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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墨)은 다 다릅니다
[100년 이상 된 먹으로만 그림… 문봉선 동양화엔 천지만물이 생생하다] 중국·일본 옛 먹 경매서 구해 - 심오하고, 짙고… 느낌 다 달라 먹빛은 우주 창조때의 빛깔, 매일 먹 갈며 마음 수양하죠… 묵란 100여점 14일부터 전시
"먹(墨)이라고 해서 다 같은 먹이 아닙니다. 어떤 먹은 다른 먹보다 더 심오하고 아름다운 빛깔을 내지요. 먹빛 하나로 삼라만상(森羅萬象)을 표현해야 하는 동양화가 입장에선, 어떤 먹을 쓰느냐가 그림의 격(格)을 좌우합니다." 동양화가 문봉선(51) 홍익대 교수가 옛 장인(匠人)이 만든 100년 이상 된 먹만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이유다.
6일 오후 문 교수의 서울 동교동 작업실 '묵운헌(墨耘軒)'. 오동나무 상자가 열리자 가지런히 누워있던 먹이 검푸른 빛을 발했다. 가로 3㎝, 세로 12㎝, 두께 1㎝가량의 이 먹은 8개들이 한 세트가 우리 돈으로 50만원가량. 중국 안후이성(安徽省)의 장인이 1800년대 후반 만든 것으로 베이징에서 열린 경매에서 샀다.
"먹은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과 아교를 섞어서 만듭니다. 좋은 소나무를 쓸수록 품질이 좋아지죠."
황실에 소나무를 진상했던 안후이성에서 제작한 먹은 그래서 최상급 먹으로 꼽힌다. 또 다른 상자에는 타원형, 원형, 구름 모양을 내고 금박으로 장식한 화려한 먹이 들어 있었다. 청나라 건륭(乾隆) 50년(1785년) 황실용으로 만들어진 것. 먹빛이 맑아 매화를 그릴 때 주로 쓴다. 일본의 유서 깊은 제조회사 고매원(古梅園) 먹도 안후이성 것과 함께 최상급으로 꼽힌다. 도쿄의 경매에서 어렵게 구한 이 먹을 문 교수는 산이나 바다 같은 검은 풍경을 그릴 때 쓴다. 다른 것보다 먹빛이 짙기 때문.
문봉선 교수는“‘석묵여금’이라는 옛말이 있다. 먹 아끼기를 금처럼 하라는 뜻이다. 귀한 먹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경지가 동양화가의 이상이다”고 했다. /이명원 기자
일반인들 생각과는 달리 옛날 먹은 작을수록 비싸다. 작을수록 입자가 고와 미세한 농담(濃淡)까지 표현할 수 있기 때문. 문 교수는 "그림의 성패는 담묵(淡墨)을 얼마나 잘 쓰느냐에 달렸다. 담묵의 은근함은 숙련된 화가만이 낼 수 있는 빛깔이다. 좋은 먹은 10단계 이상의 농담을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
좋은 벼루도 당연히 중요하다. 문 교수는 인사동에서 구한 500년 된 벼루와 중국 광둥성(廣東省) 장인이 만든 벼루 등을 함께 쓴다. "좋은 벼루는 물을 빨아들이지 않아서 시간이 오래 지나도 먹물이 줄지 않는다"는 것이 문 교수의 설명.
먹 갈 때 쓰는 물은 생수가 가장 좋지만, 겨울 산에서 그림을 그릴 때는 소주나 보드카 같은 독주(毒酒)를 쓰기도 한다. 술의 알코올 성분 덕에 영하 날씨에서도 먹물이 좀처럼 얼지 않기 때문이다.
문 교수는 대학생 때부터 썼던 먹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 노동량을 가늠하는 지표다. "노력 않고 그린 그림을 보고선 '먹 한 자루도 채 못 쓰고 그걸 그렸느냐'고들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그림을 그려도 1년에 먹 하나 채 쓰기 어렵습니다. 먹을 가는 일은 그래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문 교수는 "사람이 먹을 가는 것이 아니라 먹이 사람을 간다"는 말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고 있다. 그는 매일 먹을 가는 일을 반복하면서 마음을 다듬으면 더 좋은 그림이 나온다고 믿는다. 화가마다 먹빛이 다르고, 그림이 깊어질수록 먹빛도 깊어진다고 생각한다. "동양 전통에서는 검정(玄)을 오방색(五方色)을 뛰어넘은 모든 빛깔의 근원으로 여깁니다. 먹빛이란 우주가 창조될 때의 혼돈의 빛깔이지요. 그 빛깔로 기운생동(氣韻生動·천지 만물이 지니는 생생한 느낌을 표현하는 것)을 구현하는 것이 화가의 책무입니다."
그의 묵란(墨蘭) 100여점이 14일부터 내달 1일까지 서울 관훈동 공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 '청향자원(淸香自遠)'에 나온다. 청 건륭제 때 먹과 강희제(康熙帝) 때 만든 주묵(朱墨) 등 먹 다섯 자루를 써서 그린 2010~2011년 작품이다. 매화(2010), 해송(海松·2009), 매란국죽(梅蘭菊竹·2007), 바람(2002) 등 다양한 소재를 수묵으로 표현해 온 문 교수는 이번 전시에서 사군자(四君子)의 기초인 묵란의 획(劃)으로 돌아갔다. / 조선.
문봉선. 蘭, 46×70cm, 지본수묵, 2011. 공아트스페이스 제공
문봉선의묵란전_ 청향자원(?香自遠:맑은 향기가 스스로 멀리간다) 공아트스페이스 전관 1/2/3/4F 2012.3.14(수)? 4.1(일)
蘭 191x132cm 지본수묵 2012
蘭性堪同隱者心 난초의 성품은 은자의 마음과 같아 自榮自萎白雲深 흰 구름 깊은 곳에서 홀로 피고지네 春風歲歲生空谷 봄바람에 해마다 빈 골짜기에 불면 留得淸香入素琴 맑은 향기 거문고 손으로 불어온다네 淸汪士愼詩 오는 3월 14일부터 문봉선 개인전이 공아트스페이스 1~4층 전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사군자의 첫 번째로 매화를 선보이며 수많은 관람객 속에 성공한 전시를 열었던 동양화가 문봉선의 두 번째 개인전으로 난(蘭)을 한 전시이다. 지난 35년간의 난에 대한 연구의 결과물로 이루어진 이번 전시는 총 100여 점의 작품이 공아트스페이스 전관을 가득 메울 예정이다.
기교보다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 선비의 그림이다. 때문에 예로부터 난은 문인화가들의 단골메뉴였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와 흥선대원군으로 잘 알려진 석파 이하응(石坡 李昰應)이 그 대표적인 예로 이하응의 호인 석파는 ‘돌 사이에 피어난 난’을 잘쳐 생긴 호이기도 하다. 일찍이 추사는 바른 마음과 세속을 떠난 마음으로 난을 대하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난치기가 어렵다”라는 말을 한바 있다. 이것은 난이란 ‘그리는’것과는 다른 차원의 대상임을 가장 잘알려 주는 대목이다. 왜냐하면난의 ‘잎’은 예로부터 그린이의 정신과 성품을 담아 일필휘지(一筆揮之)으로 그려내기 때문에 선대의 문인화가들도 붓을 들기 전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을 수양하여 정좌하고 대하였으며, 숙련된 화가들에게도 자신의 인품을 속속들이 보여주는‘난’ 이라는 대상의 특징적인 성격으로 인해 붓을 잡기 주저함을 주는 대상이다. 이렇듯 ‘난’이란 동양화가에게는 마음에 무거운 돌을 얹어 놓듯 어려운 주제기이며 들숨과 날숨의 호흡의 조절과 난 잎을 쳐내는 한 획에 모든 정신을 담아야 하는 사군자 중 힘 조절에 있어서 고난위도의 숙련된 붓질이 필요한 대상이다.
蘭 35x46cm 지본수묵 2011
蘭 39x55cm 견에 수묵 2011 >
작가는 전통적인 화법을 구사하기도 하지만 과감히 새로운 화법을 이번 전시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무려 4미터의 폭에 돌과 난으로 구성된 이 대형 작품은 화면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피사체인 돌안에 초서를 빼곡히 써넣어 돌의 질감을 대신하기도 하고 초서로 가득 매운 사이에 난을 피워 글씨일까 혹은 그림일까?라는 즐거운 상상을 돋우기도 한다. 일명 돌 사이에서 피어난 난인 석파란(石坡蘭)을문봉선 작가의 작품에서는 현대적인 공간구성을 가진 대형 작품으로 만날 수 있는데, 7폭의 연작 안에 커다란 여백을 두고 펼쳐진 돌과 난의 역동적인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日日臨池把墨硏 날로 먹을 갈아 붓을 쓰지만 何曾粉黛去?姸 어찌 안료 써서 고움을 다투랴 要知畵法通書法 화법이 서법과 통함을 알 뿐이니 蘭竹如同草?然 난초와 대나무는 초서 예서와 같다오 鄭板橋詩 ? 한국의 난에 매료되다
39x205cm 지본수묵2011
길쭉하게 뻗은 시원한 잎, 수줍은 듯 고개 숙여 피어 있는 꽃은 전형적인 난의 특징이다. 대학을 입학하기 전부터 난치기를 즐겨 했던 작가는 학업을 통해 중국의 난과 한국의 난이 다르다는 걸 체감하고 한국의 난을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제주가 고향인 작가는 제주의 한란과 안면도 송림의 야생춘란 군락지를 찾아가 생물학적 특징부터 면밀히 분석하고 사실적인 탐구를 연마하여 드디어 오롯이 작가 문봉선만의 정신과 마음의 향을 물씬 먹은 난을 피워냈다. 뿐만 아니라 공간의 조율에 있어서 작가는 비움과 채움의 미학을 한껏 살려 무한한 공간에 묵직함과 가득함 그리고 ‘난’ 중심으로 펼쳐지는 상상력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종이뿐만 아니라 ‘견’과 ‘모시’에 그려 낸 묵란들은 먹과 천이 가진 고유의 물성으로 인해 종이 위에 그려 진 묵란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먹 맛’을 만나보게 될 것이다. 또한 먹의 깊은 맛을 우려내는 동양화의 명맥이 점점 희미해가는 현재의 미술계의 상황을 고려 해봤을 때 문봉선의 먹에 대한 고집스러운 철학은 앞으로 동양화가로서 미술계에 새로운 한걸음을 땔 젊은 작가들에게 한줄기 일깨움과 용기를 불어 넣어줄 수 있는 뜻 깊은 전시가 되지 않을까 한다. 이번 공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는 문봉선의 묵란전은 오는 3월 14일부터 4월 1일까지 만나볼 수 있다. (끝)
▶ 작가노트 난초 잎을 손질하며 가을비가 마당 한 구석에 모아 둔 난분을 촉촉이 적신다. 묵란을 공부한지도 올해로 35년, 난의 뿌리처럼 굳세고 간단없는 세월이다. 대학과 사회교육원 강의 덕분에 행복한 교학 상장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난은 매화와 더불어 동양의 정신성을 대표하는 식물이다. 『시경』에서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소인묵객들이 좋아했던 화초 중에 하나이다. 오늘날 난초는 집집마다 한두 분씩 없는 집이 없을 만큼 대중적이고 친근한 꽃이 되었다. 초엽 식물로 향기는 꽃 중에서 제일로 친다. 일찍이 소동파는 난을 여인의 아름다움과 절정에 비유하여 높이 칭송했다. 깊은 골짜기 가시덤불 속에서도 그윽한 향기를 스스로 발하기 때문에 군자의 모습에 비유한다. 春蘭如美人 춘란은 미인과 같아 不採羞自獻 캐지 않아도 부끄러이 스스로 바치네 時聞風露香 때때로 바람과 이슬의 향기 전해오지만 蓬艾深不見 쑥대가 깊어 보이지 않네
묵란은 먹의 농담만을 이용하여 그리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특별한 기법이나 요령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한 치의 가필도 허락지 않는 고도한 매력이 숨겨져 있다. 제주도가 고향인 나는 일찍이 난초를 접할 수 있었다. 집집마다 봄이 되면 화분에 심은 춘란을 보았고, 가을이 깊어갈 즈음엔 서실 한 구석에 피어있는 한란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묵란과의 인연은 자연스럽게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과 『정판교화집鄭板橋畵傳』으로옮아갔다. 스승 없이 옛 화보나 고화를 마냥 좋아서 흉내내는 수준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루는 미술실을 청소하고 가뿐한 마음에 홀로 앉아 묵란을 치고 있을 때였다. 대학에 다니는 선배 한 분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장난삼아 신문지를 크게 펴고는 굵은 선으로 신문에 꽉 차게 난을 그리는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아! 나도 저렇게 그려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책에 인쇄된 크기로 흉내만 내는 것은 별 도움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찰나였다. 이때부터 실물 크기의 난 보다 크게 긋는 방법을 익히게 되면서 조금씩 필력이 붙었다. 이 기억은 비록 하찮은 순간의 일이지만 지금까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있다. 화보를 어느 정도 익혀갈 무렵이었다. 나에게는 지울 수 없는 한 가지 의구심이 있었으니 난초의 잎은 실물과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꽃은 내가 본 모양과 너무도 달랐다는 점이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중국과 제주 춘란의 꽃 모양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대학시절에도 묵란 치는 것을 한 순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박물관 등에서 추사秋史김정희金正喜, 우봉又峯조희룡趙熙龍, 석파石坡이하응李昰應, 운미芸楣민영익閔泳翊 등의 작품을 친견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배웠던 것과 비교하는 눈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추사의 ‘난맹첩蘭盟帖’을 보는 순간 정섭鄭燮의 묵란과 너무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추사의 난도 나와 근원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조희룡 역시 스승인 추사나 정판교의 묵란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민영익의 묵란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1989년 가을, 간송미술관에서의 일이다. 최완수 관장님의 배려로 민영익의 작품을 미술관 바닥에서 임모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난 잎이나 꽃을 그리는 필법이 기존의 묵란법과 사뭇 달랐다. 화면 밖으로 내 뿜는 기운과 고개 숙인 꽃봉오리에서는 비애감을 동시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묵란화에 대한 애정과 안목을 넓힐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야생에서 춘란을 본 것은 지인들과 함께했던 안면도 여행에서였다. 안면도는 송림이 유명하지만 춘란의 군락지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춘란을 본 뒤로는 해마다 잊지 않고 달려가서 야생 춘란을 화폭에 담고 있다. 그때 가지고 간 화첩에는 아래와 같이 적어 두었다. “대나무처럼 곧은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고, 그 밑 가시덤불 속에 군락을 이루어 많게는 한 촉에 10개 이상의 꽃이 띄엄띄엄 다소곳이 고개 숙여 피어있다. 어떤 꽃은 잎이 엇는 데도 불구하고 꽃대만 솟아있고, 꽃은 연녹색을 띄며 대부분 서북쪽을 향해 피어있다. 잎은 강하고 짧은데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활처럼 유연한 S자 곡선을 하고 있다. 꽃에 코를 대어 보니 향기는 없고 혀에 붉은 점이 두세 개 찍혀있다.” 향기가 좋은 제주 한란은 춘란과 달리 입동 무렵에 핀다. 천연기념물로 서귀포시 돈네코 해발 400m정도의 양지녘에 자생한다. 양력 10월 30일 전후로 개화하는데 한 개의 꽃대에 많게는 열 개의 꽃이 연녹색과 자주색 두 종류로 핀다. 일반적으로 ‘혜蕙’는 잎보다 꽃대가 낮게 올라오지만 한란은 잎 위로 직선에 가깝게 곧게 올라오는 것이 특징이다. 마치 학의 머리 모양처럼 꽃봉오리가 맺히고, 만개한 꽃은 학이 날개 짓 하는 듯 고귀한 인상을 풍긴다. 잎 역시 다른 난에 비해 강하고 늘씬하게 하늘을 향해 뻗어나며 유연한 곡선미가 특징이다. 향기가 맑아 ‘난중의 난’으로 친다. 고교시절 고故 소암素菴 현중화玄中和 선생님의 서실에 다닐 때 서실 한 구석에 핀 한란을 자주 보았다. 어린 눈에도 제주 한란의 향기와 기품은 보통 난과는 다른 무언가 특별함으로 느껴졌었다. 훗날 고향에 있는 한 지인의 난원蘭園에서 한란의 향기를 맡으며 사생을 통해 그 자태를 화폭에 담기도 했다. 난은 일반적으로 봄에 피는 ‘일경일화一莖一花’의 춘란을 ‘난蘭’이라 부르고, 여름 가을에 ‘일경구화一莖九花’는 ‘혜蕙’라 부른다. 묵란도 이 두 가지 형태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옛 그림 속의 ‘일경일화’는 중국 강남지방에 자생하는 춘란으로 잎이 가늘고 길며 꽃은 연분홍빛을 띠며 향기가 좋다. 한 개의 꽃대에 여러 개의 꽃을 피우는 ‘일경구화’ 즉 ‘혜蕙’는 중국의 복건성, 절강성, 강소성 등에서 자생하는 옥화, 건란, 철골소심 등으로 주로 여름에 피는 꽃이다.
묵란화는사의성을 강조하지만 역시 사실성을 떠날 수는 없다. 중국의 역대 묵란화를 살펴보면 원조라 할 수 있는 정소남鄭所南 그리고 원대 조맹부趙孟?, 송대조맹견趙孟堅, 명대문징명文徵明 등이 그린 묵란은 전형적인 중국 춘란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혜蕙’는 명대 이후부터 그리기 시작했는데 가장 번성한 시기는 청대이다. 『개자원화전』 등의 화보가 편찬되면서 묵란화가 널리 성행했다. 특히 ‘양주팔괴揚州八怪’중 정섭鄭燮, 금농金農, 이선李?, 이방응李方膺의 등장으로 정점에 달한다. 또 이러한 열풍은 조선 문인들에게도 전해져 큰 유행을 낳았다. 18세기 초 『개자원화전』이 유입되어 심사정沈師正, 강세황姜世晃, 이인상李麟祥, 임희지林熙之 드에 의해 남종 문인화풍의 제자들에게 정섭의 묵란법과 그의 문집 『정판교집』이 소개되자 사의성이 짙은 묵란화가 유행했다. 근대의 민영익의 묵란은 기존의 방법과 달랐다. 자신의 망명지였던 상해에서 자생하는 중국의 난과 혜를 기초로 한 새로운 형태였다. 사의성이 짙게 느껴진 것은 전 세대의 묵란법에서 벗어나 잎을 단숨에 쭉쭉 길게 그리고 꽃이나 꽃봉오리는 사실에 가깝게 표현하고 있다. 묵란의 잎은 사실이든 사의적이든 작가마다 다 다르게 표현한다. 자세히 들어다 보면 그린이의 인생 역정과 너무나 닮아있음을 알 수 있다. 유배 생활의 고독과 울분, 세도가의 흥망성쇠, 격변 속의 정객의 기개, 풍류객의 멋 등이 잘 드러나 있어 작가의 또 다른 자화상인 셈이다.
중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2004녀 어느 봄날이었다. 마당 한 구석에 피어난 춘란을 보고 나만의 묵란을 찾으려 동분서주했던 지난 시절을 더듬었다. 더 이상 지체할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섰다. 옛 그림이나 이론에서 벗어나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난을 기초로 내 나름의 묵란을 그리고자 다짐했다. 마음은 앞섰지만 손이 따라오지 않았다. 갈아 놓았던 먹이 말라버린 날의 연속이었다. 20여 년간 칼날 같은 사실과 사의의 경계에 서서 줄다리기를 했다. 잎이 익숙해지면 꽃이 생기 있게 그리기가 어려웠고 또 꽃이 능숙해지면 향기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로 수없는 갈등의 시간을 보냈다.
추사도 묵란에서 가장 얻기 어려운 것을 ‘격格’이라고 했다. 또한 ‘난초를 그릴 때에는 자기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데서 시작해야 한다. 잎 하나 꽃술 하나라도 안으로 마음을 살펴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게 된 후에 남에게 보여야 한다.’하여 자기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전심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석파의 난권에 쓰다[題石坡蘭卷]’에서는 ‘아무리 구천 구백 구십 구분까지 이르러 갔다 해도 그 나머지 일분이 가장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려우며 구천 구백 구십 구분은 거의 다 가능하겠지만 이 일분은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며 역시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라고 해서 노력도 중요하지만 ‘천분天分’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묵란은 매화, 대나무와 달리 기법이 단순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화제를 써 넣어 빈 공간을 장식하였다. 자작시를 쓸 형편은 못되어 대부분 역대 명가의 화론이나 시를 초서로 옮겼다. 그림이 됐다 싶으면 글씨가 어울리지 않아서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루에 수십 장을 쳤지만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요즘 들어 사군자를 철지난 시절의 전통적인 소재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각고의 노력으로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묵란이야말로 용필·용묵의 탄탄한 기초 위에서 문자향은 물론이거니와 한 치의 망설임이나 가필이 허용되지 않는 일수불퇴하필의 준엄함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기운생동은 여전한 나의 관심사다. 기운 없는 난초는 잡초나 다를 바 없다. 요즘도 틈틈이 묵란을 치지만 ‘난蘭’이라는 생각이 든다. 묵란은 내 그림에 있어서 첫 걸음이자 전공의 방향을 잡아준 튼튼한 기초이자 버팀목이다. 묵란의 격조와 단순미 조형성 등은 앞으로도 연구할 만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사생 여행 중에 어느 절 회벽에서 읽었던 희미한 글귀 한 구절이 떠오른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한 물로 화분을 적시며 난초 잎을 손질할 줄 아는 이라면 굳이 화가가 아니라도 좋다“ 2012년 봄날에 문봉선
/ Art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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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지식충전
좋은 글 올려주셔서 정말 잘 앍었습니다,^^
전시회에 꼭 가보고 싶어요 ^^
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