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13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가 17,20-25)
The coming of the Kingdom of God cannot be observed, and no one will announce,
‘Look, here it is,’ or, ‘There it is.’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among you.”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협력자 필레몬에게서 도망한 종 오네시모스를 도로 돌려보내면서 그에 대한 부탁을 한다. 그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여 달라는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언제인지 묻는 바리사이들에게 그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으며, “너희 가운데 있다.”라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철학자의 대명사가 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어떤 책도 쓰지 않았지만, 오히려 삶에 대한 철학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의 제자 플라톤은 스승의 사상을 여러 권의 ‘대화편’에 담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소크라테스가 말년에 모함으로 법정에 섰고, 결국 독배를 받고 죽은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때 그가 보여 준 의연한 모습은 철학을 ‘죽는 연습’이라 한 자신의 말을 스스로 실천한 것이어서 후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크리톤』이라는 대화편에 보면, 소크라테스는 탈옥을 권유하는 부유한 친구 크리톤에게 왜 자신이 독배를 받아 마셔야 하는지를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일생을 통해 소중히 여기고 가르친 가치를 굳게 지키고 또한 사람들에게 참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것이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철학자의 사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대화에서 “가장 중히 여겨야 할 것은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잘 사는 것”이라는 너무나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그에게 잘 사는 것은 그저 목숨을 부지하거나 욕망과 이익을 충족시키는 삶이 아닙니다. 그가 ‘혼을 돌봄’이라고 부른 덕스럽고 정의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삶은 보이는 세상에만 매이는 삶이 아니라, 당장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중요한 것을 볼 줄 알고 선택하는 삶을 뜻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짤막한 말씀은 우리에게 참으로 큰 감명을 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육신의 눈으로만 보려 하고 손에 잡히는 이득으로 가늠하려는 이들에게는 그 나라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삶과 죽음으로 보여 주신 가치를 소중히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 또한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잘 사는 삶’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잘 사는 삶’은 하느님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나라는 이웃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일상 속에 깃든다는 것을 깨달아야겠습니다.
요즘 사람들 중에 ‘3무(無) 증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즉, 의욕도 없고 기력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분이 제게 와서 “요즘 의욕이 없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여행을 한 번 가보시죠? 새로운 장소에서 느끼지 못했던 의욕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권하자, 이분께서는 “저는 이미 많은 곳을 여행했어요. 그런데 어딜 가든 별 다른 것이 없더라고요. 더구나 요즘에는 기력도 없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혹시 하고 싶은 것이 있으세요?”
이에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하고 싶은 것도 없네요.”
하고 싶은 것이 없으니, 의욕도 또 기력도 없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생각해보면 할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하다보면 하고 싶은 것도 저절로 생기게 됩니다. 저는 요즘에 이것에 대한 강한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교육을 받고 있는데, 이제까지 주로 강의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저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생소한 분야이기 때문에 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왕 한 번 발을 담근 것, 최선을 다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매달리다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의욕도 생기고 또 기력도 넘쳐납니다. 그리고 이 분야를 통해서 하고 싶은 것도 참 많아졌습니다.
세상일에 쉬운 것은 전혀 없지요. 그렇다고 포기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당장 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들과 함께 하시면서 힘을 주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마음을 간직하십시오. 분명히 내가 가지고 있었던 ‘3무(無) 증상’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3유(有) 증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주님을 통해서 이미 온 즉, 사람들 가운데에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지요. 그 나라는 복음 전파를 통해서 사람들 사이에 들어오며, 믿음으로 우리 안에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가 바로 하느님 나라임을 깨닫고 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죽음의 순간에 후회하는 우리가 아닌, 믿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여 지금 우리들 사이에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느끼고 체험해야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미 온 하느님 나라,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따라서 내 안에 간직하고 있는 ‘3무(無) 증상’을 과감하게 버리고 대신 주님과 함께 더욱 더 힘차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상처받는 것을 멈추어라. 대신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을 기억하라. 상처는 깃털처럼 날리고 가슴에 사랑만 남겨라(김은주).
아름다운 여자(‘사랑밭 새벽편지’ 중에서)
아름다운 외모와 눈에 띄는 자신감! 육상선수이자 모델, 그리고 영화배우로까지 활동한 '에이미 멀린스'. 그녀는 남과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두 다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종아리뼈 없이 태어나서 다른 사람 도움 없이는 살지도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으로 1세 때 결국 두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하지만 삶 자체가 절망이라 불릴 수 있는 순간에도 그녀는 명랑함을 잃지 않고, 두 의족으로 걷고 또 뛰었습니다.
미국 대학 스포츠 연맹(NCAA)이 주최한 비장애인 육상대회에 출전하여, 1996년 애틀랜타 패럴림픽 육상 부문 세계 신기록을 세웠고, 지방시 수석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 패션쇼 모델로 활동하며, 피플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에이미는 의족만으로 해내기 어려운 일들을 이루어냈고, 그녀의 화려한 타이틀에 사람들은 궁금해 합니다.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에이미는 대답했습니다.
"역경이나 장애를 극복한다는 것은 저와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역경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 피하거나, 부정하거나 넘어서야 하는 장애물이 아닙니다. 역경이야말로 우리의 자아와 능력을 일깨우고 우리 자신에게 선물을 가져다주기 때문이죠. 제 생각에 진짜 장애는 억눌린 마음입니다. 억눌려서 아무런 희망도 없는 마음이에요."
사람들이 "장애를 극복했다."라고 말할 때, 에이미 멀린스는 "잠재력을 끌어냈다."라고 말합니다. 역경은 기회와 동반된다고 하지만 자신감과 신념이 없다면 그 기회를 잡을 수는 없겠죠?
지금의 내 마음가짐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 천국 간 자식에게 생일 케이크 택배
-이기정신부-
공간의 초월개념은 이해가 어려웠지만 이젠 인터넷 덕분에 좀 이해됩니다. 동시에 로그인해서 함께 내용을 보는 것도 아주 신기하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폭주로 서버가 마비됐다는 말에서 아직은 한계를 느끼긴 합니다.
어서 과학이 최고로 발달해서 초월 세계를 넘나들면 얼마나 좋을까요. 천국 간 자식에게 생일 케이크 택배도 자동차로 하늘까지 가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게 신앙의 초월개념으로 지금 이뤄진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 17,20~21)”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수철신부-
약 12년 만에 순례 차 미국 뉴튼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여기서 약 3개월 동안 지낼 예정입니다.
예전이나 변함없는, 시간도 비껴간듯한 똑같은 환경이 참 편안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수사님들의 소박하며 따뜻한 환대와,
예전 그대로의 수도원 건물과 자연환경이 그대로 위로와 치유였습니다.
세상 사막 한 복판에 오아시스 공동체였습니다.
소리 없이 움직이며 일하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수사님들이
오히려 사랑스럽고 수도자다워 보였습니다.
흡사 무공해(無公害) 나무들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구나!“
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고요하고 평화롭고 거룩한, 전혀 꾸밈이 없는 소박한 자연환경을 닮은 수사님들이었습니다.
자연의 침묵이 몸에 밴 듯 말들도 적었고 말소리도 작았습니다.
환경이 좋아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을 때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찾는 열정이 식으면, 잃으면 수도생활은 끝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무의미, 무의욕, 무기력, 무절제의 삶입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늘 푸르른 열정을 지녀야 내적으로 역동적 삶이요 진정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참 평범하고 별볼일 없는, 무미건조한 수도생활입니다.
길 잃으면 늪이요 길 찾아 가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함께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찾을 때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혼자라면 길 잃어 일상의 늪에 빠지기 십중팔구입니다.
하여 똑같은 공동체 내에서도 천국을 사는 이도 있고 일상의 늪에 빠져 지옥을 사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니 평생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에서 위태한 삶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늘 복음의 핵심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밖에 저기에 있는 것도 아니며 언젠가 올 나라도 아닙니다.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 우리 공동체 가운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지 못하면
다른 아무데서도 살지 못합니다.
이러저리 밖에서 찾아 나서다 길 잃어 버리면 그대로 일상의 늪에 빠집니다.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필레몬서에 나오는 바오로의 고백을 보면 일상의 늪에 빠지기 쉬운 절망적 상황이지만
사도의 내면은 자유롭기가 그대로 천국입니다.
옥중에서 얻은 아들 오네시모스를 필레몬에게 당부하는 내용이 감동적입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룬 모습입니다.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 보냅니다.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 받게 되었습니다.“
외적환경이 좋지 않더라도 이렇게 서로 신뢰와 사랑의 관계라면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찾아 지금 여기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 때 바로 거기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일상의 늪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야곱의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는 이!"(시편146,5ㄱ).
아멘.
-조재형신부-
언젠가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생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하였다고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인생은 기쁨과 슬픔의 쌍곡선, 인생은 선택의 결과, 인생은 미완성’ 깊은 고민 끝에 기차를 타고 여행을 가는데,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삶은 계란 있어요.’ 그래서 생각했다고 합니다. 인생은 계란 같은 것이구나!
첫째, 계란은 예외 없이 모두 둥글게 생겼습니다. 미국 계란이나, 아프리카 계란이나 아시아 계란이나, 유럽 계란이나 모두 둥글기 때문입니다. 네모나, 세모로 생긴 계란은 없기 마련입니다. 인생은 계란처럼 잘났다고 내세울 것도 없고, 부족하다고 아쉬워 할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모두들 그렇게 둥글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욕심 때문에, 미련 때문에, 분노와 미움 때문에 인생을 각 지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둘째, 계란으로 우리는 몸에 멍이 들었을 때 문지르곤 합니다. 그러면 붓기가 빠지고 멍이 없어지곤 합니다. 살면서 누군가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참 많은 상처를 주면서 살아갑니다. 마치 세상이 나의 것 인양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보듬어 주면 칼날 같은 침상에서도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처를 주고받으면 아무리 넓고 호화로운 침상에서도 쉽게 잠들 수 없기 마련입니다.
셋째, 계란은 노른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노른자가 좋다고 너무 노른자만 먹으면 콜레스트롤이 높아 질 수 있습니다. 계란은 그래서 다 먹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너무 노른자만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을 추구하고, 성공을 추구하고, 재물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노른자만 추구하는 사람들은 결국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어버리고, 소중한 친구를 잃어버리고,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곤 합니다.
넷째, 계란은 아무린 편해 보여도 결국 껍질을 깨야만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병아리가 됩니다. 껍질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새로운 생명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우리들에게 세상의 껍질을 깨고, 영원한 분에게로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회개의 망치로 헛된 것들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부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느님나라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은 계란 같은 것이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아는 자매님께서 성지에 가서 기도를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도 하고, 성가도 부르고, 묵상도 하고, 성체 조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성경책을 펼쳐서 읽었다고 합니다. 세 번을 펼쳐서 읽었는데 공교롭게도 펼쳐 읽은 성경 구절이 모두 하느님의 질책과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1박2일 피정을 겸해서 성지순례를 하였던 자매님은 걱정과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나는 잘못이 많아서 결국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자매님은 매일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고 계시니까 걱정하지 마셔요. 우리가 잠을 자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것도 부활입니다. 우리는 죽음처럼 깊은 밤을 지내고 새로운 날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
-반영억신부-
좋은 곳, 아름다운 곳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특별히 신앙인은 더없이 좋은 곳, 하느님의 나라에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1).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시록에는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모시는 곳에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또 사는 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내게는 이제 천당 영복이 시작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영복을 얻고자 한다면 하느님만을 열심히 공경하시오” 하고 말씀하시며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 ‘내 눈으로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리요?’하는 이는 마치 소경이 제 눈 어두운 것을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하늘을 보지 못하니 해와 달이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하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였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먼 훗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13,34).는 새 계명 안에 성장되고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번 일상 안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기쁨 속에 있고, 거기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슬픔 속에 있습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십시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눈물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시며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발걸음이었다면 우리도 어떤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의 끈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곳이 하느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예수님과 더불어 왔고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필립보 네리 성인은 말합니다.“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성 필립보 네리). 천상을 희망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한상우신부-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우리를 위하여 주신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들 마음안에 존재하는 육화의 나라입니다.
육화의 나라는 언제나 공동체에 있어야 할 사랑과 용서를 지향합니다.
사람들 마음을 밝히는 등불은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십자가의 등불입니다.
여전히 변함없는 하느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하느님 나라를 밝혀주십니다.
십자가는 기도의 시작이며 우리의 버림받은 아픈 마음까지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성장의 선물, 관계의 성숙이 되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오늘이 되게 하는 건 십자가를 짊어지는 우리들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마음으로 우리 안에 오시기에 모든 것 안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매순간 만나게 됩니다.
십자가의 마음은 끌어안음의 마음이기에 자신과 이웃의 마음을 모른 체 하고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서로를 감싸주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마음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일수록 더욱 따뜻해지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마음에 마음을 덧보태면 더욱 충만해지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따뜻한 마음
-양승국신부-
사도 바오로가 쓴 여러 서한 가운데 가장 개인적인 편지는 필레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레몬서 안에서 눈에 확 띄는 대목이 한 구절 있는데, 그것은 바로 노예였던 오네시모스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오네스모스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옥중에서 얻은 영적 아들이자 필레몬의 소유였던 노예였습니다. 당시 로마법상으로 탈주한 노예는 반드시 원주인에게로 되돌려 보내야했습니다.
탈주한 노예 오네시모스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그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킵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신자가 된 오네시모스를 바오로 사도는 로마법에 따라 주인인 필레몬에게로 되돌려
보내며 한 가지 간곡한 당부를 합니다.
오네시모스를 다시 받아들이는데 더 이상 노예로서의 아니라 형제이자 동지, 벗으로 받아주라는 부탁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한 부탁이 얼마나 간곡한지는 다음의 표현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그가 그대에게 손실을 입혔거나 빚을 진 것이 있거든 내 앞으로 계산하십시오. 나 바오로가 이 말을 직접 씁니다. 내가 갚겠습니다.”(필레몬 1장 17~19절)
사실 로마 시민권자였던 바오로 사도의 이런 발언은 당시 굉장히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탈주 노예에게는 가차 없는 체벌이 가해졌습니다. 대체로 노예를 놓친 주인은 크게 분노하며 잡혀온 노예를 인정사정없이 다뤘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그가 세례를 받았으니 제발 좀 잘 봐달라고 신신당부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 기강이나 질서를 교란시키는 행위로 간주될 행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이토록 간절한 이유는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는 더 이상 주인이나 노예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더 이상 귀족이나 천민의 구분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앙이 좋은 것이 주님 안에 모든 구성원들이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 모든 신자들은 빈부나 지위 여하에 상관없이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생활은 인간 사회 안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과 장벽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오로 사도는 필레몬에게 오네시모스를 동지요 벗으로 받아들이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필레몬서는 그가 쓴 여러 사목서한 가운데 아주 특별하고 의미 있는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분열시킨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합쳐짐을 강조합니다. 탈주한 노예 오네시모스에게 선처를 당부하는 바오로 사도의 아버지다운 마음이 필레몬서 안에 잘 담겨져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자비와 기쁨, 재치가 필레몬서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곤경에 처한 한 약자를 어떻게 해서든 배려하고 지지하려는 바오로 사도의 사랑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
필레몬에게 편지를 썼던 당시 바오로 사도의 처지를 생각해봅니다. 놀라운 것이 그 역시 깊은 감옥에 갇혀 있었고 발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오네시모스보다 훨씬 더 못한 처지에 놓여있었습니다. 또한 스스로의 표현처럼 이제는 여기저기 쑤시고 아픈 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처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오네시모스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 척박하고 피폐한 세상에 정말 필요한 것이 바로 바오로 사도가 지녔던 그 따뜻한 마음입니다. 자신의 상태가 어떻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자신의 코가 석자지만 이웃을 먼저 생각합니다.
< 강요된 선행은 선행이 아니다 >
-전삼용신부-
선(善)을 위해서는 강요를 해도 정당한 것일까요? 예를 들면 지금 우리나라는 군대제도가 있습니다. 만약 강제로 입대시키지 않는다면 거의 누구도 스스로는 군대에 지원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군대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억지로 징집하여 살게 하는 것이 참으로 좋은 제도일까요?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외국에 살다가도 자진해서 군에 지원하여 복무기간을 채운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무엇이든 강요되어져서 이루어지는 것들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희 집에 어렸을 때 개를 키웠습니다. 어떤 때는 줄에 매어놓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줄을 풀어놓습니다. 시골이어서 개들은 마음껏 뛰어다닙니다. 학교 갔다 돌아올 때쯤 개들은 멀리까지 나와서 반겨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개가 묶여있는 것보다는 풀려있을 때 더욱 사랑스러웠습니다.
어느 날 도둑고양이가 먹을 것이 없었는지 집으로 찾아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주며 친해지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고양이가 도망치지 않게 되어 그를 붙잡아 목에 줄을 매어놓았습니다. 도둑고양이다 보니 그것을 참지 못했습니다. 마구 소리 지르고 줄을 목에 감고 빙글빙글 돌기도 하였습니다. 저러다 죽을 것 같아서 줄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나가서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개와는 조금 달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서 그 고양이가 돌아왔습니다. 새끼 고양이들을 데리고 돌아온 것입니다. 아마도 발정기여서 그렇게 나가려고 발버둥 쳤던 것 같습니다. 새끼들을 이끌고 돌아온 것을 보니 그래도 어느 정도는 우리 집을 자신의 집이라 느꼈던 것 같습니다. 뛰쳐나갈 때는 약간 밉기도 했지만 돌아오니 반가웠습니다. 만약 고양이를 풀어주지 않고 끝까지 강제로 길들이려 했다면 이런 경험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세워두셔서 인간이 죄를 지을 빌미를 만들어 두셨고 또한 유혹자를 두셔서 죄를 지을 수 있는 유혹을 받도록 내버려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만약 그런 유혹이 없었다면 당신께 대한 순종이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선택권이 없어서 죄를 짓지 않은 것인데 무슨 칭찬 받을 것이 있겠습니까? 죄를 지을 수도 있었는데도 안 지었다면야 칭찬을 받기에 합당하기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가 비록 하느님과 완전히 멀어질 수 있는 빌미가 되기도 하겠지만 그 자유를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은 하느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짐승을 풀어놓으면 도망갈 수 있다는 위험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도망갈 수도 있었는데도 돌아오는 것을 볼 때는 강제로 옆에 둘 때보다 훨씬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로 지옥에 간다고 해도 그것을 바라보면서도 자유를 건드리시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관계가 되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상대에게 배려해야 하는 것이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필레몬서입니다. 성경 중에 제일 짧은 성경입니다. 필레몬이라는 사람은 골로사이에서 바오로를 만난 덕으로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또 부자여서 골로사이 교회를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의 노예 오네시모가 필레몬에게 금전적 손해를 입히고 도망을 쳤습니다. 오네시모는 아마도 이때 바오로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바오로를 만나서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됩니다. 바오로는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오네시모를 자신을 위해 일하도록 하고 싶지만 필레몬의 노예이기에 그를 다시 돌려보내기로 작정하고 이 편지와 함께 필레몬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주인에게 피해를 입히고 도망친 노예입니다. 그런데 다시 필레몬에게 돌아가고 싶었을까요? 아마 도중에 도망을 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새롭게 얻은 자유를 하느님의 뜻을 위하여 희생하고 다시 주인에게 돌아갔을 것입니다.
필레몬은 오네시모에게 큰 벌을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필레몬에게 오네시모를 형제처럼 대하라고 말합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종도 주인도 없기 때문입니다. 참 주인은 주님밖에는 없습니다. 아마 필레몬이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바오로의 말을 따라야 했을 것입니다.
바오로는 어쩔 수 없이 필레몬과 오네시모의 자유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그 이유를 바오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이유는 억지로 당신을 섬기라는 뜻이 아니라 죄가 옆에 있더라도 자의로 선을 선택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바오로와 같이 해야 합니다. 자유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지 무엇이든 강요하면 그 사람이 하늘에 쌓을 선행의 기회를 빼앗게 되는 것입니다. 죄도 자신의 자유로 짓는 것이고, 선행도 자유가 있어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부부사이에서도, 자녀들에게도, 직장에서도, 성당에서도 누구의 자유도 선이라는 빌미로 빼앗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재료
-인영균신부-
오늘 아침기도 시편을 바치는 도중 갑자기 내가 있는 곳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는 형제들 사이에 있는 내 자신을 본 것이지요. 늘 하듯이 시편을 마치고 영광송을 바치기 위해 모두 일어났을 때 이 사실을 더 강하게 느꼈습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떠나 마치 공중에서 공동체 전체를 내려보는 듯 보게 되었습니다. 공동체 전체에서 뿜어나오는 어떤 장엄한 기운을 잠깐이지만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탈혼은 절대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스쳐지나가듯 느꼈다는 것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모인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여 있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폐기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불완전하고 나약하고 모난 인간들이 모여 있더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으면 인간적 모순을 넘어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마치 단단한 콘크리트가 연약한 모래와 자갈로 되어있는 것처럼 주님은 작은 우리를 통해 강한 당신 나라를 확장하십니다.
♣ 지금 여기서 찾는 하느님 나라 ♣
-기경호신부-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도래하느냐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율법교사들과 묵시문학가들은 그때를 짐작할 수 있는 표징들을 찾으려
하였다. 그런데 자신들이 바라는 메시아의 나라는 오지 않고 다른 민족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기다리다 못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17,20)고 여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으며,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신다(17,20-21).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은 ‘너희의 손이
미치는 곳에 있다’는 뜻으로 시간적으로 이미 와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치유기적(10,9)과 구마기적(11,20)을 통해 이미 그 위력이 드러났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려면 예수님을 지금 삶의 중심이요 궁극적 이유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하다(12,54-56).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음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의
징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을 보기 전에 가짜 그리스도,
반(反) 그리스도가 “저기에 계시다. 여기에 계시다”(17,23) 하며 그들을 현혹시킬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시간과 공간에 국한되지도 않고, 묵시문학적으로 표현되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지도 않으며, 번개가 번쩍 비추듯 어디에나 임하실 것이기에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말아야 한다.”(17,23-24)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지만, 우리는 자주 망각하며,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의 세계나 현상적인 것들에 눈을 팔며 살아갈 때가 많다. 행복은 간절히 바라면서도
이미 나의 손이 미치는 곳에 와 계시고, 내 안에 생생하게 살아계시며, 나를 사랑하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시는 그분에게로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 원하는
것을 따라다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는가? 그러는 사이 영혼이 병들고 가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는가? 또 마음의 평화가 깨질 때, 온갖 어려움을 겪을 때 말씀을 듣고 이미 오시어
함께 계시는 그분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는가? 어려움을 헤쳐 나갈 때도 하느님께
지혜를 구하기보다는 현세의 경험이나 지식을 앞세우고 다른 이들의 말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구원을 바라고 행복을 원하면서도, 자신의 현세적 욕구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채워주시지 않는 하느님과 전혀 관계없이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까이 계시니 사라져버릴 헛되고 헛된 것들에서 이제는
눈길을 거두어야 할 때이다. 가을 낙엽을 보라! 나무줄기에 붙어서 그저 바람결에 자신을
맡기면서도 한껏 아름다움과 생명을 보여주다가 또 다른 생명의 봄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고
떠나지 않는가. 우리도 예수님처럼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하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이나 세상이
바라는 것들로부터 버림당하고 나서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17,25 참조).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만나 행복에 이르는 길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모든 지혜의 원천이신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 밖에는 없다! 이제 헛것을 좇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다
주셨고 지금도 주시는 주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과 용맹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모든 기운과 온갖 노력과 온갖 정열과 온갖 애와 온갖 욕망과 뜻을
다하여, 우리 모두가 사랑하도록 하자.”(비인준칙 23,8) 행복을 위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