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육 및 의료
1886년 배제 이화학당이 감리교에 의해 세워지자 경신 정신학교가 북장로교에 의해 세워
졌다. 1910년에는 정부로부터 인가 받은 사립학교 2,250여개 가운데 신구교 합해서 796개교
가 기독교 개통의 학교였다. 이것을 볼때 교회가 사회교육에 큰 관심을 가진 것을 알 수 있
다. 1897년에 간행된 그리스도 신문의 논설에 보면 근대교육이 긴급성에 대하여 논하고 있
다. "대한이 오늘날 형편에 처하여 위급한 사정을 생각할 진대, 백성 교육하기가 시각이 급
한지라"
{{
) Ibid., p. 95
}}
그러나, 꼭 교육을 받으러 온 학생들이 기독교를 목적으로 기독교계통의 학교에 온 것만
은 아니었다. 즉 영어를 배워서 출세하려는 목적에서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 찾아온 학생들이
많았다. 이화학당의 첫학생도 어떤 관리의 첩이었고,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을 할 목적이
었다.
{{
) 강근환, "한국개신교회 초기에 있어서의 교회 급성장에 대한 요인과 문제성 고찰.", p.
88
}}
배재학당에서는 성경교육을 시키려하고 영어과목을 빼려고 하니 학생들은 동맹휴학
에 들어 갔었다.
{{
) Ibid., p.89
}}
이에 대해 강근환 박사님은 선교초기에 기독교 학교에 몰려 들었던 많은
학생들이 영어를 열망했고, 그 목적은 입신 출세였다고 하였다.
{{
) Ibid.
}}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맞아 사경을 헤맬때, 알렌
(H.N.Allen)이 치료하여 낫게 되었다.
{{
) 박효생, [한국 기독교 성장 100년], 한국 기독교 의료 운동사 편, p.100
}}
이에 정부와 왕실의 신임이 두터워져 알렌의 제의에
따라, 광혜원이라는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이 설립되었다. 1885년 9월 10일에는 스크랜트
(Scranton)에 의해 민간병원이 설립되게 되었고, 1890년경 이후에도 인천 평양 개성 대구 부
산등지에도 선교병원이 확대되었다.
{{
) Ibid., p. 101-102.
}}
그리하여 일반 대중에게 서양인에 대한 불신이 사라지
게 되고 서양문물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