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암(息庵) 황섬(黃暹)
|
성명
|
: |
황섬(黃暹) , 1544년(중종 39) 년 ~ 1616(광해군 8)년 |
본관 |
: |
창원(昌原) |
자 |
: |
경명(景明) |
호 |
: |
식암(息庵) |
시호 |
: |
정익(貞翼) |
출생지 |
: |
한양 이현(梨峴 : 현 동대문 근처) |
출신지 |
: |
풍기(豊基) |
분묘지 |
: |
풍기군(豊基郡) 묵동(墨洞) |
입사경로 |
: |
문과(1570년) |
내관직 |
: |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 해운 판관(海運判官),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호조 참의(戶曹參議), 병조 참의(兵曹參議),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형조 참의(刑曹參議), 도승지(都承旨), 이조 참의(吏曹參議),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 |
외관직 |
: |
황해 도사(黃海都事), 서천 군수(舒川郡守), 성주 목사(星州牧使), 평안도 모운사(平安道募運使), 안동 부사(安東府使) |
증직및기타 |
: |
이조 판서(吏曹判書) | | |
|
|
|
내강외유(內剛外柔)의 선비 식암 |
식암 황섬은 1544년(중종 39) 10월 30일 한양 이현, 지금의 동대문 근처에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성질이 온순하여 겉으로 보기에 부드러웠지만 그 속은 누구보다도 강건하였다고 한다. 또한 어려서부터 재치와 사고력이 뛰어났으며 장성하여서는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8세가 되던 해인 1651년(명종 6)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로서 이웃 마을에 살고 있던 약포(藥圃) 정탁을 찾아가 그에게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
|
|
언관의 직을 충실히 수행하다 |
1564년(명종 19) 21세의 나이로 성균관 유생이 되었고, 1570년(선조 3) 문과에 급제한 뒤 한성부 참군과 해운 판관에 제수되었다. 생원시 합격 이후 그의 출사가 늦었던 것은 효심이 지극했던 그가 3년간 어머니의 묘소를 지켰기 때문이다. 1573년(선조 6) 황해도사로 외직에 나갔던 그는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봉상시주부(奉嘗寺主簿)가 되었고, 이어 호조 좌랑·예조 좌랑·형조 좌랑 및 정랑·성균관사유겸춘추기주관(成均館師儒兼春秋記注官) 등을 역임하였다. 34세가 되던 해인 1577년(선조 10)에는 서천 군수(舒川郡守)로 나가게 되었는데, 당시 그의 선정을 기리고자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워주었다고 한다.
황섬은 이후 다시 내직으로 돌아가서 1581년(선조 14)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어 강연(講筵)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지금 서울 각 관청의 노비와 조세는 형조에서 수납하여 각 관청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형조가 노하면 각 관청으로 가는 물건들이 막혀버립니다. 따라서 각 읍으로 하여금 도회관(都會官)에게 보내도록 하고 감사(監司)의 관원이 서울에서 받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는 계를 올려 조세 배분의 폐단을 지적하였는데 이에 임금이 따랐다고 한다.
이듬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과 사헌부헌납(司憲府獻納)을 거쳐 1583년(선조 16) 사헌부장령이 되었으며, 신덕왕후(神德王后) 복위 문제와 관련한 계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사간원 사간이 되어서는 이이를 논핵한 죄로 유배를 가게 된 허봉(許葑)·송응개(宋應漑)·박근원(朴謹元) 및 이와 연루되어 좌천된 김응남(金應南)의 죄를 사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렇듯 주요직에 두루 임명된 것을 보면 그의 성품이 꽤나 강직했음을 알 수 있다.
|
|
|
임진왜란 때 빛을 발하다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임금을 모시게 된 황섬은 평안도 모운사로 뽑혀 군량 수운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때가 때이니 만큼 그는 군사 문제와 관련된 상소를 왕에게 자주 올렸다. 그것은 모군(募軍)과 식량공급에 관한 정책을 건의하는 내용들이었으며, 그 유명한「팔조소(八條疏)」도 이때에 올린 것이다. 그 이듬해에도 소를 올리니 왜란 당시 군공이 있음에도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이들에게 수령으로 추천하거나 후한 상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596(선조 29)년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된 그는 병조와 호조 참의를 거쳐 안동 부사로 외직에 나가게 되었다. 이후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이조와 호조 및 예조와 병조의 참의를 지냈으며, 1602년(선조 35) 주역교정청당상(周易校正廳堂上)에 뽑혔다. 이후에도 홍문관 부제학·사간원 대사간·도승지·사헌부 대사헌 등 주요직에 연이어 임명되었다.
|
|
|
고향에서 남은 생을 마감하다 |
그러나 1608년(광해군 즉위) 광해군 즉위 후 자신의 자형 유영경 유영경이 죽으면서 황섬은 관직에서 물러나 장남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말년에 학문과 후진양성에서 온 힘을 쏟았던 그는 양몽재(養蒙齋)를 지어 자제를 가르쳤으며, 옥천정사(玉泉精舍)를 짓고 스스로를 옥천거사라 자칭하며 낙향생활을 즐겼다.
황섬은 관직에서 물러난 지 8년 만인 1616년(광해군 8) 4월 19일 향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소는 풍기군의 묵동(墨洞)에 있다. 1623년(인조 즉위년) 호종의 공이 참작되어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705년(숙종 30) 유생들에 의해 풍기 우곡서원(愚谷書院)에 배향되었다.
|
가족이야기
|
조 |
: |
황사우(黃士祐) |
생부 |
: |
황응규(黃應奎) |
모 |
: |
여주이씨(驪州李氏) 의빈도사(儀賓都事) 이수려(李壽旅)의 딸 |
형제 |
: |
황시(黃是) | | |
|
|
|
풍기의 명문가가 되다 |
황섬의 선대는 고려시대에 대상(大相)을 지낸 황석주(黃石柱)의 후손이며 본래 창원 사람이었다. 그러나 황섬의 증조부 황희성(黃希聖) 때부터 풍기(豐基)로 옮겨와 살기 시작하였다.
할아버지는 우찬성겸이조판서(右贊成兼吏曹判書)를 지낸 황사우이고, 아버지는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역임한 황응규로 두 사람 모두 세상에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어머니는 여주이씨 의빈도사 이수려의 딸로서, 그녀의 증조할아버지는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계손(李繼孫)이다.
|
|
|
정숙했던 부인 이씨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다 |
그의 아내는 풍성군 이전의 딸로서 부녀자의 도리를 행하는데 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편 황섬 보다 31년이나 앞서 죽고 말았다.
황섬은 부인과의 사이에 3남 4녀를 두었다. 장남은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좌랑이 되었고, 2남은 해주 판관이 되었으며, 3남은 생원이었다. 장녀는 왕자의 사부 송효작에게, 2녀는 금부도사 김중겸에게, 3녀는 정랑 심관에게, 4녀는 윤상원에게 시집을 보냈다.
한편, 소북파의 영수로서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柳永慶)이 황섬의 매부이다.
|
학문이야기
|
스승 |
: |
정탁(鄭琢) |
향사 |
: |
우곡서원(愚谷書院) |
학파 |
: |
퇴계 학파 | | |
|
|
|
교유인물 |
곽진(郭 山+晉), 김륵(金玏) |
|
스승 정탁에게서 학문을 전수받다 |
어려서부터 남달리 슬기롭고 총명하였으며 나이에 비하여 깨우침이 빨랐던 식암 황섬은 어린 나이인 8세에 약포 정탁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황섬의 스승 약포 정탁은 17세에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그 때 이황의 나이가 42세였으니 이황의 제자 가운데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을 위하는 학문[爲己之學]이 있음을 알고 실천하는 공적을 더하여 구이지학(口耳之學)을 일삼지 않았으며 경사(經史)를 꿰뚫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주역』·『중용』·『대학』·『소학』등에 두루 심취하여 밝았으며, 천문(天文)·지리(地理)·상수(象數)·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하여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선비가 병법을 모르면 대임을 맡기에 부족하다 여겨 팔진(八陳)이나 육화(六花) 등의 법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한편 그는 나이가 든 뒤에는 남명 조식과도 학문을 교류하였다.
이러한 스승의 학문적 경향은 황섬에게 그대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임진왜란 때 군사 문제와 관련한 상소를 자주 올린 것 역시 병법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스승 정탁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또한 신도비문에 적힌 “경전을 통해 학문을 닦았으며, 궁격(窮格)을 근본으로 삼았다.”는 기록을 통해 성리학 본연의 수양론과 인식론을 중시하였던 황섬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다.
|
|
|
남태저가 바라 본 황섬 |
남태저(南泰著)는 신도비에서 “임금을 존중하고 백성을 어루만져 40여 년이나 조정에 나아가 전곡갑병(錢穀甲兵)과 형상(刑賞) 및 교화(敎化)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특히 임진왜란 이후 유학을 부흥하는데 기여한 바가 크며 은퇴하여서는 도서(圖書) 연구에 침잠하였다.” 라고 황섬을 기록하고 있다. 황섬의 학문적 영향력을 짐작하게 하는 구절이라 하겠다.
|
저작이야기
|
황섬의 향기가 담긴 『식암집』 |
『식암집』은 1709년(숙종 35) 2월 황섬의 후학인 신경준(申景濬)에 의해 간행되었고, 모두 5권 3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과 2에는 각각 시 200여 수가 수록되어 있어 상당히 많은 양의 시가 전해진다. 권3은 비답(批答) 1편과 소 5편이 실려 있는데, 「논팔조(論八條)」가 유명하다. 권4에는 서 10편과「식암명의(息庵名義)」를 비롯한 잡저 10편·서 1편·기 1편, 이황의 향약과 창원황씨 족보에 쓴 발 2편·명찬 3편·전문(箋文) 1편·책문(冊文) 1편·축문제문(祝文祭文) 20편·행장 등이 있다. 권5는 부록으로 행장·묘지·제문·우곡서원봉안문·상향축문·만사·신도비명 등이 실려 있으며 책의 끝부분에 식암선생연보가 있다.
|
|
|
임진왜란, 그 어두운 시대를 노래하다 |
황섬의 시는 특히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전쟁의 체험을 반영한 작품이 많다. 「임진사월회일기사(壬辰四月晦日記事)」는 7언체의 장편시로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의 참담한 심경을 그린 것이다. 「과연안유감(過延安有感)」은 임진왜란 다음해에 지은 것으로 연안성(延安城)에서의 승리를 찬양한 시이다. 이밖에 「을사관동수재(乙巳關東水災)」는 1605년(선조 38) 강원도 지방에서 폭우로 인하여 큰 수재가 발생한 데 대한 우민(憂悶)을 나타낸 것이다. 「아중가비사어호(阿中家碑死於虎)」는 그의 집 노복이 호랑이에 물려 죽는 것을 슬퍼한 내용이다. 「비파녀(琵琶女)」 등 서정과 낭만을 노래한 것도 있으나 그의 시 대부분은 시대적인 상황을 반영한 어두운 색조를 띠고 있다.
서의 「예조답대마도주평조신서(禮曹答對馬島主平調信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 예조에서 대마도주와 교환한 서신이며, 「여소수서원원장분의도감서(與紹修書院院長奮義都監書)」는 정유재란이 끝난 뒤 의병에 대한 포상문제에 관하여 언급한 내용이다.
소의 「차사은사장부경걸근친소(差謝恩使將赴京乞覲親疏)」·「해주주가시소(海洲駐駕時疏)」·「논팔조소(論八條疏)」·「근친후환경상소(覲親後還京上疏)」·「논군무소(論軍務疏)」 등은 임진왜란을 치르는 동안 모운사와 병조 참의 등으로 있으면서 국방과 시사문제 등에 관하여 올린 상소문으로 그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