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들어온 개신교는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선교사들이 놀라고 염려할 정도의 성장
을 보였다. 1907년 John R. Mott는 극동여행을 마치고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을 평하여 "한국
은 비기독교 세계에서 최초로 기독교 국가가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강근환, "한국개신교회 초기에 있어서의 교회 급성장에 대한 요인과 문제성 고찰.", p.
84}}
.
그렇다면 한국이 이렇게 빨리 개신교를 수용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100여년전에 들어온
천주교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 되었다. 천주교는 많은 저항과 박해를 받았고 선교의
자유마저 제대로 얻어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같은 서양의 종교이면서도 개신교는 열린마음
으로 받아 들이게 된다.
이러한 성장의 요인으로 신앙적인 면만을 볼 수는 없다. 물론 신앙적인 요소도 있었겠
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개신교의 급속한 발전을 가능케 하였다. 본 장에서는 개신교를
급속도로 성장하게 하고 한국인들이 개신교에 대해서 열린마음을 가지게 된 몇가지 요인을
살펴 보려고 한다.
A. 정치사회적 혼란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에서 개국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혼란속에서 여러 사건들이 일
어나게 된다. 아직 선교가 허락되지 않았지만 이런 혼란이 개신교 선교의 중요한 요인이 되
었으며 선교개척의 문을 열게 하였다.
1884년 9월에 장로교의 알렌(H.N. Allen)이 의료 선교사로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왔
다. 그는 고종에게는 선교사의 신분을 속이고 당시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미국 공사관과 기
타 외국 공사관의 의사 신분으로 입국하였다. 그러던중 1884년 12월 4일밤 자객의 칼에 맞은
수구파 대신중의 한사람인 민비(민비)의 조카뻘 되는 민영익을 알렌(H.N.Allen)이 치료하여
생명을 구하는데 성공하였다.
{{강근환, Ibid., p. 83.}}
. 알렌은 고종의 주치의가 되었고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
던 것이다. 비록 고종이 알렌에게 선교의 윤허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이 기독교의 순
조로운 선교사업의 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송길섭, "한국기독교의 수용과정", [신학과 세계], 1983년 제9호, p. 198.}}
그 이후 한국에 개신교가 1898년 6월 10일 선교의 윤허를 얻어내고, 1895년 부터 1907년
까지는 급격한 수적 증가를 가지고 온다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op. cit., p. 132.}}
. 이러한 증가를 가지고 온 계기는 1895년에 있은
청일전쟁이다. 당시의 한국인들은 일본이 청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한국인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청일전쟁을
통하여 새로운 각성을 한 대중은 서양의 문물제도가 우수하다는 생각이 생기게 되어 서양인
의 종교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백낙준, 한국개신교사,(서울:연세대학교 출판부,1973) p.272. 강근환, "한국 개신교회
초기에 있어서의 교회급성장에 대한 요인과 문제성 고찰", op. cit., p.93.에서 재인용.}}
.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로 들어
온 것은, 특히 상류층의 사람들은 순수한 신앙보다는 선진 서구문화를 받아들여 개화와 구국
의 방편을 삼으려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1904년의 러일 전쟁까지 이어졌고, 러
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한국은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라는 비운을 맞게된다. 일
본은 이제 한국을 완전히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벌인다. 이 때 유일하게 도움을 받
고자 했던 곳이 교회였다. 당시의 기독교 학교는 민족교육을 시켰고 일본도 이러한 기독교
학교에서의 강한 민족교육과 그 정치화에 신경을 몹시 썼다.
{{민경배, [한국민족교회 형성사론], (서울:연대출판부), p. 39.}}
한국 기독교인의 경우에 입신
의 동기는 자강(자강)하기 위하여 힘의 원천인 복음에 인도됨으로 미래의 운명을 찾아 상실
하지 않고 보존 하겠다는 것이 압도적이었다.
{{Ibid., p. 40.}}
고종은 1905년 11월에 헐버트(H.B.Hulbert)
선교사를 통해 미국 백악관에 친서를 전달하려고 까지 하였다. 이러한 민족 정신들이 당시
교회에서 찾을 수 있었기에 청년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계속 국
권회복운동을 하지는 않는다. 한국인들이 신앙적인 면 보다는 정치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선교사들은 두려워하였다.
개신교가 급성장한 사회적인 요인 한가지를 더 들면 '개인적인 안전대책을 강구'였다는
것이다. 외국인 선교사들에게는 한국 지방관리들도 함부로 할 수 없음을 보고, '관가의 착
취를 당하고 억압아래서 살던 사람들이 개인적 안전을 도모하는 방위수단으로 선교사와 그들
이 전하는 종교로 전향하기도 하였다'
{백낙준, op. cit., p. 167.}
.
영적인 갈망으로 입교하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못하였다. 그것은 개
신교의 급성장이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1907년 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이루어
졌음을 통해 알 수 있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나 1909년에서 1910년 사이에 광범위하게
일어난 "백만명 신자화 운동"은 비기독교인들을 개종시키거나 교회의 큰 성장을 가져오게 하
기 보다는 오히려 이미 교회에 들어온 기독교 신자들의 영적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
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백낙준, 한국개신교사,(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1973), p. 395. 강근환, 초기
개신교 교세급성장 고찰, p. 91. 에서 재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