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른 숨결의 사랑 노래
- 윤택수(1961~2002)
당신은 저가 싫다십니다
저가 하는 말이며 짓는 웃음이며
하다못해 낮고 고른 숨결까지도
막무가내 자꾸 싫다십니다
저는 몰래 웁니다
저가 우는 줄 아무도 모릅니다
여기저기 아프고
아픈 자리에
연한 꽃망울이 보풀다가 그쳐도
당신도 그 누구도 여태 모릅니다
머지않아 당신은 시집을 가십니다
축하합니다 저는 여기 있으면서
당신이 쌀 이는 뒤란의 우물가에
보일 듯 말 듯한 허드렛풀 핍니다
마음 시끄러우면 허드렛풀 집니다
저는 당신의 친구입니까
저가 하는 말이며 짓는 웃음이며
하다못해 낮고 고른 숨결까지도
막무가내 자꾸 친구입니까
저는 몰래 웁니다
박물지 4
- 윤택수
이것을 먹으라니 이것을 먹고 죽은 뜻이 엎드려 있으라니
입이 심심할 때 한 입 슬쩍 먹어보는 게 아니라
이것을 가지고 연원히 견디라니
난 못 해 난 안 해
세상에 시라소니는 없다 꿀샘 없는 꽃이 없듯이
호랑이는 내버려둬 호랑이가 우리를 내버려두듯이
포수는 협곡과 광야를 지나 북부의 습지에 도착했다
그는 거기에서 벼농사를 짓다가
빙하의 섬으로 건너갔다고도 하고
음유시인으로 죽었다고도 한다
그가 사랑을 잊지 않았다면
사랑의 명령으로 아들을 낳았다면 그 아들이 다시 아들을 낳았다면
그의 자리에는 들꽃 묶음이
박물지 7
- 윤택수
나는 상황실에서 그와 적의 대화를 받아쓰고 있었다
적이 그에게 물었다 친구는 꿈이 무어냐
그가 느릿느릿 대답했다 나의 꿈은 내 고장의 해변에서
작은 여인과 함께 사는 것이야 친구는 모를지 몰라도
내 고장은 화석과 산협의 단구와 모래톱의 해명을 가지고 있어
읽고 싶은 책을 사게되어 흐믓한 참인데 애잔하게 늙은 아내가
능수조팝나무의 구름을 보러 가자고 할 때까지 산다면
아이들이 백엽상 앞에서 꺾은선그래프를 그리고
나는 울었다 그 꿈이 이루어지리라고
너는 믿느냐
박물지 9
- 윤택수
무섭도록 책을 읽는 소년이었다는 소문 없이 위인이 된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위대함의 질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강유일
음악과 나의 의자가 없는 천국은 천국이 아니다, 유종호
나는 아직 정돈되어 있지 않고 바다는 염분에 젖은 캡슐을 가지고 암초를 공략하며 파도로 원을 그린다, 파블로 네루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금서를 읽는 쾌락을 아는 사람은 안다, 김성탄
김광규의 아이히 각주 <과자와 맥주>를 네 번째 읽고 있네 <오만과 편견>을 그만큼 읽었던가 <돈키호테>나 <장미의 기적>이라면 한 번 더 볼 용의가 없지 않네 나는 놀고 먹지 않았다 끊임없이 왜 사는지 물었고, 이성복
나는 원한다 나에게 금지된 것들을, 누구 말이더라 아아 나느 코뿔소다, 김재은
박물지 14
- 윤택수
크지 않은, 무르지 않은, 발꿈치와 복숭아뼈도 있는
그렇지 직녀의 발은 꽃이야
어떤 남자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다수굿이 오므린
그 발이 나를 밟으면
나는 화상을 입으리니
아주 연한 화상
노예의 낙인 같은 나무의 기억
오늘 밤 나를 사다오
새를 쏘러 숲에 들다
- 윤택수
구절초 띠풀들을 뿌러 뜨리며 갔다
가슴이 약한 예각의 새가 날아갔다
그는 돌 속에 부주의하게 앉아 있다가
내 이마를 탁 때려주며 솟아오르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새똥 한 알 발견하지 못했지
총신에 온기가 쌓인다
먹지도 못할 새라며 내심 언짢아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이 쟁쟁해오고
숲의 끝을 돌면서
무슨 놈의 새가 깃 스침이 그리 눅눅한지
집으로 돌아가서 책이나 볼 것이었다
혼자서 새를 쏘러 나서면
물소리도 적의에 차고 침엽거수도 쿵쿵 위협한다
구름마저 낮다
말과 개와 집요한 추적으로
이내 더러워진다
오늘은 말을 묶고 개를 저버리고
느릿느릿 숲을 옮아가지만
모두가 새들과 한패다
나뭇가지를 휘는 바람과
망자의 날의 박주가리 솜털도 축축하다
공중으로 총구를 잰다
새는 어리고
구우면 고엽같이 뼈째 부스러진다
버려진 농막에 엎드려
총탄을 세고
소매에 튄 피를 털어내면
늦은 불면이 온다
직박구리떼가 쳐놓은 그물이
산오이풀의 어둠 속에서 떨고 있으려니
칼로 가슴을 째어 소금을 넣는다
새의 추억의 발목을 끊는다
아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난 당신 아저씨
- 윤택수
오늘부터 난 아저씨야
가벼운 가벼운 여름이야
아저씨는 지나가는 아저씨
웃는 아저씨
난 겨울 한강에 서 있던 아저씨가 아니야
난 고개를 숙이고 웃는 아저씨
작은 목로집에 앉아
담배 피우는 아저씨
아름다운 당신 앞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난 당신 아저씨야
당신 애인이 아니라 당신 아저씨
이름 없는 아저씨
모자를 쓰고 마포 삼겹살집에 앉아
이룬 것도 잃을 것도 없는 황혼 아저씨
비 아저씨
빗물 고인아스팔트나 바라보는 아저씨
난 당신 아저씨야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묻지 마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지 마
난 아저씨가 좋아
끄노 아저씨도 있지
프랑스에서 시를 쓰던
기인 벤치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아저씨
인생을 반납한 아저씨
난 당신 아저씨야
그 동안의 먹구름도 천둥도 모조리 한강에
버리고 온 아저씨야
개
- 윤택수
나는
이 밤에
깊이 감상에 빠지고
제 감동에 겨워 전전긍긍 살아가는
시인이다.
나도 때로는
격시를 쓰고
실망한 사람들이 용기를 얻는
힘찬 시도 쓰고 싶지만
적에 의해 가슴에 아픈 못이 박혀
철철 피를 흘려도
개천에 버려져도
나는 장엄하게 죽노라 호언하는
용자도 되고 싶지만
이 비 내리는 밤
문을 열고
울음 우는
병신 같은 시인이다
개새끼다
나는
코스모스
- 윤택수
이것은 숫제 감격입니다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날아들다가는
멈춰 서버리는 춤판입니다
어쩌다가 그 속에서 숨이라도 들이켤라치면
잎 진 삼같이 어깨를 들썩이다가
혹은 낮게 낙제 기침하다가
눈썹에 내린 하늘빛이라니 아예 침묵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 어디선가
흰 새 새끼들이 날개 치는 소리가 있습니다
여기는 그만 바다입니다
시든 꽃
- 윤택수
네가 그에게 다가가
처진 가지에 손을 대는 순간
동계를 떨게 하는 열은 향기와
빛이 채염 되는 일방
잘못 슬쩍 치자마자 소리 없이 떨어지는
민간함을 알게 되고
한 사람에게 반한다는 것은
그가 가지는 악습과 병까지도 피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담대함이니
너는 그의 위상을 모르고
그가 서 있는 곳에서
아무런 서성이는 곳에서
아무런 서성이는 자를 발견 못해도
드디어 드디어 겨울이 와
비로소 그의 가지에 손을 얹고
오 흰 눈이로군
지껄여보라
어느 위대한 시대의 명예로운 분전도가
그보다 굳센 소리를 내는가
그의 유물이 콩이라면
너의 오몀된 정맥과
신이 쓰이는 방법으로
노래하라
첫댓글 향한 미숙한 사랑 어느 아저씨께서 노예가 그리워 꿈 에서 본 시 같아요
암튼 세상의 빛이 되기 소망 하는 철부지 할머니 랍니다
글 감사합니다
읽을수록 또 다른 것이 마구마구 읽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