 아닌 줄로 안다. 단순하지 않는 상상력의 체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커피를 뽑아든 '따뜻한 종이컵'에서 우주의 질서와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시인은 기발하게 감지해 것이다.
ㅡ [대구문학](2010.11~12월호)<격월간평>서지월-'명징한 시편들의 잔치상'에서.
* 대한(大寒) 무렵 -
폭설이 끝나고, 몰아치는 바람 마당 귀퉁이부터 얼어붙는다.
감나무 꼭대기에 몇 알 남겨둔 까치밥 참새, 까치들이 수시로 와서 쪼아먹고 가지들, 텅 빈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오늘 무슨 날일까. 못 보던 재비둘기 한 쌍이 빈가지 위에 앉아 두런거리고 있다.
반가운 마음뿐, 그냥 바라만 보는데 미안하다, 미안하다, 빈가지는 자꾸 흔들리고 있다.
(입 공양하자고 따먹은 사람 따로 있는데) 저 흔들리는 것들 때문에 봄은, 오고야 말 거다.
* 그가 나를 펼친다 -
그를 기다리는 동안 먼 산이 젖는다 젖은 산은 가까이 다가오다가 일정한 거리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한번 더 씻은 얼굴로 바라본다.
젖은 산을 바라보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그에게로 내가 가는 일. 그를 기다리는 동안 비에 젖는 것은 모두 그의 얼굴로 흐르고. 나뭇잎처럼 가슴은 두근거린다.
비상등 깜박이며 숲을 헤치고 그가 내 시야 속으로 들어온다. 먼 산은 비 그친 얼굴을 접는다. 숲릉 바라보지 않아도 그는 내게로 와서 이미 젖는다.
오랜 시간을 머금은 나무들이 걸어와 내 속에서 뿌리를 뻗는다. 꽃 피는 내가 그에게 우산을 내밀자 그가 접혀있던 나를 활짝 펼친다
* 마당가의 저 나무 -
세상 모든 흔들리는 것들로부터 가을은 오네. 마당가의 저 나무 흔들리므로 아름답네.
제 몸 던지는 잎들이 저렇게 붉어지니 이제 지는 노을도 슬프지 않겠네.
- 그건 사랑이야. 꺼지지 않는 목숨이야 바람이 중얼중얼 경전을 외며 지나가네 흔들리자, 흔들리자
세차게 흔들릴수록 무성한 날이 오겠지 나무의 기쁨이 하늘을 덮네 오래된 저 나무 흔들리므로 더욱 아름답네
* 혼자 가는 길 -
내 마음 저 편에 너를 세워 두고 혼자 가는 길, 자꾸만 발이 저리다 잡목 숲 고요한 능선 아래 조그만 마을
거기 성급한 초저녁 별들 뛰어 내리다 마는지 어느 창백한 손길이 들창을 여닫는지, 아득히 창호지 구겨지는 소리, 그 끝을 따라 간다
둥근 문고리에 찍혀 있는 지문들 낡은 문설주에 문패자국 선연하다
아직 네게 닿지 못한 마음 누르며 혼자 가는 이 길 누가 어둠을 탁,탁,치며 걸어 오는지 내 마음의 둥근 문고리 잡아 당기는지
* 안개 -
1 초겨울 아침 안개가 풀리면서 길도 풀린다. 날마다 하늘은 미세한 그물을 깁고 안개는 사람들의 무딘 코끝에서 이끼처럼 자란다. 보이지 않는 [말]들이 안개 속을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길 위에서의 싸움도 부쩍 늘었다. 저마다 얼굴을 가린 채 목소리만 버섯처럼 붉게 자란다. 서로 안개 탓이라고 주장하지만 아무도 그들 탓에 안개가 낀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
2 돌들이 하얗게 타오른다. 타면서 가늘게 휘파람소리를 내기도 한다. 빨간 가방을 멘 아이가 안개 속을 지나간다. 잠시 후, 낯익은 여자가 죽은 새를 안고 헤엄쳐 나온다. 수없이 분열하는 하얀 불꽃 사이를 벗은 나무와 얼굴 없는 사람들과 돌아앉은 집들이 떠다닌다. 때론 기운 하늘마저도 허우적거린다.
3 바람아 너의 여린 살갗이 터져 흐르는 피다. 피의 묘한 향기다. 내 가슴 맨 안쪽을 깨무는, 뜨거운 너의 혓바닥이다. 보이지 않는 사슬 허망한 늪 속에 깊이 잠겨있는 칼날 같은 빛이다. 곧 어둠이 닥치리라. 몸 속에 숨긴 수많은 가시 예리한 끝으로, 뚝 뚝 피 흘리며 일어서라. 안개여 일어서라.
4 어머니의 그 편안한 자궁 속, 끼워야 할 단추도 없는 알몸으로 내가 누워 있다.
* 고분 속에 살다 -
여자가 조심스레 문을 연다. 순간 커다란 눈동자 같은 내부가 번뜩인다.
침입자를 경계하듯 소요하는 먼지들. 먼지들의 입을 막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엉거주춤 고분속으로 들어선다.
고여 있던 시간들이 출렁이다가 토기의 빗금문양을 타고 흘러내린다.
무명 머릿수건을 탁탁, 털며 쌀 안치러 가는 여자의 뒤를 따라간다.
아궁이에서 매캐한 연기가 번지고 누군가 기침을 해댄다, 그 소리 고분 밖의 생애까지도 목메게 할 것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죽음과 함께 밥먹고 숨쉬는 시간들 쭈그러드는 쌀자루가 안절부절 못했겠지만, 고분 속은 무풍지대 최후의 안식처였을까. 고분 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찬바람 불어 잎들이 떨어져 내린다.
철커덕, 누군가 고분의 입구를 막는다. 아직도 그속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나를 남겨둔 채, 서둘러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 콘크리트고분 속으로 가는 뒷모습들 불빛 속으로 사라진다
* 별이 되었으면 해 -
난 네게로 가서 별이 되었으면 해. 너무 화려한 불빛을 지나서 너무 근엄한 얼굴을 지나서 빛나는 어둠이 배경인 네 속에 반듯하게 박혔으면 해.
텅 빈 네 휘파람 소리 푸른 저녁을 감싸는 노래 그러나 가끔씩은 울고 싶은 네 마음이었으면 해.
그리운 네게로 가서 별이 되었으면 해. 자주 설움 타는 네 잠 속, 너무 눈부시게는 말고 너무 꽉 차게도 말고 네 죽을 때에야 가만히 눈감는 별이 되었으면 해.
* 자루 속에서 -
자루의 주둥이가 풀리면서 묵은 완두콩이 쏟아졌다. 쪼그라든 껍질, 낱알마다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채 견딜 수 없이 가벼워진 목숨.
아직도 구멍 속에 코를 박고 있는 바구미들.
수많은 낮밤을 완두콩과, 완두콩을 갉아먹는 벌레들로, 자루의 속은 얼마나 들썩거렸을까.
푸른 떡잎과 싱싱한 넝쿨손을 갉아먹히면서 완두콩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벌레를 껴안고 사방으로 굴러가는 완두콩 자루가 해탈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무한천공을 떠다니는 지구 덩어리 거대한 자루 속, 함께 들썩거리며 나도 쉬지 않고 세상을 갉아먹고 있는 중이다.
완두콩과 벌레와 자루가 서로 껴안고 구를 때 삶은 굴렁쇠처럼 반짝이고 있다
* 한 그루 회양목 -
1 그 나무 아래서 온밤을 보냈습니다 회양목 근처에는 비린 삶의 냄새 가득합니다 아침마다 은색 자루의 가위가 떨어뜨린 갖가지 비늘, 아버지의 삶이 둥그렇게 그늘을 만듭니다
종아리 파란 딸들, 하나 둘 떠나보내고 회양목 그늘 아래서 남몰래 눈물 흘렸었지요 한 잎새 반짝이며 흔들릴 때 마음속 파문은 천지를 흔드는 듯했지요 ―너희는 내가 피워낸 잎새였구나 내가 누군가의 잎새였을 적에 나를 흔들던 것은 태어나지도 않았던 너희들이었구나
2 아버지의 자랑은 꽃밭을 만드는 일 꽃밭에는 나비와 꿀벌들이 날아다녔습니다 한 꽃잎 닫힐 때마다 단단한 씨알을 받아 소중하게 봉투에 넣어두셨습니다
어떤 날은 아버지, 회양목 둥근 가지 아래로 가만가만 우리를 불러들이셨습니다 알맞은 자리를 골라 정성껏 심어주셨습니다 오래오래 그 자리에 피어 있길 바라지만 우리 몸은 어느새 너무 자라, 자꾸만 회양목 그늘 밖을 내다봅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은색 가위로 공들여 가지치기를 하시고, 나는 내 육손이 칠손이가 소리 없이 잘려나가는 걸 보았습니다
3 회양목을 보시는 아버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은색 가위질이, 둥그런 그늘의 시간이 깊고 고요해집니다
―이제 조바심 없이도 바라볼 수 있는 것 가는 세월이 무섭다고 투덜대도 받아주는 것 오냐, 오냐 네가 내 새끼다, 내 아버지다
유난히 바람소리 크던 날 무성한 잎새 들추어보니, 거미 가슴처럼 비어 있는 나무둥치 속, 괜찮다, 괜찮다, 아버지는 둥그렇게 웃으십니다 소리 없이 앓고 있는 회양목 밑동에 곁가지들 손잡고 하늘거리며 자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굽은 등처럼 꽃밭 한가운데 둥그렇게 엎드린 회양목 한 그루, 그 그늘 아래서의 일입니다
* 이슬꽃 피는 아침 -
이슬로 맺히는 인연의 말 뜨거운 가슴 속에 묻어 놓고
여윈 햇살의 마음 기도로 배를 채우며
빛살은 빛살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아프게 가는 세월의 눈빛에 인연의 흔적 곱게 실어 올리며
허공에 찍힌 무상한 사랑의 발자국 겨울나무의 수액으로 거르고 걸러
신음 소리 한 쪽 들리지 않은 노랫말 환생하는 꿈 하나 까치 소리 몰고 온다.
* 성(聖) 아침 -
오늘 아침, 한없이 작아지는 나는 두렵다. 어느 날 문득 하느님이 우주의 책장을 덮으실 때, 그리하여 무심코 책장을 다시 펼치시던 하느님?! - 읽다 만 책을 펼쳐 보니 책장 사이 작은 날벌레 한 마리 납작하게 바스라져 있었다.
하루를 아니, 일생을 살아보자고 불빛 있는 곳이면 어디든 날아들어 파닥이다가, 내가 책장을 덮을 때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나방. 일생이라고 말하는 그 하루도 다 못 채우고 그만 영원한 어둠 속에 갇히고 말았구나.
후우, 가벼운 입김에도 흔적 없이 사라진다. 사라진 것의 얼룩만이 희미하게 그의 生을 대변할 뿐,
한때는 살기 위해 입으로 무엇인가를 먹고 꾸불텅한 내장을 거치는 동안 삭혔을 것을, 천장이나 벽지에 배설까지 했던 생물체였다니... 아, 이 은빛 나는 가루들 더 큰 손이 내 몸에 닿는다. 따스하다.
* 물먹는 하마 -
어서, 하마를 치워야 할텐데 저 하마를 밖으로 끌어내야 할텐데
늦장마 끝나고 서늘한 바람 분다 커튼을 갈아끼우다 문득 떠올린 하마 사냥
장롱 속, 창문도 없는 독방에 켜켜로 쌓아놓은 이부자리, 베개들 햇살 대신 물먹는 하마 한마리 들여놓고 짐짓, 눈 감아버렸다
하루에 두어 번, 하마의 안부를 확인할 뿐 여름 늦장마 견디고 있었다
누군가의 속을 열어보면 저럴까 보이지 않게 젖어 있던 속내 눈물로 차올라 있구나 소리없이 일가를 이루던 곰팡이 지독한 슬픔의 감옥이었구나
제 몸 안에 늪을 가두고 물소리를 듣고 있던 하마 그래도.. 웃고 있구나
그래도 웃고 있구나. 그래도...
* 눈나라 통신 제2신 -
금호분기점을 막 지나갔습니다. 갑자기 환하게 밝아오는 시야, 안과 밖이 술렁입니다. 누가 등불을 켜놓았을까요? 어떤 이는 눈이 부신 듯 얼굴을 찡그려보기도 합니다. 하얀 세상 굽이치는 능선, 마을 쪽으로 가는 길이 선명하게 다가와 나를 당깁니다. 이제 보니 자꾸 멀어지는 건 나였습니다.
떠나온 곳이 결국 닿아야 할 곳임을 나중에야 알게 되겠지만 이 순간을 기점이라고 생각해도 억울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 눈! 하고 발음하는 순간 내 몸이 가볍게 들렸습니다. 쓸데없이 많이 달고 다니던 주머니 속이 가벼워지고, 내 어깨에 매달려서 밤낮 따라다니던 검은 가방과 저음으로만 소리내던 목소리들이 가벼워집니다.
약간의 미열과 두통은 무게를 버린 것들의 설레임 때문일 것입니다. 모두 흩날리는 눈발처럼 자유로워집니다. 길은 이미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땅 위에 내려앉아야 할 눈발들, 녹으면 형체도 없어진다지요. 마음속에 더 오래 쌓이는 게 눈이라지요. 그러므로 금호 분기점은 별 의미 없이 지나치기도 하지만 떠나 온 곳과 가야할 곳의 경계이기도 합니다.
* 동점역에서 -
-눈꽃열차
문득, 나를 반올림하고 싶어진다. 얼어붙은 입도 모자라 눈꽃 보러 떠난다 하니, 누군가 헛웃음 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시큰거리는 발목을 이고 떠나는 여행이란 겨울나무처럼 제 속으로 내는 길일 터.
긴 여행의 쉼표처럼 동점, 태백선의 행간 속에 숨어 있구나.
가끔, 가만히 엎드려 기다리다 마른 김 다발처럼 사라지는 화물차 서너 칸.
눈나라에서 추방당한 대역죄인처럼 뜨거운 팥죽에 코를 박는 사람들.
잿빛 새 한마리, 끝내 저 적막의 간이역을 통과하지 못하고 날개를 접는다. 여전히 동점이다
* 눈 나라통신 제3신 -
종일 달려와서 멈춘 곳, 알고 보니 내 떠나온 곳 아니겠습니까
이제 다 왔다는 것인지 자금부터 시작이라는 것인지 거슬러 올라가는 눈발, 공중에 떠 있는 숲, 경계선을 허물며 먼데서 들판이 하얀 쌀밥을 퍼 담고 있습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지만 나는 수만 번쩨 같은 강물에 몸을 던지는 삼천 둥녀 같은 눈송이들을 안다. 수억 년쩨 같은 언덕에서 똑 같은 꽃을 피우는 진달래를 안다.
나는 내가 나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였으며, 아들이며 손자일 것을 안다. 그러기에 어느 시인은 ‘삼백 년 세월은 이 산의 것을 흔들며 지나갔지만/기슭의 명아주 잎새 하나도 바꿔놓지 않았다’
(이기철 ‘취중문답’ 중)고 하지 않았는가. ‘종일 달려와 멈춘 곳’이 ‘내 떠나온 속’임을 알았다니 저 눈발의 고승처럼 밝구나. 누구든 평생을 달려서 도달하는 곳은 물리적인 지점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인즉, 저 눈발이 있던 그름밭과 내려앉은 시금치밭이 서로 다르지 않다.
‘거술러 올라가는 눈밭, 공중에 떠있는 숲’이여, 하얀 눈밭이 이승과 저승의 경계마저 지우는구나. 하얀 쌀밥이 이승과 저승을 다 먹여 살리는 구나. 설 명절 지나 쌀뒤주 비었어도 온 들판에 하얀 쌀밥이 펄펄.
반철환시인
* 그녀들 -
마뜨료쉬까, 할머니 거기 계셨군요 둥그런 통치마 마름 펼쳐놓고 반짇고리 꺼내어 바느질하다가 잠깐, 배아파 니 엄니를 낳았니라. 한 사흘 베틀 위에 앉을 일 면해서 편할 줄 알았는데, 한밤중에도 철커덕, 탁, 탁, 베틀소리 잠깨셨다지요.
삼십촉 알전구가 하품을 해대는 새벽녘 어렴풋한 잠결 머리맡에, 물레를 돌리시는 할머니와 처녀 엄마, 사각사각 목소리도 닮으신 당신들은 밤을 새우실 요량이시군요.
무명 흰 치마 입으시고 할머니, 광화문에 계시는군요. 아침이면 마이니찌신문에 전송되는 사진 속에서, 소리없는 울음 혼자 우시겠지요. 밤새워 돌리시던 물레로 짠 그 치마 아직도 입고 계시는군요. 오늘은 행진하는 촛불 속에서 소녀들이 울고 있네요.
학교에서 배운 대로 할머니를 열고 어머니를 꺼내니, 어쩌면 좋아요 그 속에 또 한다발의 할머니가 꾸역꾸역
- 마뜨료쉬까 : 몸통을 열면 겹겹이 같은 인형이 들어 있는 러시아 전통 목각인형.
* 청동우물 -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그의 아내와 지나간다. 댕기머리 아들이 천자문을 끼고 지나간다. 헛기침하며 교자 탄 나으리 지나가고 농사꾼 방물장수 유기전의 사내들이 떠들며 지나간다. 쪽진 머리의 그의 아낙들 젖통을 흔들며 지나간 뒤 소와 말, 돼지와 홰를 치던 닭들이, 쥐새끼들이 지나갔으리.
천체박물과 전시실 안, 앙부일구* 청동의 육중한 원을 따라 하염없이 감겼다가 풀리는 소리들이 있다. 웅웅거리며, 무수한 결을 따라 돌다가 전시실을 가득 채운다. 그 소리는 푸르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란 때로, 소리가 되어 떠돌기도 하는 것인지, 저 깊은 시간의 우물 속을 들여다보노라니 머리끝이 쭈뼛해진다. 사소한 기억까지도 담고 있는 청동우물. 손바닥을 대어보니, 사라진 것들이 속속 돌아와 울음 섞인 노래를 풀어놓는다. 자꾸 슬픔 쪽으로 기울어지며, 무중력의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나는 문득, 어디서 왔는지 한 점 서러운 꽃잎이 떨어지는 걸 본다. 비와 바람과 햇빛들이 일렁이는 심연에서, 이윽고 아득하고도 맑은 종소리 울려나온다. 어느 사원인들 저토록 깊을 수 있을까.
- 앙부일구 : 저잣거리에 두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볼 수 있게 한, 세종 때 만든 해시계.
* 천사표 그녀 -
피아노는 거대한 한 그릇 밥이었다. 높은음자리표처럼 큰오빠 수술비와 조카의 학비는 올라가고, 착하다는 말을 밥처럼 먹고살지만 늘 허기가 졌다.
사랑했던 첫 남자 파혼선언하고 돌아설 때도 뜨거운 밥 한 끼 먹여보내려고 부엌에서 종일 서성거렸다.
도마질하다가 손끝을 베었을 때, 핏물보다 눈물을 먼저 흘리기도 했다.
피아노 건반은 그녀가 건너뛰어야 할 세상의 징검다리였는지도 모른다.
천사표 그녀가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래요?
울부짖는 그녀에게 의사는, 갓 태어난 아기가 죽을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둘러댔다.
시집을 엮는다는 핑계로 거의 한 달이 넘어서야 병 문 갔다.
밋밋해진 가슴을 여밀 생각도 않고,
살림하랴 글쓰랴 얼마나 힘들겠노? 잔이 넘치도록 인삼차를 부어준다.
염치없이 블라우스를 밀고 나오는 불룩한 내 젖가슴이 왜 이렇게 민망한지.
그녀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데 창 너머로 날아가는 하얀 나비 날갯짓, 눈이 시리다
.
* 강문숙
풍기초등 57회, 풍기중21회 199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1993년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 <시·열림> 동인. 시집 『잠그는 것들의 방향은?』 『탁자 위의 사막』 『보고 싶다』(사진공동시집) 2009년 시집 <따뜻한 종이컵> 문학세계사
2010 년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그림 : 강장원
사진 : 시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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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선배님
저도 고맙습니다^^ 후배님~
시인이 되려면 어느만큼 마음의 세계를 넓혀 놓아야 하는지요..아무나 할 수 없는, 아무나 가지못하는 길이라서..요.
교회에서 조용히 앉으셔서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한없이 평화로운 모~습이 스크랩되어옵니다. 시인의 느낌을 시인보다 더
어머님이 더 강열히 전해져 오는것은..아마도 거룩하신 그 어머님의 자녀때문이 아닌가합니다. 노래도 잘 하시고, 아름다움이 충만한~~삶의 여유를..
흠뻑 느끼시며 행복한 길을 인도하소서.^^...*
아니, 이미 시인보다 더 넓은 마음의 폭을 가지신 분이신데요 뭐~^^; 내 어머니를 기억하시는 분이시니 전해드려야겠어요.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더니 수줍은 듯 웃으셨어요. 돌아가신 어머니 말씀도 잊지 않으시면서요... 건강하셔요~ 술랑이집에 오시면 꼭 연락해주시구요^^
와우 ~~ 축하합니다 ^^ ^&^ 가끔씩 선배님의 시집을 펼쳐 듭니다 . 그 고운 심성과 평온함과 따뜻함....가슴뭉클한 감동을 주는 시한수 읽고 하루를 시작하곤 하지요 ... 영광스러운 수상입니다 .
세영님~ 오랜만이죠? 이렇게 쌀쌀해질 때 따뜻한 커피처럼 가슴을 뎁혀줄 수 있는 시집이었음 좋겠어요. 축하해주셔서 고마워요^^
시보네 선배님~~ 늘 제게 몸둘 바를 모르게 하시는 분... 이렇게 아름다운 화면을 꾸며서 소개해주시다니...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정보력에 놀랐어요. 그렇게나 빨리 아시다니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고향사랑이 지극하신 분이신건 알지만 저 같이 미미한 후배에까지 챙기시다니...저는 열심히 글로 갚을 수밖에요...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 되시길 바랍니다.
영혼의 발아지점이 그러함인데 , 생명에 부여된 의미를 안고 얼마나 고뇌 하셨나요. 뭇 일어서려는 것 들을 위하여 물도주고 햇살도 주고 내면의 산고를 감당하면서까지 일으켜 세운 확연한 삶의 아우성도 아름다운 곡조로 진정한 가치를 알려줍니다. 친구! 오늘 아침도 밥 묵었니껴? 건강하셔야지요 ㅎ ㅎ 잘 읽었읍니다. 기립박수를 보냅니다 -합장-
고마워요, 친구~! 오랜 과정을 환히 알고 있을 것 같은 친구의 마음 깊이는 한 줄의 시보다 더 감동적이네요. 열심히 사는 우리들 모습이 수백, 수천편의 시를 안고 사는 거예요. 우리 모두 동일한 귀한 존재들이지요^^
오랫만에 만나도 어제 만나 헤여진거 같은 ..한결같은 마음을 주는 친구..지난 토요일에 만나보니 많은 대화는 못했어도 그냥...따뜻한 종이컵처럼 가까이 느껴지는 친구~~모처럼 친구의 시를 한달음에 읽고 오후시간을 보낸대이...늘 건강하그라.....
솔바람... 참 반가웠어. 덥썩 잡은 두 손이 그 모든 말을 다 아우르고 있었지...살이 좀 빠진 네 모습에서 그 옛날 말라깽이 영란이가 느껴졌는데... 영란아, 오후 한 때 시집을 들고 있는 네 모습이 가슴 따스했었다면 그것으로 난 큰 보람이야^^ 건강해~
축하드립니다. 언젠가 이 공간에서 건강때문에... 고생하셨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탐나는 상상력이 어디에서 부터 나오는지, 역시 詩人은 神과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건필을 기원합니다.(48회, 12회)
감사합니다^^ 선생님 근황은 저도 여기서 일별한 적이 있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이제 완전히 건강해졌구요, 그래서 더욱 삶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지낸답니다. 기원해주신대로 살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글쓰는 재주는 젬병인 저로서는 참 존경스럽습니다
선배님 축하드립니다.
시상식이 12월 23일에 있다고 들었는데 참석하고 싶네요^^
건강하시고 건필하세요
후배님은 곡을 쓰시니 그것으로 욕심 그만부리시죠? ㅎㅎ 나는 요즘 새삼 작곡가들의 위대함을 느끼고 있답니다. 전에는 베토벤음악에 감탄했다면, 요즘은 베토벤에 거의 빠져들고 있죠. 그 사람의 삶이 보이고 고통을 승화시키는 예술혼이 보인다는 말이예요... 축하해주셔서 고맙구요, 그냥 조용히 지날겁니다. 왜냐믄, 문학은 화려함이 아니라 고요함이니까요. 여기서 받는 축하만으로도 과분해요. 정말...
작사와 작곡... 두분은 서로 만난적도 없으시면서 이심전심 이셔요... 아름다운 문학과 음악작품이 이공간에서 더욱 빛납니다 ^^ ^&^
정말 그러네요~~^^ 한번도 본 적 없지만 늘 보는 듯이..ㅎ
제가 안 읽은 다른 시를 곱씹으며 읽는데에..어지간히 시간이 걸렸습니다. 많이도 올려 놓으신 시보네님 욕심이..더디게 했지요..
이렇게.. 철저한 시인으로 세상 만물을 읊을 수 있는 그 재능과, 그 고집이 부럽기만 합니다..
태어나서..이렇게 많은 한 사람의 시를
눈으로 먹고 가슴으로 음미한 적이 있었는가...
어쩌면 앞으로도 없을 듯.. 합니다.
그 말...희끗 날리는 눈발처럼 가슴에 와서 살풋 녹아내리네^^ 경진, 부탁하나 할까? 아마도 지하철 홍대역? 낙성대 역?이라던가 싶은데, 내 시 '별이 되었으면 해' 가 아크릴 판넬로 플랫폼에 서 있다네요, 혹시 지나는 길 있음 폰카로 찍어서 좀 보내줌 좋겠는데...미안~^^; 서울 가더라도 여유가 워낙 없이 후딱 다녀오니...
시인이 되어 계시는 줄 풍우회를 통하여 알았습니다. 제일교회에서 가르침 받던 옛생각이 떠 오릅니다. 건강하시길
고마워요^^ 제일교회...헌스...일단 조금은 알 것도 같은데...'헌'으로 시작되는 이름들이 몇 사람 있었지요...아마도 그땐 내가 성악가가 될 줄 알았을 거예요^^; 행복한 날들 보내세요~
소백산 들판의 잘 영근 나락 한 다발을 푹 쏟아 낸듯한,
풍성하고 절제된 글 솜씨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
선배님의 건필을 기대할께요... 건강하시구요
순화씨~~ 어찌 여기 답글 달 시간 있었어요? 대구서도 뉴스와 신문에서 난 거 봤는데...정말 대단해요. 나처럼 보통밥상 차리기에도 어설픈 사람은 그저 부러울 뿐~ 풍기가면 먹으러 가야지 하고 벼르고 있답니다^^ 따뜻한 녹차도 함께~ 건강하시고 더 발전 있길 진심으로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