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 최후의 심판 비화
미켈란젤로 자화상
[시스티나 성당]
1.시스티나 성당의 천장벽화(1508-1512)
미켈란젤로는 1508년 5월 10일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4년 동안 천장벽화의 프로그램을 짜고 설계하여
그 계획에 따라 일을 진행해나갔다
일반인은 물론 교황까지출입을 통제시키고
천장 밑에 받침대를 세워 직접 그렸다
얼굴에는 온갖 물감이 흘러내려 피부병이 생기고
몸은 하프처럼 휘어지고 항상 고개를 제치고 그렸기
때문에 고개가 굳어 목이 잘 굽혀지지 않는
고통스럽고도 고된 작업이었다
1512년 10월 31일 시스티나 성당이 교황의 미사 후에
마침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바사리의 기록에 의하면
작업이 공개되었을 때 온 세상 사람들이 미켈란젤로가
무슨 그림을 그렸는가를 보려고 달려왔고 그것을 보고는
너무도 경탄하여 할말을 잊은 채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관람객의 머리 위로 수천 피트 넓이의 천장에는 300명이
넘는 인물들이 어떤 사람은 실물보다 3.4배나 더 크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창세기의 여러 장면들을 연출해
다양한 위치에서 본 것같이 그렸다
찬란한 색채로 그려진 천장은 이제까지 본일이 없는
거의 압도적인 거대한 스케일로 제시된
가장 거창하고 야심찬 화려한 장식이었다
아담의 창조 1508-1512년, 프레스코
최후의 심판
최후의 심판
예레미야
누드 습작
대리석 저부조 (피렌체 카사 부오나로티)
계단의 성모
피에타(산 피에트로 성당안 오른쪽에 있다)
[최우의 심판 비화]
휘장 걷어내자 '이단이다' 경악
1541년 11월 1일,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이 공개되었다. 교황과 성직자들이
경사스런 행사에 맞추어 시스티나 예배소로 모여들었다. 베드로 대성당 공사가 수십 년째
완공이 지체되는 바람에 줄곧 여기서 의식을 치러왔으니 새삼스런 걸음은 아니었다.
1512년 이곳의 천장 프레스코를 완성하고 서른 해 남짓. 예순 여섯의 늙은 예술가에게도
감회가 밀려왔다. 이윽고 창문을 가렸던 휘장을 걷어내자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올려보는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후의 심판 날,
뭇 영혼들의 찬양과 울부짖음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재림 예수가 하늘 복판에 앉았다.
천사와 악마, 꽃다운 생명을 던져서 신앙의 사표가 되었던 순교자와 열두 제자들, 그리고
400명이 넘는 성자와 성녀들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퍼렇게 빛나는 하늘은 어떤 심판의
칼날보다 무섭고 전율스러웠다.
그런데 그림을 뜯어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한순간 일그러지더니 술렁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쥐어짜는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단이다!"
미켈란젤로는 이날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최후의 심판>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직자와 교황청 관료들, 예술가와 인문학자들이 모두 한편이 되어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를 두둔하다가 `이처럼 저질스럽고 음란한
장소에서 어떻게 기도와 찬양이 나오느냐'고 막말을 듣기도 했다. 뒤이어 성좌에
오른 네 명의 교황들은 제단 프레스코에 대해서 전혀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전면 철거냐, 부분 개작이냐를 두고 안팎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성자, 성녀 알몸으로 그려
그림 한 점을 두고 이단의 의혹을 천 가지 이상 꼽아대는 사람도 있었다. 성자들 뒤통수에
후광이 없고 천사가 날개를 달지 않은 것도 시빗거리였다. 예수의 얼굴을 수염 없는
애송이로 그려놓았으니 교회의 권위를 어디서 찾느냐는 볼멘 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자와 성녀들을 실낱 하나 걸치지 않은 빨간 알몸으로 벗겨놓은 게 탈이었다.
의전관 체세나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음탕한 그림을 교황 예배소에 버젓이 그려두었으니
자칫 목욕탕이나 술집에 온 줄 착각하겠다고 비아냥대기까지 했다. 심지어 십자가를 모신
제단 바로 위에 악마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걸 보고 이건 예배소에 모인 사람들더러
곧장 지옥불로 직행하라는 이야기라고 수군댔다. 더군다나 명부의 뱃사공 카론이 베드로의
고깃배에 타고 노를 휘두르는 판이니 첫 교황 베드로가 일군 천오백 년 역사의 가톨릭
교회가 그림 속 푸른 바다에서 뱃멀미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24년 시비끝 수정 결정
압력을 견디다 못한 바오로 4세는 `그림을 바로 잡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시종장의 전언에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쏘아붙였다.
“교황 성하께 먼저 세상을 바로 잡으시라고 전하게. 그러면 그까짓 그림 따위야
저절로 바로 잡힐 테니.”
그러나 뒤를 이은 피우스 4세에게는 그런 발뺌이 통하지 않았다. 교회의 권위는
그림 수정을 결의한다. 1564년 1월 21일 트렌티노 공의회의 결정은 미켈란젤로가
여든아홉 나이로 숨을 거두기 한 달 전에 내려졌다.
수정 작업을 그의 제자 볼테라가 맡은 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스승의 뜻을
크게 다치지 않고 최소한의 가리개만 씌우는 정도에서 일을 마무리했다. 다만 엉덩이를
흔들어댄다고 비난을 모았던 성녀 카테리나는 본격적으로 손보았다. 성자들의 부끄러운
곳을 덮는 가리개는 회벽을 파내고 젖은 석회를 새로 바른 뒤에 물감을 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볼테라는 이후 `브라게토니'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가리개 귀신'이란
뜻이다.
살가죽에 미켈란젤로 자화상
성 바르톨로메오는 산 채로 살가죽을 벗겨 죽이는 순교를 당했다. 십자가에 매달거나,
돌로 쳐죽이거나, 자루에 넣고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16세기
이탈리아 화가들은 극적 효과를 노리고 가장 참혹한 순교방식을 선호했다. 잔혹 주제가
판치던 17세기에는 심지어 성자를 십자가에 매단 상태에서 인피를 벗겨 내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단검으로 발라낸 성자의 껍질에다 자신의 자화상을 새겼다. 이로써 육신의
희미한 그림자 속에 예술의 고귀한 유령이 깃들게 되었다.
최후의 심판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미켈란젤로는 제 얼굴을 그리면서 두 눈을 후벼팠다.
실명의 달콤한 유혹이 그의 붓을 이끌었다. 또 그의 표정은 젖은 걸레처럼 일그러졌다.
무슨 심사였을까? 성 바르톨로메오 말고도 살껍질을 벗겨서 죽은 인물이 또 있었다.
마르시아스. 반인반수의 괴물이었으나 아폴론의 키타라를 능가하는 피리 솜씨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르네상스 이후 예술의 순교자로 추앙 받았던 신화 속의 존재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도 예술의 순교를 꿈꾸었을까?
'목욕탕에 어울리겠습니다'
시인 아레티노는 탁월한 미술 비평가로 이름을 날렸다. 베네치아 화가 티치아노에게는
간지러운 아부를 서슴지 않았으나 그와 적대관계에 있던 미켈란젤로에게는 주특기인
독설을 쏟아냈다. <최후의 심판>을 보고 나서 1545년 일흔 먹은 미켈란젤로에게 쓴
편지다.
“천사와 성인들은 지극히 고귀한 소재입니다. 그런데 당신 그림을 보면 지상의
진지함이나 천상의 엄숙함을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군요. 알만한 예술가라면 디아나에게
옷을 챙겨주는 거야 말할 것도 없고 베누스도 손으로 가릴 곳을 가리게 하지 않나요?
그런데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그대가 예술을 구실 삼아 신앙을 깔보는군요. 순교자와
성스런 처녀들이 창피한 줄 모르고 넋빠진 자세로 저마다 성기를 드러내고 있으니,
설령 유곽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쳐도 도저히 눈뜨고 못 볼 희한한 볼거리가 되겠군요.
이 그림은 교황의 성스러운 예배소보다 고급 목욕탕에 갖다두면 어울리겠습니다.”
자료 출처 : [노성두의 고전미술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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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그림 ..음악 ..고맙습니다
비에님, 고맙습니다~^^
제가 알고있는 리베라님 맞으신가요? 잘 지내시지요... 혹 핸드폰 번호 안바뀌셨지요. 함 전화드릴게요. 미켈란젤로의 자화상 보기 힘든데 고맙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화가에겐 특별한 탈렌트를 주셨지요 그래서 하느님과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이 화가를 통해 볼 수 있도록 이 화가의 손을 빌리신것 같아요.. 정말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그림을 그린 분이십니다~~~
아, 바다처럼님! 반가워요. 벌써 세월이 많이 지났지요?^^ 핸드폰 번호 그대로예요. 전화 한 번 주세요. 미켈란젤로의 벽화를 하나하나 보고 있으려니 천재라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탈렌트가 느껴져 숙연해져 버렸습니다. 맞아요, 하느님이 이 화가의 손을 빌리신 것! 사람의 손으로 어찌 저리 그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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