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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행 지: 한석산과 매봉
전면에 바위지대의 암릉길이 자리하면서 좌측 사면으로 우회길이 자리하지만 직진으로 올라서 바위지대
우측으로 들어서 소나무 옆 바위지대를 따라 올라서게 된다.
시원스럽게 열리기도 한다.
능선이 분기되는 1049m봉에 올라서게 되는데 좌직진의 합강교로 이어지는 능선도 흐릿하게나마 산길이 열리고 있다.
사실 한계령에서 가리봉 그리고 주걱봉 코스는 2003년 10월 11일 진행했었는데 수직절벽의 주걱봉을 20여분에
걸쳐 어렵게 올라가 그곳에 리본을 걸어두고 내려서 촛대봉을 지나 삼형제봉을 찍고 뒤돌아가 장수대로
하산했었던 기억이다.
도망치지 않고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삼각점이 설치된 한석산에 오르게 되는데 정상석에는 보병9사단 30연대가 이곳 한석산을 점령했다는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그 작태를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지 못함이 정말 아쉬울 뿐이다.
16:23 그늘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임도를 따라서 잠시 내려서면 좌측 능선상에 넓은 헬기장이 하나 자리하지만
사방이 막혀 조망되지 않아 다시 임도로 내려서 0.85m남짓 진행하면 임도가 꺾이는 넓은 지점에 도착하게 되는데
입구에 나무말뚝이 하나 세워져 있다.
그 우측 아래로는 조침령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 흰 구름이 올라타 소낙비를 부리는 듯 운해쇼를 연출하기도 한다.
감지되지 않아 발의 감각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17분 남짓 진행하다 좌측으로 틀어 잡목지대를 벗어나 내려서면
또 다른 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17:40 매봉을 뒤로하고 7분 남짓 진행하면 가파른 내리막의 바위지대가 자리하면서 좌측으로 멋진 조망이 열리면서
지불해야 된다는 부담감으로 남교리의 야영장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친구가 준비해온 삼계탕으로 쇄주를
벗 삼아 저녁을 해결하고서 편안하게 하루밤을 보내게 되는데 내일 칠절봉 산행을 끝내고 오전 11시 이전에는
진부령에 내려서야 되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할 것으로 판단돼 아침밥을 해놓고 잠자리에 들기로 한다.
친구는 일찍 들어가 단잠에 빠진 듯 홀로 밤하늘을 바라보며 꿈속에 빠져든다.
피아시골입구에 내려서니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넘어갈 준비를 서둘러 조금이라도 밝은 시간에 잠자리를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피아시골을 바쁘게 빠져나간다.
*.한석산에대한 참고자료
(곧바로 반격을 개시한 밴 플리트가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지금은 멋진 풍치와 계곡물로 레프팅의 명소가 된 강원 인제군 내린천 부근은 1951년 초반 내내
국군과 북한군이 공방을 주고받았던 격전지였다.
현리 계곡과 인제 사이의 고지대를 통제하는 한석산(1119고지)은 내린천에서 올려다보면 그 앞의 능선에 가려 바로 보이지 않지만
이 일대의 최고봉으로, 이곳을 장악하면 소양강과 인제를 모두 감제할 수 있는 요지였다.
[한석산과 매봉을 놓고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었는데 그때 포로가 된 북한군]
한석산 남쪽 주능선의 일부인 매봉(1066고지)은 한석산을 장악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중요 고지였다.
1951년 4월 25일 제3사단 22연대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받은 제9사단 30연대는 미8군의 미주리선 확보 작전의 일환으로
5월 7일 공격을 개시해 적의 4월 공세 시에 제3사단이 상실한 매봉과 한석산을 탈취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제30연대장 손희선 대령은 이 어려운 임무를 작전의 귀재인 김진동 중령의 제3대대에 맡겼다.
김진동 중령은 임무의 어려움을 절감했다. 공격 방법은 우선 남쪽에서 산을 올라 매봉으로의 접근로 상에 있는 910고지를
중간 목표로 설정해 점령한 후, 다음으로 이곳을 발판 삼아 매봉을 점령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석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856고지~650고지 능선은 또 하나의 가능한 접근로였지만, 910고지를 확보하지 못한 채 공격하면 측방이 노출돼 공격이 어려운 접근로였다.
5월 7일 공격의 선봉은 제11중대가 맡았다. 제11중대는 아침에 자욱하게 낀 안개를 이용해 910고지 하단의 868고지 부근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아침 안개가 걷힐 무렵 868고지에 도달한 제11중대와 이를 후속하던 제9·10중대는 적의 강렬한 저항에 부딪쳤다.
특히 수류탄 공격에 피해가 컸다.
대대장은 제11중대의 큰 손실을 감안해 이 중대를 예비로 돌리면서 제9·10중대를 초월 공격게 해 910고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군이 910고지를 장악한 이후 북한군은 매봉과 서측방의 850고지에서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역습을 가해 왔다.
매봉의 남사면 910고지에서 제3대대는 이 역습을 막아냈지만 5월 8일까지 공격작전은 지지부진했다.
김진동 중령은 몇 차례 정면 공격을 시도해 보았으나 성과는 없었다. 그는 야음을 이용해 제10중대를 856고지로 공격게 해
적을 기습하는 방법으로 전술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제10중대장 조규호 소위의 야음을 이용한 공격은 적을 놀라게 했다. 기습을 받은 북한군은 매봉 전방으로부터
병력을 빼내어 856고지 방어를 강화하며 완강하게 저항했다.
이 우회공격은 매봉 전방의 적 방어를 현저히 약화시켰다.
이 상황을 이용해 김진동 중령은 제9중대에게 공군 전폭기의 지원하에 매봉 바로 남쪽의 1010고지를 점령하도록 하고
제11중대를 후속시켰다.
이 두 중대의 공격은 성공해 5월 9일 13시쯤 제3대대는 3일간의 격전 끝에 매봉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매봉을 점령한 후 손희선 연대장은 5월 10일 제1대대와 제2대대를 추가로 투입해 주봉인 한석산을 공격해 17시에 이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매봉 공격으로 수많은 적을 살상·포로로 하고 노획물도 많았지만 아측의 희생자도 많았다.(적 사살 895명, 포로 42명,
다수의 소화기와 포 노획, 제3대대의 전사·부상자 390여 명)
연대장 손희선 대령은 매봉 점령 후 제3대대장 이하 장병들을 치하하며 훈장 상신을 약속하자 김진동 중령은
“저는 많은 부하를 희생시켰습니다.
그러니 훈장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1계급씩 특진하는 영예를 안겨 주십시오”라고 건의했다.
매봉 공격작전에서 김진동 중령은 전술상으로 두 가지가 뛰어났다. 그는 적절한 시점에 초월공격을 잘 활용했다.
전투에서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또 야간 우회공격으로 적의 허를 찔러 적의 방어 노력을 분산케 한 후 이 상황을 이용해
주공격을 배합해 목표를 점령했다.
그러나 뛰어난 자는 재능만이 아니라 인격도 훌륭한 것인가. 그는 자신의 영예보다 부하의 희생을 무겁게 생각하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작전의 귀재이자 군인의 도를 아는 전장의 신사였다.
<김광수 육군사관학교 전쟁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