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6일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너희 율법교사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렸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루가 11,47-54)
Woe to you, scholars of the law! You have taken away the key of knowledge. You yourselves did not enter
and you stopped those trying to enter.”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신자들에게 인사한 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푸신 은총을 강조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며 그들이 그들의 조상과 마찬가지로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 단언하신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까지도 영원한 생명의 길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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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일본에서 주로 작품 활동을 해 오며 현대 미술의 대가로 인정받는 이우환 화백은, 자신의 미술 세계의 바탕을 엿보게 하는 미학적이고 철학적인 비평으로도 유명합니다. 그가 일본 미술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며 주목받던 60년대 말에 쓴 글 가운데 현대 미술을 지배하는 주관주의와 관념주의에 대한 비판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하이데거의 기본 통찰을 받아들여 오늘날의 문명과 예술의 근본 문제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세계를 구상 실현을 위한 대상화의 소재로 규정하고 모든 것을 그 인식 대상으로 몰아세우는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은 근대의 특유한 의식 작용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세계로부터 떼어 내어 인간적 표상물로 새기고, 다시 세계 그 자체마저도 이미지화하기 때문이다. (중략) 이처럼 표상 작용에 의해 세계 전반을 ‘인간’의 소유 아래 두려는 점에서 허상 생산의 물량적이고 산업 주의적인 성격이 드러난다”(『만남을 찾아서』에서). 이에 따라 그는 세계를 인간의 관점으로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을 지향하는 것이 예술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지나 공기, 시간과 같이 존재하는 것과의 불가분의 관계에서 바로 그것이 나무이며, 돌이며, 인간인 것처럼, 오히려 의식 자체를 표상 작용에서 해방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세계는 만남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다. 또 세계는 대상 의식을 초월한 상호 매개의 열린 장소이자 안과 밖이 같이 있는 장소이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불행하다고 꾸짖으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사랑을 실천하기보다는 명예에 집착하였습니다. 이러한 행위의 뿌리에는 자신의 관점으로 계명을 ‘표상’할 뿐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지각’하지 못한 ‘인식의 오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1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은총의 세계’와 만나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선입관에 제한된 ‘세계상’에서 해방되어, 자신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다가오는 은총의 세계와 만나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길이라는 사실을, 한 예술가의 통찰과 함께 다시 한 번 성찰해 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김찬선신부-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나이를 가지고 농담을 합니다. 어린 사람과 옛날 얘기를 하다 대뜸 ‘그때 너는 어디에 있었니?’하고 묻고는 '그 때 너는 아버지 골수 속에 있었다.’고 농담을 하곤 하지요. 농담이지만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가 있기 전에 ‘나’라는 존재가 선재(先在)했음을 담고 있기에 저는 이런 농담을 할 때나 들을 때마다 마음 속 옷깃이 여며집니다.
나라는 존재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었으면 태어나지 못했을 존재요 각기 계셨더라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서 결혼 하지 않았다면 나라는 존재는 없었겠지요. 그러고 보니 나라는 존재는 대단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몇 십 억 남자와 몇 십 억 여자 중에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몇 백 억 경우의 수중 하나로 만나 태어난 존재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태어나기 위해서 또 각기 몇 백 억 경우의 수중의 하나로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만나신 것이니 그것까지 치면, 아니 그 위의 까마득한 조상까지 다 치면 나는 대단한 경우의 수 중의 하나로 태어난 귀한 존재입니다. 이런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우연한 존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우연히 태어난 존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뒤집어서 얘기하면 나라는 존재가 있기 위해서 나의 아버지는 있어야 했고 나의 어머니도 있어야 했으며 나의 조상 중의 어느 하나라도 없었다면 나는 태어나지 않았으니 그 많은 조상들이 나를 위해서 있어야만 했던 존재이고 그 많은 조상들이 나를 위해서 있는 대단한 존재입니다. 나는 내 1대 조상의 골수 안에 나는 이미 존재되어서, 다시 말해서 1대 조상서부터 모든 조상들 안에 선재(先在)하게 되어서 오늘의 나는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를 선택하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니 계시다면 나라는 존재는 대단한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나를 포함하여 우리 조상들까지 세상 창조 이전부터 그리스도 안에 선재(先在)하게 하시고 이 세상에 현재(現在)하게 하신 것입니다. 나는 없다가 불쑥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천지창조 이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되어진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안의 존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존재들과 일치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살아가는 그리스도 안의 존재입니다.
아들의 목숨까지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다스리고 이끌어 가시기 위하여 당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드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이 세상을 다스리면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기 위하여 기쁨과 즐거움의 동산인 에덴동산을 마련하시어 그곳에서 살도록 하셨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고, 서로 친교를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온갖 과일나무에서 맛있는 열매를 따먹으며 지냈다. 그들에게는 노동이 결코 고통이 아닌 행복이었고, 노동을 통해서도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며, 서로가 일치하며 살았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그처럼 행복하게 살도록 만드셨다. 행복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체로서 행복과 기쁨을 누리신다. 그러나 당신께서 직접 당신의 모습대로 만드신 사람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보시고 더 기뻐하신다. 사람의 기쁨과 행복은 하느님께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드리는 것이다. 마치 아버지가 어린 자식의 기쁨과 행복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사람의 기쁨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런데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느님인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느님이 온 세상과 사람의 주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온 세상과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또한 자신이 하느님이 되고자 한다. 그리하여 종인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 자신을 주인으로 내세워 자신의 뜻에 따름으로써 죄를 짓는다.
그 결과 사람은 하느님과 멀어지고, 사람 사이도 멀어지며, 세상과도 멀어졌다. 그 멀어짐은 곧 고통과 죽음이라는 또 다른 상처를 가져왔다. 또한 세상은 사람이 지은 죄로 물들게 되었다. 죄로 물든 세상 안에 태어난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창세 8,21)이라는 말씀처럼 누구나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람은 끊임없이 죄에 빠졌고 하느님의 사랑의 부르심을 외면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람에 대한 사랑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오히려 죄 지은 사람을 더욱 더 사랑하신다. 마치 잘못되고 어리석은 자식에게 더 마음을 쏟는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그처럼 더 사랑하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죄에 빠진 사람을 구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게 하심으로써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구출되었다.”(에페 1,7)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며 은총이다.
사도 바울로는 이와 같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깊이 체험했고 깨달았다. 그리하여 에페소 교회에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선포한다.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주신 그 크신 사랑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그 자비와 사랑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그 크신 은총과 사랑에 대하여, 때가 차면 당신의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모두가 하나가 되도록 하신 그 사랑의 계획에 대하여 에페소의 교우들에게 선포한다.
그렇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사랑이 크신 하느님이시다. 천지창조 때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을 미리 세우신 하느님이시다.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죄 속에 빠져 있을 때, 우리를 더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 아들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그 크신 사랑에 감사드리며 살아가자. 어떠한 죄악에 빠져있다 할지라도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 속담을 잘 알고 계신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미운 놈, 나쁜 놈이라는 사람들이 더 잘 사는 것 같거든요. 즉, 하느님께서 비록 밉고 나쁜 사람이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떡 하나 더 주다보니, 그들이 더 잘 사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그렇지 않겠지요. 그러나 고통 받고 소외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반대로 불의로 가득한 사람들이 오히려 돈 많고 높은 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대접받는 세상의 모습에서 괜히 주님 탓을 해보았습니다.
아무튼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중시되는 이 세상 안에서 사람들은 “돈만 번다면 다 괜찮아.”라는 말을 쉽게 내뱉습니다. 돈만 있으면 대접 받고 큰소리 뻥뻥 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돈이 곧 인품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그러다보니 모두가 범죄 앞에 펼쳐지게 됩니다.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려고 하다 보니 범죄가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내가 바로 그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사회과학자인 콜린 윌슨이 세계의 범죄자들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범죄자들의 대부분은 ‘나 뿐 놈’이라고 합니다. 즉,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나뿐인 생각과 행동을 끊임없이 일삼는 사람으로, 당하는 사람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나쁜 놈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나쁜 사람은 ‘나’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범죄가 늘어나는 나쁜 세상 안에서 나 역시 나쁜 사람의 길을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즉, ‘나’ 뿐인 생각을 갖고 나쁜 사람이 되려 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기적인 마음을 가진 나쁜 사람의 모습으로는 주님께서 제시하셨던 행복의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기적인 마음을 가졌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같은 나쁜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어제에 이어서 “불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시지요.
나쁜 사람들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돈을 많이 갖게 될 것이라는 꿈, 남을 누르고 내가 그 자리에 오르겠다는 꿈,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누리고 싶다는 꿈. 이러한 꿈이 희망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나뿐인 생각으로 불로소득을 꿈꾸는 것을 순리와 법칙을 어기는 욕망이라고 우리는 부릅니다.
희망이란, 바로 인간답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시하신 사랑을 실천하면서 참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 이 모습을 희망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희망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행복’을 약속해주십니다.
인생이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으로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으로 다가오는 법이다.(라 브뤼에르)
지식의 열쇠를 치우지 마라
- 유경희-
우리 주위에 보면 무신론자를 자처하며 죽으면 아무것도 없지 무슨 하늘나라가 있는가 하고 주장하는 이가 간혹 있다. 그들 중에는 상당한 지위와 학력을 가진 사람도 있어서 정말 무신론자인지 좀 더 확실한 신념을 갖기 위한 질문인지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이러한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종교관에 지표가 되기 위하여 세 사람의 예를 들어본다.
첫 번째는 그 유명한 바오로 성인이다. 그분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고 유다 사회의 부유한 집안의 자제이며 많은 교육을 받고 그리스도인을 잡아들이는 데 앞장선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을 잡으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 그것도 이미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의 심복이 되어 엄청난 선교를 하다 순교했다.
두 번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다. 그는 생전에 많은 예술적?·?과학적 업적을 남겼으나 교회 생활에서는 그렇게 모범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죽음이 가까워 오자 서둘러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하고 종부성사를 받았고 제자들에게 유산을 주며 자기를 위한 연미사를 잊지 말고 봉헌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세 번째는 파스칼?(1623?-?1662)?이다. 프랑스의 천재적인 과학자였으나 사랑하는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철학자이며 종교 사상가가 되었다. 그의 지론은 지옥이 없다고 생각하고 함부로 행동하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러나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고 열심히 살았는데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잃을 게 없다는 것이며 결론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라는 이야기이다. 우리보다 훨씬 현명한 분들의 지론이니 마음속에 새겨둘 만하지 않은가.
신학 공부의 위험성
-전삼용신부-
신학 공부를 하면 신앙이 깊어질 것 같지만 그와 반대로 신앙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동안 믿어왔던 것과는 다른 가르침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비롯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기적들, 또 연옥이나 지옥, 원죄 등의 교회 정통 가르침들을 부정하는 내용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 신학생들은 적지 않은 혼란에 빠졌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신부님은 외국에서 신학을 10년 이상 공부한 신학 박사였기 때문입니다.
그 신부님은 성경해석을 비롯해, 여러 신학자들의 근거를 들며 논리적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많은 신학생들이 혼란에 빠졌었습니다.
신학생 때 외국에 유학을 나오니 그렇게 가르쳤던 신부님이 이해가 갈 정도로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사고가 참 다양하였습니다.
저와 한참을 논쟁한 한 신학생은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과 가까워지기 위해 하느님께서 육체를 취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그 신학생도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논리라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인류 구원의 소명 때문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 때문에 운이 없어서 그렇게 고통을 당하신 것에 불과합니다.
저도 성경을 전공 하였지만 그 때 유명한 성경 신학자께서 시대적으로 예수님께서 더 조심하셨더라면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으실 수도 있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그리스도의 수난을 믿지 않으시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단순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운이 없어서 당할 필요가 없는 고통을 당하시고 돌아가셨다고 나름대로는 유명하다는 성경신학자께서 가르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그러면서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득이 될 수도 있지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고 정말 주의하지 않으면 공부를 하면서 나 자신도 그렇게 되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교구청에서 하루 종일 성경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천오백 명이 넘는 신자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니 신자들이 얼마나 말씀에 목말라하는지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 강의를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성경공부 할 필요 없다.’라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대부분이 여정 성경공부 봉사자들이었는데 그들에게 성경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니 처음에는 많은 분들이 의아해 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그 강의를 준비하신 수녀님도 저에게 처음에는 강사를 잘못 초빙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였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한 이유는 공부에 대한 위험성을 조금은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을 공부하고도 실천하지 못하느니 그저 단순히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것이 훨씬 훌륭한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분명 하느님을 아는 지식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삶으로 실천되지 않는 지식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같은 이슬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되지 않습니까? 들어가는 것 자체는 같을 지라도 나오는 것은 그 사람의 본질에 따라 다른 것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도 11명의 사도들에게는 유익했지만 유다에게는 독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믿고 가르치지 않고 세상과 자신의 생각대로 변형시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그들의 삶 자체가 비가톨릭적일 때가 많습니다. 믿지 못해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기 싫어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보다도 세상적인 것을 더 따르고 싶기 때문에 하느님의 진리를 왜곡하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진리를 듣고 그것을 더 복잡한 세속적인 규율로 변형시켰지만 예수님은 그 사랑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그것이었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많은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삶이 아닌 지식만 가르치기 때문에 그들까지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없었던 가장 큰 것이 ‘선의지’입니다. ‘좋은 뜻’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진리들을 자신들의 주관에 따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기 싫은 것은 왜곡해서라도 자신의 삶을 정당화 시키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새 번역에서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라고 번역을 했지만 그들이 다른 곳으로 치웠다기 보다는 원문 그대로 그들이 ‘가져가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지식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도 그 지식을 이용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 지식을 나누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지식의 열쇠를 받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을 일반 신자들은 배울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울 기회를 하느님께서 주셨지만 그것들을 자신들이 먼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천하지 못하면 신자들에게도 올바른 진리를 전달해 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알아감에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내가 공부하는 것이 나의 믿음을 증가시키는지, 나의 사랑을 증가시키는지, 그리고 나를 더 겸손하게 만드는 지 반드시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즉, 내가 하는 공부가 믿음과 사랑, 겸손을 키우지 못하는 것이라면 우선 공부하던 것을 접고 아는 것부터 실천하려는 의지를 다지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남들 앞에서 자랑할 만한 지식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삶을 주님의 뜻대로 변화시키려는 의도로 공부를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나를 변화시켜 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게 만들지 않는다면 어떤 것이든 해가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품위유지>
-양승국신부-
요즘 세상을 향해 눈길을 돌릴 때마다 기본적인 도리나 일반적인 상식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어 씁쓸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저럴 수가?" "정말 저래도 되는 건가?" 하는 탄식을 하루에도 여러 번씩 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기본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현상으로 여겨집니다.
다시 한번 기본을 회복하는 일, 상식을 지켜나가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노력해야할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나만은 기본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기본적으로 해야할 일들을 기꺼이 하는 것,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는 일, 직분이나 나이에 걸맞게 살아가는 일,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며,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을 낭독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신랄하게 질책하시는 대상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임무마저 등한시하면서 형제들에게 가차없는 비판의 화살을 날리는 제 모습을 보곤 합니다.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견디기 어려운 짐을 이웃에게 잔뜩 지워 놓고 자기는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다.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어디 가든 환대 받으며 특별대우를 당연시하는구나!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의 본업은 봉사요, 희생인데 언제나 군림하고 봉사 받는 데만 익숙해 있구나!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가 성목요일 만찬미사를 빼고 언제 한 번 신자들의 발을 씻어준 적이 있느냐?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겉으로는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 있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별빛처럼 영롱한 삶을 엮어 가는 참성직자, 참수도자들, 너무도 훌륭한 평신도들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소수의 의인(義人)들이 이 험난한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것입니다. 드높은 가을하늘처럼 맑고 향기로움으로 우리 모두의 가슴을 정화시켜주시는 의인들이 있기에 세상은 그나마 돌아가는 것입니다.
수도생활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함께 걸어가는 동료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어떤 형제의 삶은 자꾸만 흐트러지려는 제 삶을 늘 정화시켜 줍니다. 대쪽같이 곧은 사람, 청빈지도(淸貧之道)를 비롯한 수도서원을 목숨처럼 귀하게 여기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저같이 적당주의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원칙을 지키며 철저히 헌신하고 몸바치는 형제들, 옆에서 지켜보기가 답답해 보일 정도로 원칙에 충실한 형제들의 삶을 바라 볼 때마다 큰 부끄러움과 동시에 그 형제들이야말로 "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보루"임을 깨닫습니다.
언젠가 여행을 하던 중에, 아침식사와 점심식사를 같은 식당에서 한 적이 있었습니다. 먼저 아침식사 때 그 식당은 무척 붐볐고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쪽 테이블을 담당한 종업원이 워낙 친절하고 밝은 태도를 보여 주어서 즐거운 식사를 할 수가 있었지요. 어수선하고 오래 기다렸기 때문에 불쾌한 시간이 될 뻔했지만 상냥하고 따뜻한 종업원 때문에 즐거운 시간을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점심에도 그 식당을 다시 찾았습니다.
식당은 아침과 달리 손님이 거의 없어 한산했고, 음식도 아침에 비해서 훨씬 빨리 나왔습니다. 하지만 점심시간을 담당하는 종업원은 아침에 만났던 종업원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녀는 내가 마치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침입자라고 생각하는지, 시종일관 무성의하게 저를 대했습니다. 식당의 분위기는 쾌적했고 음식 또한 맛있었지만, 그 종업원으로 인한 불쾌한 기분을 안고서 그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큰 지를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조건이 안 좋은 상태에서도 한 사람의 역할에 따라서 최고의 상황으로 만들 수 있는 반면에, 조건이 최상인 상태에서 한 사람의 역할에 따라 오히려 최악의 상황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자신을 스스로 되돌아보며 반문하여 봅니다.
‘나는 과연 내 주변을 최고의 상황으로 만드는가?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고 있는가?’
다른 누군가를 만날 때 사람의 선택은 그 사이에 다리를 놓을 것인가 아니면 벽을 쌓을 것인가로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다리를 놓으면 그와의 연결점이 생겨서 그 자리를 최고의 상황을 만들 수가 있는 것이고, 반대로 벽을 쌓으면 그와의 단절이 되어 최악의 상황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향해 ‘불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이 예수님과 자기들 사이에 벽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마음 때문에 그들은 아주 두터운 벽을 자기와 예수님 사이에 쌓은 것이지요. 그 결과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고 또 받아들이지도 않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발 그 벽 좀 없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행할 수 없음을 강조하십니다.
혹시 우리도 예수님과 나 사이에 벽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랑하지 않는다면, 기쁘게 살지 않는다면, 그래서 행복하지 못하다면 지금 내 앞에는 아주 두꺼운 벽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벽을 부셔 버립시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교사들아!”
-양승국신부-
<흙 부스러기 같은 우리 본래의 모습>
언젠가 제가 화가 단단히 난적이 있었습니다. 과속이나 신호위반으로 날아오는 ‘딱지’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접촉사고도 잦았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공동체 형제들을 모아놓고 장시간에 걸쳐 일장훈시를 늘어놓았습니다.
“형제 여러분들, 이거 너무 한 것 아닙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돈 버는 사람들도 아니고. 부탁드립니다. 어디 가실 때는 미리미리 여유 있게 출발하셔서 규정 속도 좀 지켜주시고, 제발 좀 안전운전,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한 그 다음날 새벽이었습니다. ‘아차!’ 하고 일어난 순간, 수녀원 새벽미사 가기로 한 약속이 떠올랐습니다. 이미 시간이 빠듯했습니다. 부랴부랴 준비를 하고 벼락같이 시동을 걸었습니다.
수도원 정문을 나서면서 어쩔까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며 불법 좌회전을 하였는데, 갑자기 끼어든 제 차 때문에 직전해 오던 차의 운전자가 미처 브레이크를 밟지 못해 꽤 큰 접촉사고가 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충돌하는 순간 얼마나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위에서 청소하던 아이들이 다들 창문가에 붙어 서서 제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순간이었습니다.
한 며칠 계속된 복음 내용들이 당대 내놓으라는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강한 질타입니다.
예수님 질책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삶 안에 고착되었던 언행의 불일치였습니다. 지나친 완벽주의였습니다. 별것도 없으면서 지니고 있었던 우월감이었습니다. 까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선민의식이었습니다.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누구라도 당신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란 없습니다.”
사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라도 나약합니다. 부족합니다. 유한합니다. 하느님 앞에 모두 다 죄인입니다.
지금은 젊다고, 건강하다고, 잘 나간다고 떵떵거리며 살아가지만,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유한한 인간 존재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서서히 쇠락과정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머지않아 흙 부스러기 같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똑똑히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부족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안고가야 하는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삶의 어두운 측면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런 측면의 사유가 부족했습니다.
대체로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분들, 남들이 부러워 할 만큼 인생이 잘 풀리고 있는 분들 가운데서도 늘 얼굴이 어두운 사람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나, 알아보니 웃겼습니다. 100가지는 잘 풀리고 있는데, 1-2가지가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만족하며 사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완벽할 수 없습니다. 단 한 가지의 문제도 없이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부족한 가운데서도, 죄인 신분으로도, 실수를 연발하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완벽주의는 사람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모릅니다. 본인도 괴롭지만, 주변 사람들은 더 괴롭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마저도 힘들게 해드리게 됩니다.
많이 내려놓으시고, 많이 포기하시면서 편안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충고할 수 있는 용기 -김귀웅 신부-
한 바리사이 사람의 집에 초대 받아 가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불행하다며 독설을 쏟아붓습니다. 당신을 초대한 사람이면 적어도 당신에게 적대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 조금 참으시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남들에게 싫은 소리하기를 무척 어려워합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 하며 잘못을 보아도 그냥 넘어갑니다. 이해심이 많아서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구나 하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그때그때 잘못을 지적하고 충고해주는 것이 더 올바른 모습이겠다는 느낌을 자주 가지게 됩니다. 그 충고 때문에 상대가 잠시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와 저 모두에게 도움이 되며, 관계의 지속적 발전에도 유익할 테니까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하신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독한 앙심을 품을 줄 뻔히 알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엄하게 꾸짖습니다. 그것은 용기이고 더 큰 사랑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죽을 각오를 하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짜 부당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 당당히 나서서 아니라고 말할 용기를 가지고 싶습니다. 그것이 신자들을 향한 사목자의 기본 자세여야 할 것입니다.
장미의 이름 -김지영-
움베르토 에코는 유명한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입니다. 「장미의 이름」을 펴내 1980년대 세계문단에 돌풍을 일으킨 바 있지요.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중세 유럽의 한 수도원에서 살인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합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윌리엄 수사는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수도원에 파견됩니다. 윌리엄 수사는 우여곡절 끝에 사건을 해결하는 데 결과는 놀랍게도 수도원의 도서관장인 호르세 수사가 범인이라는 것입니다. 호르세 수사는 높은 학식과 인품으로 수도원 안팎에서 존경을 받는 분이었습니다. 호르세 수사가 왜 그랬을까요? 그는 수도자들이 금서를 보고 타락할까 우려해 금서의 책장에 독을 발라 놓았고, 이 때문에 금서에 손을 댄 수도자들이 잇달아 숨진 것이었습니다. 사건을 해결한 윌리엄 수사는 다른 사람도 아닌, 호르세 수사가 범인이라는 데 대해 이렇게 개탄 합니다. “교만한 영혼,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는 진리… 그것이 바로 악마다.” 그리고 조수인 아드소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아드소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사람들을 조심해라. 그들은 대체로 많은 사람들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만드는 법이다.” 이 소설은 ‘독선과 아집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내 생각만 옳다고 하는 독선과 이를 바로잡지 않는 아집, 이것은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더욱이 종교적 독선과 아집이라면 이는 영적 독재로서, 문제가 더 심각해집니다. 동서고금의 인류 역사가 수없이 증명해 왔지요. 다른 예를 들 것 없이 우리 천주교만 들여다봐도 많습니다. 16세기 초 스페인의 군대가 남미 아즈텍 왕국과 잉카제국을 정복할 때 이들은 마리아 상을 앞세우고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지요. 호르세 수사나 스페인 군대는, 양심의 가책 없이 저지르는 악행이 의도적인 악행보다 훨씬 무섭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호르세 수사는 성경에 등장하는 율법교사의 다른 모습입니다. 또는 어느 시대, 어디에나 존재하는 보편적 인간의 한 유형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는 독선과 아집이 사람들을 여러 형태의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내 마음속 호르세는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는 저와 친한 어떤 신부님께서 성지를 방문하셨습니다. 이유는 요즘 자전거 타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고 저와 함께 자전거를 타겠다는 것입니다. 저야 워낙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흔쾌히 허락을 했고 바로 어제 한 시간 이상 함께 탔습니다. 그런데 자전거를 함께 타자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제 자전거를 탐내는 것이었어요. 언젠가 자전거를 바꾸게 되면 제 자전거를 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빨리 바꾸라고 강압을 넣는 것입니다.
사실 저의 선배 신부님이십니다. 따라서 선배가 후배에게 무엇을 주면 모를까, 선배가 후배의 것을 뺐어가는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지만 이 신부님께서는 잘 뺐어 가십니다. 얄미울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신부님을 잘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 모습을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이 신부님께서는 자신을 위해서는 투자를 하지 않고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시는 분이거든요. 강의료를 받으면 그 모든 것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줍니다. 또한 자신의 활동비 중에서도 반 이상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어떤 강의를 해서 강의료로 60만원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요즘 자전거에 관심이 있다 보니 솔직히 좋은 자전거를 사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욕심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면서 곧바로 어려운 공동체에 다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활을 하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부분은 선, 후배 신부를 찾아서 해결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생활하시는 분을 어떻게 얄밉게 보겠습니까? 오히려 남을 위해서 열심히 사시는 그 모습에 감사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 자신을 많이 반성하게 됩니다. 남보다는 나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던 모습들. 그래서 항상 나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였던 못된 나의 모습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혼내고 계십니다. 이들을 혼내시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서로 좋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텐데, 왜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이들의 심사를 뒤틀게 만들어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드셨을까요?
바로 그들의 이기적인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남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던 모습들, 그래서 자신의 기준으로만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이기적인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화가 나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의 죽음을 결정지을 수도 있는 그들이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의 모습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깜짝 놀랍니다. 이런 내 모습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앞선 신부님의 모습에서 찾게 됩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그래서 모든 것에 자유로운 그 모습에서 말입니다.
남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려 보세요. 너무나 많습니다.
빠다킹신부
하느님 말씀을 가르치는 이들,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이 담겨 있는 말씀, 지식
-이성우-
불행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말씀을 가르치는 너희 율법 교사들아! 그 말씀의 열쇠,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있는 열쇠를 자신들이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며 그 열쇠를 오히려 자신의 지식의 많음을 자랑하는 도구로 삼는 너희 율법 교사들아! 가르침을 듣고나면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빛과 희망을 갖도록 하기는커녕 오히려 상대적인 빈곤감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멀리하게 만드는 너희 율법 교사들아! 그 당시 예수님이 가장 신랄하게 비난하시던 부류의 사람들은 바로 율법 교사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독차지하고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 앞에서 높은 자리에 앉으며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던 율법 교사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의 소유입니까? 그들이 진정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했습니까? 그들이 전달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사랑과 자비와 정의와 평화였습니까? 우리가 전하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 사람들을 치유하고 일으켜 세우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생명이 담겨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을 오히려 초라하고 작게 만들고 좌절시키는 학자들만을 위한 전문지식입니까? 우리가 전하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갈증을 해소해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목말라 찾아온 사람들을 실망시켜 오히려 하느님 말씀에 등을 돌리게 만드는 메마르고 삭막한 지식입니까? 하느님 앞에 솔직하게 자신을 바라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쉬운 사람, 편한 사람
-김정대 신부-
호주에서 5년을 살며 신학공부를 했다. 그동안 나는 편하고 쉬운 사람을 많이 만났다. 나도 나중에 편하고 쉬운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타인의 요구에 응답해야 할 사제가 까다로우면 어떤 사람이 쉽게 찾아오겠는가? 어느 학위나 마찬가지겠지만 나도 신학석사 학위를 받기 위한 종합시험을 보았다. 이 시험은 구두로 90분간 네 명의 시험관한테 질문을 받고 답하는 시험이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학생에게 시험관을 선택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곧 학생이 가장 피하고 싶은 시험관 대신 학생이 가장 선호하는 시험관 한 사람을 포함시켜 시험을 치르는 학생에게 심리적인 편안함을 보장해 주는 장치다. 학생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은 이런 제도뿐 아니라 교수님들에게서도 느낄 수 있다. 한 교수 신부님은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시험 며칠 전에 그분을 찾아가 그동안 내가 준비한 것을 이야기했고, 몇 가지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견을 들었다.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눈 후 그 신부님은 나에게 시험관과 좋은 토론을 한다고 생각하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결국 시험이란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학생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시험 전날 맥주를 몇 잔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면 더 많은 능력을 발휘한다. 쉽고 편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한다. 그러나 까다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어찌할 바 모르게 하고 상황을 늘 어렵게 만든다. 지식의 열쇠를 가진 사람, 곧 권위를 가진 사람이 편하게 대해준다면 많은 사람이 행복할 것이다.
- 김인환 신부 -
찬미 예수님!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함께 하는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가을도 깊어져서 제가 사는 양산은 나뭇잎들이 제법 빨갛게 물들어 있습니다. 그 와중에 성질 급한 놈들은 벌써 낙엽이 되어 버린 것들도 있더군요. 가을이 되어 떨어진 낙엽들을 보면서 지난 봄과 여름동안의 이 낙엽의 삶을 상상해봅니다. 자신이 달려 있는 나뭇가지에 큰새부터 작은 새까지 왔다 갔다 해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혀 나무에서 떨어질 위험도 맞았을 겁니다. 때로는 곤충들이 잎사귀를 밥 삼아 먹으려 할 때면 혹시 자신이 먹히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운이 좋은 건지 봄여름동안 무사히 살아남은 잎은 빨갛게 물이 들어서 자신의 최후를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 나뭇가지에 달려있는 작은 잎이지만 그의 삶도 우리 인간의 삶의 형태와 어딘지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살다보면 기쁜 일들도 있지만 슬프고 때로는 억울한 일도 당하는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눌러서 자신이 일어서려 하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나도 어떤 때는 거짓말을 섞어서 내가 옳음을 주장한 적이 있고, 억지를 써서라도 내 의견을 관철하고픈 마음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행동을 자주 하면 할수록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은 점점 희미해져 갑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께 호되게 혼나고 있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배운 율법의 지식과 신앙의 내용들이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기보다 형제, 자매들의 올가미가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배운 지식들이 사람들을 판단하고 벌주고 반성하게 하는 절대적 기준으로 자리 잡은 이상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는 직무는 그들에게 있어 의미가 흐려집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판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과 우리들도 인간의 모양새는 그리 다를 바가 없습니다. 율법학자들이 하느님의 지식의 열쇠에서 무디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그러 위험에 빠질 가능성은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모양새를 하고 있는 우리들이 모인 신앙의 터가 교회 공동체입니다. 신앙 공동체는 항상 평화롭고 선한 웃음만이 오가야 한다는 이상을 바라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의 참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만, 괴로운 맛도 경험하는 곳이 바로 이곳 교회 현재 자리입니다.
나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능력을 질투하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자리에 대해서 시샘하는 것이 인간인 우리들이 가지는 결점입니다. 때로는 서로를 모함하고, 심지어는 상스런 말까지도 오갑니다. 항상 그런 결점에 승리할 수는 없어서 종종 넘어집니다. 그러고도 자신이 잘못했다기 보단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처럼 오히려 그것을 깨닫게 만들어준 사람을 욕하고 이기려 듭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느님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고 회개의 길로 이끄시며 교회가 앞으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잃어 버렸던 지식의 열쇠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언제나 자신을 새롭게 하는 정신입니다. 흰옷은 한 점의 때만 묻어도 금방 표시가 나지만 검은 옷은 한 점의 때가 아니라 달걀만한 때가 묻어도 표시가 잘 나지 않습니다. 어느덧 내 모습이 옷에 묻은 때도 구별할지 모르는 상태에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 옷을 다시 깨끗이 빨아서 하얗게 만드는 것은 나의 몫입니다.
내가 한 행동과 말이 그리고 의도적이진 않았지만 내가 생각 없이 한 행동과 말 때문에 누군가 지금도 아파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용기있게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것이 지식의 열쇠입니다. 내가 지금 지키고 있는 자리가 정략적이고, 남들의 눈물을 뽑아서라도 유지하고 싶은 것이라면 과감히 그런 마음들을 이겨내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모습이 지식의 열쇠입니다.
지금 밖에 물들고 그리고 또 떨어져 있는 빨간 낙엽처럼 우리의 인생도 죽어가면서 이웃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부족함에 대해서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내가 상처주고, 잘못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그런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양승국신부-
<위선과 이중성의 극복을 위하여>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을 들을 때 마다 드는 느낌입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듭니다. 바로 나를 향한 말씀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수도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한 가지 삶의 단면입니다.
주어진 기도생활은 한 마디로 칼 그 자체입니다. 단 한 번도 빠지거나 지각하는 적이 없습니다. 윗선에서 내린 규정 역시 목숨처럼 중요시여깁니다. 미사나 기도 등 전례생활, 영적생활에 있어서 천사나 성인(聖人)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세계로 내려오면 다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 생긴 한 작은 현안이 그렇게까지 목숨걸만한 일도 아닌데 단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생기게 되는 작은 상처 앞에 얼마나 호들갑을 떠는지 모릅니다. 끝도 없이 징징댑니다. 표독스럽게 따져듭니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집요합니다.
기도생활에 대한 투자는 대단한데 그 결실이 조금도 없습니다. 영적생활에 대한 열망은 각별한데 그에 대한 열매는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저 역시 살아갈수록 어찌 그리도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중성의 극복, 위선의 극복이야말로 우리 신앙인들, 수도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이자 어려운 숙제인 듯 합니다.
저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규정들을 잔뜩 만들어놓고 형제들에게 ‘철저한 준수’를 요구했습니다. 솔직히 전혀 모범도 되지 못합니다. 영적 도우미로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구구절절 옳은 말만 늘어놓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얼마나 한심해할까 걱정이 앞섭니다. 이런 저를 향해 예수님께서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한 것, 가장 본질적인 것, 가장 핵심적인 것은 뒷전인 채 별 의미 없는 부차적인 것, 껍데기, 시시한 것, 지나가는 것에 혈안이 되고 목숨을 거는, 그래서 오락가락하는 백성들을 더욱 햇갈리게 만들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저 자신을 향한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 보다 가치 있는 것, 보다 본질적인 것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비가시성’입니다. 영혼, 마음, 사랑, 정, 우정, 신앙, 진리...결국 하느님께서 그 가장 끝에 자리 잡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진정 바라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보다 중요한 것은 내적인 것이리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일, 정성을 바치는 일, 우리의 영혼을 그분 향해 높이 들어 올리는 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조금이나마 되돌려드리는 일...
깨어 있는 자의 행복 -이기양 신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초대에 응하셔서 그들의 집에 식사를 가셨다는 것이 의외일 뿐만 아니라, 또 계속해서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퍼부으십니다.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11,43)고 그들의 본모습을 폭로하신 예수님은 오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본인들의 악행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피의 책임까지 져야한다고 거듭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루카11,50)
그 결과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루카11,53) 예수님에 관한 트집을 잡으려고 혈안이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자였던 그들의 교묘한 악행으로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길을 가실 수밖에 없었지요.
한편 이런 생각이 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시대에 오신다면 우리는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느님을 잘 안다는 사람들이 하느님이신 그 분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처형했는데 우리는 안 그럴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지금 이 시대에 오신다면 이천여 년 전의 유다인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을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에 오신 예수님은 아마도 여러 가지 이유로 살아남기가 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반체제 인사로 혹은 권위에 대한 도전자로, 또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모리배로 낙인이 찍혀서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내세운 죄목 위에 오히려 몇 개의 죄목이 더 얹혀진 채 사라져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셨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 학자들보다도 못한 것이 이 시대요, 우리들이며, 또 내 자신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생각은 율법 학자들을 향한 저주에 가까운 예수님의 꾸짖음이 그대로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져 간담이 서늘해지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을 호되게 야단치시고 그들의 조상들까지도 들춰내시면서 인류의 첫 희생자 아벨의 피에서 최근에 죽은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몰아붙이십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루카11,47-51)
율법 학자들의 조상인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진리를 설파했던 예언자들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월이 흘러 살해된 예언자들의 무덤을 장식하며 희생된 예언자들을 기리고 있는 그 후손인 율법 학자들은 구약시대의 예언자들보다도 훨씬 더 위대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도 고대하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까지도 죽이려 하고 있지요. 예언자들을 죽인 과거의 조상들보다도 훨씬 더 엄청난 잘못을 그들이 저지르고 있음을 오늘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하느님을 따르고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애썼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실 가장 비복음적인 삶을 사는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희생된 예언자들을 추모하며 무덤을 꾸미고 순례했지만 사실은 그 조상들보다도 더 못된 짓을 저질렀지요. 이는 열심한 사람들이 빠지지 말아야할 함정입니다. 하느님을 알아가고 지식이 축적될수록 삶 안에서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바리사이들과 별반 차이가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타성에 젖어 자신의 이익과 안일에 빠져들기가 쉽지요.
여러 단체 활동과 교육 등에 참여하며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매일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나?‘가 자리 잡게 됩니다. 여러 지식과 경험이 오히려 나를 키우고 나를 앞세우게 만들 뿐이지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지식과 경험을 앞세워 하느님과 사람을 판단하는 그릇된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결실의 계절인 가을이 되어도 익지 않은 쭉정이는 고개를 숙이지 않지요.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복음 말씀으로 나를 깨우고 하느님께서 내 삶을 끌어가시도록 온전히 내맡길 때 우리는 참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끊임없이 새로워질 수가 있을까요? 매일 미사 참례가 중요합니다. 그 날의 복음 말씀으로 끊임없이 나를 정화시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거리가 먼 생각이나 행위를 하고 있다면 매일 매일의 복음 말씀이 나를 정화시켜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찾게해줄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욕망과 이기심이 드러나게 되면 그 관계는 어려워지게 마련입니다. 끊임없이 정화하면서 함께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 생활도 열심히 하고 여러 가지 신심활동을 하지만 철옹성같이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공동체 활동도 하지 않지요.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신앙은 개인의 구원이 아닌 둘이나 셋이 함께 모여 가꾸어가는 공동체 신앙입니다. 신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사목 활동을 하다 보면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주위에 아랑곳 않고 혼자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하였고 신부, 수녀들을 많이 안다는 사람들이 오늘 예수님께 야단맞는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처럼 경직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정화되지 않으면 오늘 예수님이 맹공을 퍼붓는 이천여 년 전의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성당은 외관이 얼마나 멋있으며, 신자들이 얼마나 많고 적은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원로 신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에 좌우됩니다. 참 생명이 숨쉬는 좋은 성당은 하느님 안에서 복음적으로 사는 사람들에 의해 가꾸어지기 때문이지요.
은총이 많으면 유혹도 많습니다. 풍요롭고 건강한 것은 분명 은총이지만 그에 따른 유혹 또한 크게 작용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여러가지 세속적인 일에 눈길을 돌리기가 쉽습니다. 또 풍요로워지면 돈으로 할 수 있는 많은 유혹들이 다가오지요. 직위가 높아지면 주신 은총에 감사하기보다는 교만해지기가 쉬운 것이 우리들 정신의 한계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수록 이웃에 너그러워지고 감사하며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복음적인 삶을 실천하는 개인이 모여 좋은 공동체를 이루고, 그런 공동체가 모여 좋은 성당을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오늘처럼 노골적으로 신랄하게 화를 내시는 경우도 드물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들, 신앙의 경력과 이력들이 하느님께로 더 다가가고 겸손하게 나눌 줄 아는 행위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오늘 예수님의 저주에 가까운 책망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수철신부-
시사저널 10월24일자 종교 기사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2005년 인구주택 총 조사 결과,
천주교 인구는 무섭게 늘고 불교 인구는 약간 증가했으나
개신교 인구는 감소했으며 해마다
3천개가 넘는 소형교회가 문을 닫고 있다는 기사였습니다.
1995년부터 2005년 사이 10년 동안
2백37만 3천명의 종교 인구가 증가했는데,
그 중 천주교 인구는 2백19만5천명으로
새로 늘어난 종교 인구의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가 된 셈이라 합니다.
고무적인 현상이나 자만심에 빠짐은 금물입니다.
많은 이들이 점점 보수화, 권력화, 부유화 되어가는 천주교회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핵심적 역할이 성직자들의 역할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목자들인 사제들이 주님의 영광을 가려버려
냉담하거나 심지어는 교회를 떠나 개종하는 신자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어느 분의 고백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신부님의 강요로 직장을 그만둔 후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개신교에로의 개종도 심각히 고려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의 전통과 전례(미사)를 너무 사랑하기에
차마 떠날 수 없었습니다.
성직자 중심의 가톨릭교회라
저희 같은 평신도는 설 자리가 너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불행선언의 대상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같은 성직자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로 오늘의 성직자들에 대한 주님의 경고 말씀 같기도 합니다.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미며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박해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자비를 설파하면서도
무자비한 언행을 일삼는 사제들과 별로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역시 예언자들을 칭송하면서도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을 못 마땅해 하는
모순적인 모습의 사제들과도 별로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늘 새롭게 거듭나야 하는 성직자들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자각이 철저할 때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감사와 겸손입니다.
우리 모두가 본보기로 삼아야할
사도 바오로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철저한 깨달음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오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온통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총과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탈선은 ‘그리스도 안에서’를 잊을 때 생겨납니다.
위의 모두가 그대로 실현되는 이 은혜로운 성체성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총과 축복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
감사와 겸손의 원천입니다.
감사와 겸손의 삶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좋으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아멘.
무덤을 꾸미는 사람들
-강영구신부-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미고 있다. 그렇게 해서 너희는 너희 조상들의 소행에 대한 증인이 되었고 그 소행을 두둔하고 있다.
그대에게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리 4,12)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는 쌍날칼을 든 사람입니다. 위험한 인물이지요.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쌍날칼로 썩은 부분을 잘라 내거나 병든 부분을 도려내어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냅니다. 때로는 악성 종양 같은 무리를 완전히 두 동강 내기도 하고, 사람들의 음흉한 속셈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예언자들이 박해를 받거나 배척 받았습니다. 그들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쌍날칼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나 예언자들을 박해하거나 살해했던 사람들의 후손들이 예언자들의 말씀이 옳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의 무덤을 장식하고 묘비를 단장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마저 예언자들의 말씀을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예언자들이 원하는 것은 무덤을 단장하고 묘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선포한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크고 장엄한 성당과 예배당, 그리고 밤하늘을 장식하는 셀 수 없이 많은 붉은 네온 십자가가 그리스도인들의 자랑거리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자랑해야합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의 무덤 꾸미기나 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당신은 이 시대의 예언자입니다.(一明)
-김웅태 신부-
우리가 어제들은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하시며 경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 오늘 복음[루까 11:47-54]에서는 율법 학자들을 책하시는 말씀을 또한 듣게 된다. 그러면 율법 학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기에 그토록 예수께서 엄책하시는 것인가?
그들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십계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 전하고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을 비롯하여, 자기의 구미에 맞는 생활 속에서 사소한 법규들을 만들어 그것이 바로 신앙인 양 사람들에게 가르쳤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자면, 안식일에 금지된 일 중에 하나는 매듭을 매는 일이었는데, 어부나 낙타 상인들이 매듭을 매는 것이라든지, 밧줄로 매듭을 매는 것까지 율법으로 금지하고 있으면서, 여인이 자기 허리띠는 맬 수 있었다. 그래서 우물에서 물을 길을 때 밧줄을 물통에 맬 수 없으나, 여인의 허리띠는 맬수 있어서 허리띠를 가지고 물을 깃게하는 규정까지 만들어서 강요했던 것이다.
우리가 듣기에는 거의 믿기 어려운 말 같지만, 그런 규정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규정이라고 사람들은 믿었고, 그러한 사소한 율법까지도 따지고 지키는 것이 바로 종교의식이며, 그것을 따르느냐 안따르느냐가 죽고사는 문제 처럼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 학자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소명을 받고와서 백성들에게 율법 학자들이 가르치는 것과는 달리 "재산을 가진자와 못가진 자 사이에, 힘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에 사회 정의를 지키며, 사람들 서로간에 자비심과 사랑을 베풀며,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이렇게 가르침이 달랐기 때문에 율법학자들은 에언자들을 미워했고, 죽이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죽은 예언자들을 존경 했지만 살아 있어서 올바른 교훈을 하는 예언자들을 어떻게 하면 죽여 없앨까 하고 또 사실 율법에 어긋난다는 명목으로 죽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예언자가 흘린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하시며,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하고 경고 하시는 것이다.
이들이 그러했다면 오늘날의 우리들은 어떠한가? "힘 없고 무죄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비록 피를 흘리지 않는다 해도 힘없고 약한 이웃 사람들에게 무죄하고 착한 사람을 헐뜯거나, 괴롭히거나, 말이나 정신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게 괴볼히지는 않는지..."
예수님은 "너희는 그 모든것에 책임을 져야하며 ...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경고하심을 오늘 복음에서 들어야 한다.
함께 가야 할 주님의 길
-상지종신부-
어제는 도봉동 성당에서 견진 교리를 하였습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를 주제로 하여 제게 주어진 1시간 반동안 은총이 충만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애초 준비한 강의 내용과는 전혀 무관하게 진행되었지만, 적어도 제 느낌으로는 중고등학생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견진 교리를 받으시는 분들과 제가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던 열정 가득한 시간이었습니다.
강의를 하면서, 특별히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고통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서야 한다고, 일그러진 이 세상을 복음으로 비추어야 한다고, 주님께 부르심 받은 사람들로서 세상을 가슴에 안고 복음화시키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말을 할 때, 제 안에 솟구쳐오는 힘과 열정, 벅찬 감정들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견진 교리를 받으시는 분들도 저의 이러한 모습에 함께 하는 듯 했습니다. 그분들의 눈빛, 주님을 향한 간절한 눈빛, 신앙인으로서 세상을 품에 안으려는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강의 중간에 그리고 마치면서 "내 발을 씻으신 예수"라는 복음성가를 함께 불렀습니다. 미리 악보를 준비하지 못해서, 제가 먼저 부르고 나서 칠판에 가사를 적은 다음 함께 불렀습니다.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으셨다네
내 영원히 잊지 못 할 사람 그 모습 바라 내가 해야할 소명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먼훗날 당신 앞에 나설 때 나를 안아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보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참으로 열심히 성가를 불렀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노래를 처음 부르는 것이었기에, 그리고 악보도 없이 부르는 것이었기에, 중간 중간 틀리는 데도 많이 있었지만 세상의 어떤 노래보다 아름답고 간절한 노래였습니다.
앞으로 제가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제만큼은 적어도 주님의 사제로서 주님의 백성을 주님께로 이끄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가져 봅니다. 그리고 어제의 가슴 벅찬 시간을 되새기면서 앞으로 사제로 살아가면서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렸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율법 교사의 모습을 닮지 않기를 주님께 기도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나쁜 습관이 장애물이다.
-박상대신부-
루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불행선언을 다시 한번 정리하여보자. 우선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세 가지 불행선언의 이유는 ① 십일조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소홀히 한다(42절), ② 회당에서 높은 자리와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43절), ③ 사람들이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가는 무덤과 같다(44절)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학자들에게 내려지는 세 가지 불행선언의 이유는 ① 남에게는 어려운 짐을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도 대지 않는다(46절), ②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미면서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47-51절), ③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려 자신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막는다(52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율법교사들에 대한 나머지 두 가지 불행선언을 전해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여섯 가지 불행선언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할 수 있겠다. 율사들은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여 무수한 세칙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였고, 바리사이들은 즐거움으로 이를 마지막 하나까지 지키려는 충성심을 보였다. 바리사이들은 율사들이 만들어 낸 율법의 세목(細目)까지도 철저히 지킨다는 형식적인 순수함을 근거로 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들로부터 자신들의 우월성을 고취하여 특수층으로 자처한 사람들로서 예수님 당대 최고의 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이 아니었던가? 후대의 랍비들은 바리사이파를 이스라엘 율법과 전통의 진정한 옹호자로 찬양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탈무드"의 랍비들은 바리사이파의 정신적 후예들로 간주할 수 있다.
율사들은 사람들이 율법의 세목을 지키는 데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에 대한 사정은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들 관심 밖의 일이었다.(46절) 그들은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통탄의 마음으로 꾸미는 척 하지만 조상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아벨의 피(창세 4,8-10)부터 모든 예언자들이 흘린 피와 제단과 성소사이에서 피살된 즈가리야의 피(2역대 24,20-22)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47-51절) 율사들은 머지않아 예수님과 그 추종자들을 죽인 책임까지 져야할 것이다. 율사들의 최종적인 잘못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통로를 차단하는 데 있다.(52절) 여기서 새로운 지식이란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복음을 말한다. 율사들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듣고 예수께 믿음을 가질 수 없도록 방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 진정한 예언자요 하느님 지혜의 선생으로 등장하신다. 그분 스스로가 율법의 성취자이며,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복음이며 지식이다. 그분은 율법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든 율사들과는 달리 율법을 단순하고 쉽게 만드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 라고 하셨다. 율법학자들은 무엇 때문에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내려주신 율법을 두고 밤낮없이 연구하고 정진하였던가? 왜 그들은 율법을 공부하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참다운 정신과 정의와 사랑을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왜 그들은 율법의 참된 지혜가 그들 바로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그것은 이미 그들 몸에 베어들은 위선과 착취와 탐욕의 습관 때문이다. 이런 나쁜 습관들은 자신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누구에게나 큰 장애물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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