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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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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서원(伊山書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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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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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내림리 (원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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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축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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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安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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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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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8년(명종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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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건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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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경지당), 198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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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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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고종 5) | |
건축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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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에 세워진 첫 서원으로 1558년(명조 13)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강학의 장소로만 이용되었으나 후에 퇴계 이황을 배향하면서 제사의 기능을 겸하게 되었다.
서원은 본래 군치(郡治)에서 6~7리 되는 번고개 아래에 있었는데, 1614년(광해군 6)에 이산면 석포리 임구(林丘)로 이건되었다. 앞으로 하천을 내려다보는 좋은 경관을 갖춘 곳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에 훼철되었다.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서원 아래에 사는 주민들이 작당하여 건물을 무너뜨리고 서책과 문권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사림에서 경지당만 겨우 재건하였는데 해방 후에 기둥과 문짝 등이 모두 훼손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86년 중건된 것이다. 영주에서 이산 쪽으로 방향을 돌려 이산면사무소를 지나면 고개가 나오고 고개를 넘자마자 이산초등학교가 보인다. 조금 지나면 석포교가 나타나는데 석포교 직전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려 내림(수구리)으로 들어서 가면 서원이 나온다. 서원에는 본래 경지당·성정대·진수재·지도문 등의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강당인 경지당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
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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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당(敬止堂) |
백암 김륵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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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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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륵(金玏) , 1540년(중종 35)년 ~ 1616년(광해군 8)년 |
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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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안, 선성(禮安, 宣城) |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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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옥(希玉) |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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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栢巖) |
시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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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절(敏節) |
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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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榮川) 백암리(栢巖里) |
출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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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榮川) |
분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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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부(安東府) 내성현(乃城縣) 익곡(益谷) |
입사경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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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1576년) |
내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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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예조 좌랑(禮曹佐郞),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병조 좌랑(兵曹佐郞),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이조 좌랑(吏曹佐郞), 종묘 서령(宗廟署令),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조 참판(吏曹參判),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형조 참판(刑曹參判), 예조 참판(禮曹參判), 호조 참판(戶曹參判) |
외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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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찰방(高山察訪), 영월 군수(寧越郡守), 경상도 안집사(慶尙道安集使), 안동 부사(安東府使), 경상우도 관찰사(慶尙右道觀察使),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안동도호 부사(安東都護府使), 강릉 부사(江陵府使) |
증직및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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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판서(吏曹判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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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다 |
1540년(중종 35) 경상북도 영천 백암리에서 태어난 김륵은 16세에 안동의 명문 출신인 인동장씨(仁同張氏)와 혼인하고, 25세가 되던 1564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이 때 함께 합격한 사람 중에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등 당대의 뛰어난 인재들이 두루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묶어 용호방(龍虎榜)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사마시 합격 이후 생부 김사명(金士明)과 스승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상사를 당하여 고향에 머물던 김륵은 퇴계의 위패를 이산서원(伊山書院)에 봉안하는 일을 주도하며 영천 지역 사림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고, 흑석사(黑石寺)와 소수서원(紹修書院) 등지에서 학업에 열중하며 과거를 준비하였다.
37세가 되던 1576년(선조 9)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 김륵은 곧이어 승정원 가주서와 예문관 검열을 지낸 뒤 성균관 전적·예조 좌랑·사간원 정언 등 조정의 주요 문한직(文翰職)을 거치며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1580년 잠시 고산 찰방(高山察訪)에 보임되었던 김륵은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병조 좌랑·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홍문관 수찬·이조 좌랑 등 언론을 담당하는 삼사(三司)와 조정의 인사를 주관하는 이조·병조의 낭관(郎官) 등 핵심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584년(선조 17) 영월 군수(寧越郡守)로 부임해서 5년간 재직하는 동안 노산군(魯山君)의 묘에 사당을 세우고 위판(位版)을 봉안하는 등 절개와 의리를 지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589년(선조 22) 김륵은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어 다시 조정에 돌아온 뒤 사헌부 집의와 승정원 우부승지·좌부승지 등을 역임하며, 16세기 후반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영남 사족을 대표하는 핵심 인물 중 하나로 큰 활약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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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극복에 큰 공을 세우다 |
그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 안집사(慶尙道安集使)에 임명된 김륵은 초모문(招募文)을 집필하여 도내의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집경전(集慶殿)에 봉안되어 있던 임금의 초상을 청량산에 임시로 봉안하게 하고, 의성·예안·안동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는 등 공로를 세워 이듬해 안동 부사(安東府使)에 제수되었다.
김륵은 안동에 머물며 가난한 백성의 구제 대책을 마련하고 군량을 수송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경상우도 관찰사에 올랐다가 곧이어 조정으로 돌아가 승정원 도승지·사간원 대사간·성균관 대사성에 연이에 임명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594년(선조 27)에는 사헌부 대사헌·이조 참판·홍문관 부제학 등 요직을 역임했으며, 1595년(선조 28) 부체찰사(副體察使)에 올라 수원·전주·남원·거창·진주·대구·창녕 등지를 순시하며 군졸들을 위무하고 전황을 살폈다. 이때 한산도(閑山島)와 거제도(巨濟島)에 들러 이순신(李舜臣)을 비롯한 수군의 활약상을 조정에 보고하고 이들의 전공을 치하하였다.
1598년(선조 31) 다시 대사간과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된 김륵은 선조의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학문을 강론하고 시세(時勢)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진달하였지만, 영의정으로 있던 류성룡의 무고함을 변호하다가 파직되어 고향으로 잠시 물러나기도 하였다. 1599년(선조 32)에는 형조 참판과 예조 참판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이순신의 공로를 조정에 아뢰며 그 집안의 조세 부담을 감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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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하여 고향으로 물러나다 |
전쟁이 끝난 뒤 1600년(선조 33) 병을 이유로 고향인 영천으로 물러난 뒤 김륵은 월천(月川) 조목(趙穆)을 찾아뵙고, 오운(吳澐)·배응경(裵應褧) 등 벗들과 이산서원에 모여 강학에 몰두하였다. 그러다 형조 참의에 제수되어 다시 조정에 나아가게 되어 호조 참판 및 주역 교정청(周易校正廳)의 관직을 맡게 되었고, 동지사(冬至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건너가 전란 후유증의 수습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후 안동도호 부사를 거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고, 안동에 머물며 류성룡과 더불어 정몽주(鄭夢周)의 문집인 『포은집(圃隱集)』의 교정에 간여하였다.
1608년(선조 41) 대사성에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간 김륵은 1610년(광해군 2)에는 대사헌에 올라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된 동인(東人)의 억울함을 신원해줄 것을 청하였고, 이황과 이언적을 비롯한 5현의 문묘종사(文廟從祀) 논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생모 공빈김씨(恭嬪金氏)를 왕후로 추존하려는 광해군의 뜻을 비판하다가 노여움을 입어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좌천되었고, 이듬해 고향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1612년(광해군 4)에는 대북(大北) 세력이 꾸며낸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은 뒤 삭탈관직(削奪官職)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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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족
학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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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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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李滉), 박승임(朴承任), 황준량(黃俊良) |
향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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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구산서원(龜山書院) |
학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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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학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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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유인물 |
이덕홍(李德弘), 유성룡(柳成龍), 김개국(金蓋國), 김륭(金隆), 오운(吳澐), 배응경(裵應褧), 권두문(權斗文), 이호민(李好閔), 조정(趙靖), 이준(李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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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박승임과 황준량의 문하에서 학문을 시작하다 |
김륵의 학문에 관해서는 그 기록이 소략하여 자세한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는 7세가 되던 해부터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공부의 시기를 놓칠 것을 염려한 어머니의 배려 아래 집안에 작은 서재를 꾸미고 학업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김륵은 13세가 되던 1552년(명종 7)부터 당시 영천을 대표하던 학자인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과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의 문하에 나아가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하게 되었다. 박승임과 황준량은 모두 퇴계 이황의 직전 제자로 뛰어난 학식을 갖춘 인물들이었는데, 그 가운데 황준량은 처음 김륵을 보고서, “빼어난 기운은 세상의 더러움을 초월하였고, 젊은 나이이지만 학문이 이미 노성하였다.”는 글을 지어 그의 학문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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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에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다 |
김륵은 18세가 되던 1557년(명종 12) 이황을 찾아가 사서(四書)를 비롯한 성리학의 기본 경서들을 배우며 퇴계학의 정맥을 직접 이어받게 되었다. 그리고 산사로 물러나 은거하며 배운 것을 밤새워 반복하며 학습하였는데, 그가 병들까 염려한 승려들이 몰래 불을 꺼버렸지만 글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김륵이 남긴 저술들 가운데에는 그의 학문 세계를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경학(經學)과 성리설(性理說) 관련 자료가 거의 없다. 이는 그가 평소에 저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성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그가 생애의 대부분을 관직에 종사하며 퇴계의 문묘종사를 청원하고, 영남 출신 관료들의 모임을 조직하는 등 중앙 정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퇴계 학파의 정치적·사상적 위상을 제고하고 확립하는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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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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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선생문집』이 편찬되기까지 |
김륵의 생애와 사상을 담고 있는 유일한 저술인 『백암선생문집』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50여 년 만인 1772년(영조 48) 6대손 김위(金㙔)의 주도 아래 편찬·간행되었다. 김륵은 생전에 적지 않은 분량의 저술을 남겼는데, 임진왜란과 집안의 화재를 거치면서 상당 부분이 분실되었다고 한다. 이에 김위가 조카 김약련(金若鍊)과 김세련(金世鍊)의 도움을 받아 집안에 남아 있던 유고(遺稿)를 수습하여 6권으로 편집하였다. 김륵의 외손 김휴(金烋)와 종손(從孫) 김선(金鍌)이 편찬하였던 연보 및 부록 등을 덧붙여 4책으로 정리하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교정을 거쳐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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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처를 유람하며 시를 남기다 |
본집 6권과 보유(補遺)·연보(年譜)·부록(附錄) 등 도합 4책으로 이루어진 『백암선생문집』의 체제를 살펴보면, 우선 앞머리에는 당시 퇴계 학파의 거장이던 이상정이 본서의 편찬 경위에 대하여 약술한 서문 및 본서의 내용을 정리한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권1에는 「차귀거래사(次歸去來辭)」 등 사(辭) 1편, 「지수부(止水賦)」 등 부(賦) 1편과 「와룡암행(臥龍菴行)」 등 시(詩) 98제가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으며, 권2에는 「차황경명황강류운(次黃景明黃江留韻)」을 비롯한 94제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 시 가운데에는 1577년(선조 10)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오던 길에 단양(丹陽)을 유람하며 지은 「서정록(西征錄)」, 같은 해 대마도(對馬島) 왜상(倭商)의 호송관(護送官)으로 동래(東萊)에 다녀올 때 남긴 「남정록(南征錄)」, 1579년(선조 12) 단양과 청풍(淸風) 일대를 유람하며 남긴 「서정록(西征錄)」, 이듬해 휴가를 얻어 성묘를 다녀오던 길에 남긴 남「환록(南還錄)」, 1602년(선조 35) 동지사로 사행하였을 때 지은 「조천록(朝天錄)」, 북한산을 둘러보고 남긴 「화산록(華山錄)」, 강릉 부사로 좌천되었을 때 지은 「임영록(臨瀛錄)」 등 기행시가 많은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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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된 마음으로 시무(時務)를 논하다 |
문집의 권3에는 지제교(知製敎)로 재직하며 임금을 대신하여 지은 교서(敎書) 2편과 시국(時局)에 대한 진단을 담은 소(疏) 8편 및 차(箚) 5편, 그리고 권4에는 차(箚) 4편과 계사(啓辭) 3편, 권5에는 장계(狀啓) 10편과 정문(呈文) 7편 등, 김륵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관직에 나아가 나라를 이끌어가는 방향에 관한 의견을 개진하였던 글들이 실려 있다.
그 가운데 영월 군수 시절 거듭된 천재지변으로 고초를 겪는 백성들을 구제할 구체적 방도에 대하여 아뢴 「영월군진폐소(寧越郡陳弊疏)」, 1583년(선조 16) 동서분당(東西分黨)에 대한 시비를 명확히 할 것을 청한 「옥당청명변시비차(玉堂請明辨是非箚)」, 임진왜란의 와중에 화의(和議)를 배격하고 의리와 기강의 확립을 강조한 「사헌부진시무차(司憲府陳時務箚)」, 1610년(광해군 2)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彥迪)·이황(李滉) 등 5현의 문묘종사를 청원한 「청본조오현종사문묘계(請本朝五賢從祀文廟啓)」, 임진왜란 당시 경상 도안집사로 재직하며 전황(戰況)에 대한 의견을 보고한 「조진경상도군정적세장계(條陳慶尙道軍情賊勢狀啓)」, 중국에 갔을 때 왜란의 경과에 대한 명나라 병부 상서(兵部尙書) 소대형(蕭大亨)의 질문에 답하였던 「답병부문목(答兵部問目)」 등은 16세기 중반 조정의 동향 및 국제 정세에 대한 김륵의 인식을 담고 있는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권6에는 김륵의 개인적인 저술들, 즉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書) 10편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발발 당시 지은 초모문(招募文)과 서(序)·전(箋)·상량문(上梁文)·제문(祭文) 등 총 19편의 잡저(雜著)가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수록된 보유(補遺) 중에는 시 4제·서(書) 1편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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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륵의 공적에 대한 기록들 |
후인들이 김륵의 생애를 정리하고 그가 남긴 공적을 기린 글들을 모아 편찬한 부록은 김휴 등이 편찬한 연보 및 부록 상·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부록 상편에는 1624년(인조 2) 국왕이 내린 사제문(賜祭文)을 비롯하여, 여러 서원의 유생과 문인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한 제문 6편, 정구(鄭逑)·이호민(李好閔)·이항복(李恒福) 등이 찬술한 만사(輓詞) 33편, 김영조(金榮祖)가 지은 향현사(鄕賢祠)의 봉안문(奉安文)과 상향축문(常享祝文) 등 42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 하편에는 권해(權瑎)와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 2편, 권두인(權斗寅)과 이광정(李光庭)이 지은 묘지명 2편, 김륵의 생애와 관련된 일화들을 모아 놓은 기문록(記聞錄), 「도내유생소(道內儒生疏)」, 「증행편(贈行篇)」, 「의김모사제강릉부사전(擬金某謝除江陵府使箋)」 등 벗들이 그에게 지어준 3편의 글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권말(卷末)에는 1772년 김위가 본서의 편찬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경과에 대하여 서술한 발문(跋文)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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