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조 신부가 동학 농민 전쟁 때 청나라의 패잔병에게 처형된 곳
장깃대(長岐臺) 나루는 옛날 사형(死刑)을 집행하던 곳에 깃발이 꽂혀 있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곳은 공주대교가 생기기 전 옥룡동과 시목동을 연결하는 나루터였다. 이곳에서 1894년 7월 29일 프랑스 선교사 죠조(Jozeau, 趙得夏, 1866~1894, 모세) 신부가 피살되었다. 1893년 4월 22일 배재 성당의 베르모렐(Vermorel, 張若瑟, 1860~1937, 요셉) 신부의 후임으로 죠조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 이듬해에 일어난 동학 농민 전쟁으로 전라도 지방의 신자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배재 본당 역시 그 피해가 심각하였다. 이에 따라 전주의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1859~1915,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고산의 비에모(Vellemot, 禹一模,1869~1950, 바오로) 신부, 그리고 김제의 빼재[梨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죠조 신부의 신변이 위험하게 되었다.
결국 한 교우촌이 전멸되었고, 교우들은 깊은 산중으로 숨어 들어가는 등 상황이 위급해지자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에게 전보를 쳐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뮈텔 주교는 7월 24일 전라도 선교사들에게 “신부들은 피하거나 이리로 오라.”고 전갈을 보냈다.
7월 27일 아침, 죠조 신부는 마부만 데리고 상황을 보고하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서울로 향하였다. 28일 오후에는 공주 금강을 건너 40리 거리인 광정(廣程, 즉 正安)에 이르러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이튿날 몇 리도 못가서 죠조 신부는 때마침 성환 쪽에서 내려오던 청나라의 패잔병(1894년 청일 전쟁에서의 패잔병)들과 마주했다. 처음에 청군은 신부를 지나가게 내버려 두었으나 뒤따라오던 동학 농민군들이 선동하여 신부를 체포하도록 하였다.
이때가 바로 1894년 7월 29일 오후 5시경으로, 그날은 주일날이었다. 처형 장소는 금강 좌측 백사장인 장깃대 나루로, 공주의 공식 처형지 중 하나로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이어 동학 농민군의 사주로 신부의 마부도 사살되었다. 신부의 시체는 이틀 동안, 반은 강물에 잠긴 채 버려져 있었다. 그동안 교우들(강경희 마티아와 이해미 시몬)이 신부의 시체를 거두려 했으나. 만 이틀이 지난 31일 밤중에서야 간신히 시체를 찾아내 거적으로 덮어 그곳에서 머지않은 강가에 구멍을 파고 묻은 뒤 서울의 뮈텔 주교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 후 조정의 명으로 공주 감사는 죠조 신부의 시신을 찾아내 쌍수 산성(雙樹山城, 공주시의 공산성) 아래 묻도록 하였다. 이듬해인 1895년 뮈텔 주교는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1867~1920, 스테파노) 신부를 내려 보내 보두네 신부와 함께 죠조 신부의 시신을 서울로 이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4월 27일, 때마침 피정 때문에 서울에 모인 모든 사제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죠조 신부의 이장을 장엄하고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죠조 신부는 현재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 죠조(Jozeau, 趙得夏) 신부
죠조(1866~1894, 모세)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1889년 초에 한국에 도착하여 경상도 북부 지방을 맡아 전교 활동을 약 1년간 계속하다가, 1890년에 부산 지방의 교회 창립 사업을 맡았다. 신자라고는 한 명도 없는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여러 곳의 벽촌과 섬을 순회하면서 복음 전파에 전념한 결과, 3년 후에는 신자가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성과는 그의 그칠 줄 모르는 정력과 굳은 신념 때문이며, 교우들뿐만이 아니라 이교도들까지도 그를 존경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1893년 그는 부산에서 전라도로 전임되었고, 그가 머물게 된 배재 마을은 곧 모범적인 마을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관할 구역이 동학(東學) 일파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그는 용감하게 이들에 맞서 싸웠으나 정세가 점점 불리해졌으므로 구원을 청하고자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나 전주를 거쳐 공주에 다다랐을 무렵 그는 청나라군사에게 잡혀 총살을 당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1894년 7월 29일 29세의 젊은 나이였다.
◆ 동학 농민 운동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군에서 시작된 동학계(東學系) 농민 운동으로 갑오 농민 전쟁이라고도 한다. 동학은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풍수 사상과 유(儒), 불(佛), 선(仙)의 교리를 토대로 서학(西學 : 기독교) 에 대항하여 새로운 세계는 내세(來世)가 아니라 현세에 있음을 갈파하여, 당시 재야에 있던 양반 계급은 물론 학정과 가난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퍼져 나가 커다란 종교 세력을 이루게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혹세무민으로 최제우를 체포, 1864년 사형에 처하였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와 탐관오리의 횡포는 갈수록 가중되어 1894년 이에 대한 반발로 바로 동학장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 군수 조병갑의 처벌을 위해 관아를 점령하였다. 이후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으로 농민군은 해산하지만, 정부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농민군을 탄압하였다. 이에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이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내걸고 동학 농민군의 1차 봉기가 시작되었다.
황토현에서 큰 승리를 거둔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였으며, 여기서 위협을 느낀 조선 정부는 청에 도움을 요청하고, 갑신정변 때 맺은 톈진 조약으로 인해 일본군까지 조선으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반외세, 반봉건을 외친 동학 농민군은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 정부와 화친을 도모하여 전주 화약을 맺고,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하며 동학 농민군은 해산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고 동학 농민군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온 일본이 철군을 거부하고 경복궁을 점령하게 된다. 이에 분노한 동학 농민군은 다시 결집하여 한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에게 패하고 전봉준의 처형과 함께 동학 농민운동은 끝이 나게 된다.
우금치전투 [牛金峙戰鬪]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조선, 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이다. 동학농민운동 가운데 가장 큰 전투로 우금치를 주공격로로 삼아 공주를 협공하였으나 월등한 무기를 가진 조선, 일본 연합군에 대패하였다.
1894년 9월 재봉기 이후 동학 남접의 접주 전봉준은 일본군을 몰아내고 친일 정권에 항거하기 위하여 공주와 수원을 거쳐 서울을 공격하기로 정하고 북접과 연합전선을 이루었다. 전봉준은 먼저 4,0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공주로 올라오다가 그해 10월 논산에서 손병희(孫秉熙)의 북접군과 합류하였고 일시에 공주를 공격하기로 정하였다. 한편 신정희(申正熙), 이두황(李斗璜), 허진(許璡) 등이 이끄는 2,500여 명의 정부군은 200여 명의 일본군과 함께 농민군을 괴멸시키기 위하여 공주로 향하였다.
10월 23일 이인(利仁), 효포(孝浦)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이 벌어졌으나 농민군이 패배하여 후퇴하였다. 농민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11월 초 우금치를 주 공격로로, 곰티·곰내·하고개·주미산 쪽을 보조 공격로로 정하고 금강 건너 유구 쪽에 농민군을 배치하여 공주를 협공하기로 정하였다. 11월 8일 총공격을 시작하여 정부군을 우금치로 몰자 조선, 일본연합군은 뛰어난 화력을 가진 최신무기로 무장하고 좌, 우측에서 협공으로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공주의 남동쪽으로 후퇴하면서도 공주감영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결국 제2차 공주 접전에서도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대패하였다. 전봉준은 계속된 조선, 일본 연합군의 협공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농민군을 해산하였고 그해 12월 배반자의 밀고로 순창에서 체포되었다. 이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벌인 전투 가운데 최대 규모였으며 농민군이 크게 패배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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