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애인도 아가도, 이제는... 안녕!
배낭이 없긴 하나 오랜만에 걷는 13km 거리, 산길에 비까지 내리고 있어 조심스럽다. 1500m가 넘는 산 위를 계속 걷자니 구름이 눈 앞에서 동동 떠다닌다. 만하린Manjarin에 도착하니 마을에 집이 딱 두 채인데 다 쓰러져가는 움막이 알베르게인 줄 알고 가서 문을 두드리니 웬 히피가 나온다. 집은 바람 불면 쓰러질 것 같은 오두막인데 차는 두 대다. 캠핑카랑 자가용. 저렇게 살아보는 것도 멋지겠다.
만하린 알베르게에선 중세 템플기사단의 생활 양식을 그대로 고수하며 살아가는 토마스 아저씨가 기념품을 팔고 계셨다. 템플 기사단이 푸세식 화장실에서 똥 누고 샤워도 안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백마 탄 기사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깨져나간다. 토마스 아저씨는 사람들을 반기며 따뜻한 차를 주시고 실내로 들어와 몸을 녹이라고 하셨다. 어두컴컴한 실내에 작은 장작 난로, 고양이 오줌 냄새가 가득 배인 집 안에 들고양이 세 마리가 부엌을 뒤지고 있다. 아저씬 침대도 없이 벽에 작은 구멍을 파고 그 안에서 다리도 못 뻗고 주무셨다. 이렇게까지 힘든 생활을 고수하면서까지 아저씨가 지키고 싶어하시는 건 과연 무얼까. 춥지만 않다면 묵어가면서 아저씨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싶다. 차를 마시는 동안 들고양이들이 내 무릎 위로 올라와 허벅지를 마구 긁어댔다. 고양이들 사이에 아마도 내가 저희들 좋아한다고 소문이 난 모양이다.
토마스 아저씨.
만하린Manjarin 알베르게.
다시 길을 나섰는데 택시 아저씨가 지나가다 차를 세우더니 내 배낭은 엘 아세보El Acebo에 잘 가져다 놓았고 오늘은 비가 내려 화살표 길이 험하니 찻길을 따라가라고 일러주신다. 오늘의 천사다. 희한하다. 동양인이 나 하나도 아닌데, 어떻게 다들 난 줄 알아볼까? 날씨가 계속 추웠지만 구름 속을 걷는 기분이 묘했다. 천지가 들꽃이라 융단이 따로 없다. 배낭이 없으면 걸음이 좀 빨라질 줄 알았는데 속도는 여전히 시속 2km. 그래도 다리에 무리는 덜하다.
저만치 45도는 족히 돼보이는 경사로가 보인다. 화살표길은 아닌데 어쩐지 지름길인 것 같다. 화살표는 다른 길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왠지 지름길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어 가파른 산길을 헉헉대며 올라갔다. 하하하! 다 올라와서 보니 길이 아니다. 날 따라 그 길로 온 독일 아줌마 두 명이 산 위에 큰 대 자로 뻗어있는 나를 보고 놀란다. 아줌마들은 곧 바삐 어디론가 사라지고 한숨 돌리고 나서 보니 지도도 없고 물도 없고 나는 또 미아가 됐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엔 억울했다. 얕은 관목 사이로 사람들 발자취를 따라서 작은 오솔길이 나 있었다. 나같은 사람들이 또 있었던 거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라던 노신의 말이 떠오른다. 그런 작은 자취들을 찾아 겨우겨우 산을 내려간다. 나는 왜 이리 고생을 사서 할까? 아까 분명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더 쉬운 길이 있는데도 새로운 길을 찾겠노라고 이 법석이다. 매번 내 인생을 우여곡절 드라마로 만들고 있는 건 바로 나다.
가까스로 기다시피 산에서 내려와 화살표 길로 들어서니 안개 때문에 10 미터 앞도 안보인다. 길가에 앉아 쉬고있으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귀신인 줄 알고 놀란다. 언덕 아래 너무도 예쁜 엘 아세보El Acebo가 내려다보일 땐 좋아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식당을 겸하고 있는 알베르게에 꼴찌로 들어와 잠시 드러누웠다. 작년 이맘 때 눈이 20cm나 왔다는 명성에 걸맞게 춥다.
집집마다 대문에 들꽃을 한 다발 씩 꽂아놓았다.
저녁을 먹어볼까 하고 식당에 갔다. 메뉴판만 읽어도 구토가 났다. 마늘 수프 한 그릇을 시키고 앉아있으니 아까 산 위에서 "니가 문이니?"하고 물었던 모자母子가 합석했다. 네덜란드에서 온 린다와 아들 로헨은 사람들한테서 내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문'이냐고 물어 아니라고 했는데 린다는 내 이름 '순'을 헛갈린 거였다. '순진'은 발음이 어려워 보통은 그냥 '순'이라고 알려줬기 때문이다. 린다는 심하지 않은 중풍을 앓고 있었는데 코골이 때문에 잠을 못자 입이 돌아가고 혀가 마비되는 자기 증세를 무척이나 익살스럽게 이야기했다. 집에 두고 온 강아지가 그립다는 얘기, 축구에 미친 아들 흉보기, 술만 취하면 아무데서나 옷을 벗어제끼는 아들에 대한 걱정 등등 아줌마의 유쾌한 수다는 끝이 없었다. 내가 거스 히딩크가 한국에선 영웅 대접을 받고 있고 히딩크 피자도 생겼다고 하니까 로헨은 박지성과 설기현에 열광하는 네덜란드 훌리건의 표정을 재연해주었다. 아줌마의 중풍 증세가 심해지고 있어서 두 사람은 내일 택시로 폰페라다Ponferrada까지 간다고 했다. 용감하고 멋진 아줌마의 건강한 여행을 빌며! 우린 함께 축배를 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고백.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습니다."
[출처] 20080526 엘아세보El Acebo|작성자 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