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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시평 제258호 (2011년 9월 29일)
일제강점기 징용 피해자에 대한 면담조사
최영호 (영산대학교)
필자는 지난 9월 25일부터 27일까지 인터뷰 조사를 실시했다. 해방을 전후하여 일본에서 한반도로 귀환하여 현재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노인 가운데 할아버지 7명, 할머니 2명을 인터뷰 대상으로 했다. 총 9명 가운데 3명은 해방 전에 한반도로 귀환했고 나머지는 해방 직후에 귀환했다. 또한 이들 중 할아버지 3명은 야마구치현(山口縣)으로 징용을 당해 강제 연행되었으며 나머지 6명은 일본에서 태어나 생활하다가 가족과 함께 일본을 떠난 사람들이다. 인터뷰 조사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올해 7월 하순 오사카시립대학 도시연구소에 근무하는 미야시타 료코 (宮下良子) 연구원이 공동 조사를 제안해 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부산 거주 노인의 귀환 전 일본에서의 생활과 귀환 후 한국에서의 생활에 관한 구술 자료를 녹취하기로 했다. 시모노세키 코리안 타운에서 실시한 인터뷰 조사와 이번에 부산에서 실시한 인터뷰 조사를 정리하여 올해 말에 논문화 하겠다고 했다.
한편 필자는 노인들이 식민지 지배와 귀환 과정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하여 조사하기로 했다. 필자는 지난 2007년에 1~2년 전에 출간된 구술 기록집 내용을 분석하여 귀환자들의 기억을 기록한 일이 있다. (『부관연락선과 부산』, 162-171면) 그리고 올해 6월에도 정충해(鄭忠海)와 장정수(張錠壽)의 회고 기록 자료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해방직후 부산에 대한 귀환자들의 기억을 소개한 일이 있다. (『한일민족문제학회』20집, 97-123면) 이번 인터뷰 조사는 기존 자료의 내용을 직접 확인하는데 의의를 두고 진행했다. 지난달 8월부터 인터뷰 대상 노인을 선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징용되었다가 귀환한 사람에 대해서는 서울의 강제동원피해자조사지원 관련 위원회에 의뢰하여 부산 거주 생존자 가운데 야마구치현에 징용된 사람을 섭외했다. 굳이 야마구치현 피징용자를 대상자로 선정한 것은 미야시타 연구원이 시모노세키에 주목하고 있는데다가 필자가 일본의 귀환항 가운데서 야마구치현에서 귀환하는 사람들이 거의 이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센자키(仙崎) 항구를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최종적으로 징용 피해자 3명에게 연락이 닿아 인터뷰가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 출생 귀환자에 대해서는 부산광역시 남구의 NPO 단체 ‘실버 일본어통번역 봉사회’를 찾아가 6명을 확정했다. 봉사회에서는 80세 넘은 노인들이 매주 화요일 오후에 모여 일본어 학습을 하고 있고 일본어 통번역에 관한 의뢰가 들어오는 대로 자원봉사활동에 나서고 있다. 고맙게도 위원회와 봉사회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기에 이번 면담 조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징용 피해자 3명에 대해 실시한 조사결과만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 3명에 대해서는 매일 한 명씩 면담을 했다. 각각 1시간 반에서 3시간에 걸친 인터뷰였다. 개인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하여 할아버지의 이름과 얼굴은 밝히지 않기로 한다.
조사일 첫날 오전에 자택에서 만난 정(鄭) 할아버지는 1926년 생으로 1943년(18살)에 전남 광양에서 영장도 없이 강제 차출되어 우베(宇部) 소다공장으로 끌려갔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일이 힘들어 일시 도망쳐 다른 작업장으로 도망쳤다가 헌병대에 붙잡혀 다시 소다공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동포 노무자나 일본인 인부 등과 약간의 접촉은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 한 달 쯤 되어 작업장 관리인의 안내로 센자키(仙崎)에 가서 며칠을 노숙하며 기다리다가 대형 귀환선 고안마루(興安丸)을 타고 부산으로 귀환했다고 한다. 당시 센자키는 한반도에 귀환하려는 사람들로 붐볐고 엄청 지저분했으며 숙소가 없어 모두 노숙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억했다. 오후에 상륙한 부산항 설비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억이 없고 다만 귀환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일본에 비해서 형편 없이 더럽고 빈곤했다고 했다. 귀환 후 계속되는 사회적 혼란과 빈곤으로 일본에서 귀환한 것을 후회했었다고 회상했다. 둘째날 오후에 만나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눈 문(文) 할아버지는 1927년 생으로 1944년(18살)에 경남 지역에서 마을 직원에게 영장도 없이 강제 차출되어 화물선에 실려 아사군(厚狭郡) 후나기(船木)의 탄광에 끌려갔다. 그는 탄광 안에서도 가장 힘든 채탄 작업을 해야 했다. 거의 매일 깊은 지하 갱도에 들어가 숨 막히는 상황에서 작업을 했으며 밖에 있을 때는 군사교육과 충성교육을 받았다. 괴로운 채탄 작업보다는 차라리 감옥 생활이 나을 것으로 생각하여 검도 교육 시간에 일본인을 실컷 두드려 패고 영창에 들어간 일이 있다. 한번 일본인 경비원 집에 초대받아 방문하는 등 다소의 자유로움이 허용된 일이 있다고 했으나 전반적으로 패전 사실을 모를 정도로 엄격하게 통제된 환경에서 지냈다. 그는 인터뷰 내내 “만약 일본하고 전쟁이라도 한다면 지원하여 싸우겠다는 생각이었다”고 하며 해방 직후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적대 감정을 회고했다. 해방되자마자 작업장 관리자의 인솔로 센자키 항구에 도착했고 별로 지체하지 않고 귀환선을 탔다. 센자키에는 귀환 순번을 기다리는 동포들이 많았고 부산항은 무질서와 빈곤이 격심했다. 오후에 부산항에 내리자 귀환동포 환영하는 소리가 떠들썩한 가운데 귀환원호를 위장한 사람들에게 속아서 가지고 온 짐들을 모두 도난당했다. 셋째날 오후에 만나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나눈 정(鄭) 할아버지는 1929년 생으로 1944년(16살) 9월에 전북 남원의 읍사무소 직원들이 제시한 징용영장을 받고 곧 바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들은 남원에서 약 100명 정도를 집단으로 차출한 가운데 전쟁 말기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소년들까지 대거 동원했다고 한다. 그는 징용된 곳으로 야마구치현의 남서부에 위치한 오노다시(小野田市)의 해저탄광으로 기억하고 있어, 모토야마(本山) 해저탄광에서 작업했던 것으로 보인다. 체격이 작기 때문에 깊고 좁은 갱도에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고 따라서 탄광에서 가장 힘든 채탄 작업을 담당했다. 1일 3교대로 일을 했다고 기억하며, 미군 포로들도 노무자로 동원되었으나 체격이 커서 갱도에는 들어가지 못하자 전기스위치 관리와 같은 일을 담당하게 했다고 한다. 감시자 가운데 악독한 동포가 있었고 작업장 식당에도 동포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격한 통제로 일본인이나 동포와 자유롭게 교류하거나 대화하는 일이 전혀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징용 피해상황을 회고하면서 자주 눈물을 글썽이고 “치가 떨린다”고 말했다. 패전 직전 7월에 잦은 공습으로 관리인들의 관리가 허술해지자 몇 사람이 함께 작업장을 도망쳐 나와 시모노세키항으로 걸어갔다. 고향에서 가지고 간 메리야스를 팔아 마련한 약간의 돈을 밀선을 구하는데 사용했다. 바다를 건너는 도중에 태풍을 만나 쓰시마(對馬)에 머물렀다가 거기서 전남 고흥의 어느 섬으로 향했다. 섬에서 육지(벌교)까지는 작은 배에 타고 노를 저어 이동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나눈 3명의 징용 피해자들은 각각 작업장과 작업 환경이 다르기는 했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전쟁 말기의 징용은 감옥생활이었다는 것이다. 3명 모두 “식민지 백성은 당시 일본인의 노예였다”고 진술했으며 자신들은 징용당하여 ‘영어(囹圄)의 몸’으로 작업장에 배치되었다고 했다. 따라서 일본이 패전하거나 패전을 앞두고 징용 작업에서 해방된 것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한없는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귀환한 후 체험하게 되는 한반도의 경제사정은 일본에 비해 형편없이 열악했으며 해방 후 한반도에서의 생활은 징용과는 다른 또 다른 차원의 엄청난 시련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6.25 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고통은 이구동성으로 악몽이라고 말했다. 3명 모두 징용 당하면서 임금을 전혀 받은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임금을 받을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고 다만 죽지 않고 살아남을 생각만 했다고 증언했다. 전쟁 노동력으로 자신들을 끌고 간 일본정부와 기업에 대해서는 모두 증오감을 나타냈고,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자금을 받은 한국정부가 오늘날 징용 피해 생존자에게 매년 80만원씩 의료비 명목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지극히 미흡한 일이라고 하며 공통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 [한일시평] 지난 호 자료는 한일민족문제학회 홈페이지 www.kjnation.org<한일관계시평> 또는 최영호 홈페이지 www.freechal.com/choiygho<한일시평>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