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 시냇물을 따라간다
— 길 ․ 1
고성만
냇물이
필터로 거른 것같이 맑아졌다
등성이에서 산마루로 바람 불어가듯
해 뜨는 쪽 향하여
가지 뻗는 나무들
언젠가 잃어버렸던 악기를 연주하는 우듬지 근처
여태 발음하지 못한 말들이
가만가만 흔들리는 물 속
골짜기 사이
또 골짜기 지나
귀를 씻으러 간다
검은 그림자 흰 여백 안으로
몰래 다가가고자 했지만
끝내 들키고야 말았던 발짝 소리로
가도
다 못 가고
다시 돌아오는 길 위
산죽이 발처럼 둘러쳐져 종일 사운거리는 언덕
빈 하늘에 걸린 낮달 가져다가
한 종지 떠서
찻물 끓인다
으름
— 숫꿈 ․ 2
누군가 보내온
메일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분홍빛 연체동물들 꿈에서도
결제를 요구한다 움찔,
털 난 입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던 까까머리 중학생 무렵 오십 원을 주고 친구에게 빌려본 잡지에 젖소 같은 서양 여자 그 후 자주 머릿속에는 짚신벌레들이 기어 다녔지 따지고 보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접힌 페이지라 위로해보지만
퍽퍽 낫질 끝에 덩굴은 벗겨지지 않았는데 나뭇가지를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수액
핥는다 한사코
바위 속으로 숨는 숫양처럼
옷도 집도 없이 기어이
기어가는 민달팽이처럼
없는 뿔 들어 푹,
갈색 봉지가 찢어지면서 검은 씨앗이 우수수 쏟아진다
—시집『햇살 바이러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