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에서
파울 첼란
이방 여인의 눈에다 이렇게 말하라. 물이 있으라!
이방 여인의 눈 속에 네가 아는 물속의 여인들을 찾으라.
룻! 노에미! 미르얌! 그녀들을 물 밖으로 불러내라.
네가 이방 여인 곁에 누울 때 그녀들을 치장해 주라.
이방 여인의 구름머리카락으로 그녀들을 치장해 주라.
룻, 미르얌, 노에미에게 이렇게 말하라.
보라, 내가 이방 여인과 동침하노라!
네 곁의 이방 여인을 가장 아름답게 치장해 주라.
룻, 미르암, 노에미로 인한 고통으로 그녀를 치장해 주라.
이방 여인에게 말하라.
보라, 내가 그녀들과 동침했노라고!
* 동침: 마지막 문장에 이르기까지 아홉 문장이 모두 마치 십계명처럼 나란히 '-하라'로 시작하고 있다. 룻, 미르암, 노에미는
유대 여인의 전형적인 이름들이다. '동침'이라는 가장 밀착된 인관관계에 동족의 기억이 스며들어 있다.
*이방 여인: 첼란은 1948년 '정월 스무날' 빈에서 잉에보르크 바하만을 만났다. 독일의 대표적인 현대 시인인 두 사람은 오랫동안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를 유지했는데, 최근 연구와 시간집 출간을 통해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음이
밝혀졌다. 첼란의 시 <코로나>, <애급에서>와 바하만의 소설 <말리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 전영애
코로나
가을이 내 손에서 이파리를 받아먹는다. 가을과 나는 친구.
우리는 시간을 호두에서 까 내어 걸음마를 가르친다.
시간은 껍질 속으로 되돌아가기에.
거울 속은 일요일이고,
꿈속에서는 잠을 자고,
입은 진실을 이야기한다.
내 눈은 연인의 음부로 내려간다.
우리는 서로 바라본다.
우리는 서로 어두운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서로 양귀비와 기억처럼 사랑한다.
우리는 잠을 잔다, 조개에 담긴 포도주처럼,
달의 핏빛 빛줄기에 잠긴 바다처럼.
우리는 서로 껴안은 채 창가에 서 있고, 사람들은 길에서 우리를 본다.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때가 되었다. 돌이 꽃피어 줄 때,
그침 없는 불안으로 가슴이 뛸 때가.
때가 되었다, 때가 될 때가.
때가 되었다.
*코로나: 태앙이 완전히 가려졌을 때 그 주위로 먼저 나오는 빛의 환(環). 한순간 태양 빛이 꺼지듯
시간의 어두운 원점에 선 연인들의 모습을 그린 연가이다.
무적(霧笛) 속으로
감춰진 거울 속의 입,
자부심의 기둥 앞에 꿇은 무릎,
창살을 거머쥔 손이여.
너희에게 어둠이 다다르거든,
내 이름을 불러라,
나를 내 이름 앞으로 끌어가라.
화인(火印)
더는 잠들지 못했다. 우울의 시계 장치 속에 누워 있었기에, 우리,
시계바늘은 채찍처럼 휘었고,
도로 다시 튕겨져 피 맺히도록 시간을 후려쳤고,
너는 짙어 가는 어스름을 이야기했고,
열 두번 나는 네말의 밤에 대고 너를 불렀고,
하여 밤이 열렸고, 그대로 열린 채로 있었고,
나는 눈 하나를 그 품 안에 넣고 또 하나는 네 머리카락에 넣어
땋아 주었고,
두 눈을 도화선으로, 열린 정맥으로 읽었고-
갓 번뜩인 번개가 헤엄쳐 다가왔고.
누군가
누군가 심장을 가슴에서 뜯어내 밤으로 건네는 이, 장미를 향
해 손을 뻗는다.
그 잎과 가시는 그의 것이니,
장미는 그의 접시에 빛을 놓고,
그의 유리잔을 숨결로 채우니,
그에게서는 사랑의 그림자가 술렁인다.
누군가 심장을 가슴에서 뜯어내 밤으로 건네며 울리는 이,
그는 헛맞추지 않고,
돌을 돌로 치며,
그의 시계에서는 피가 울리고,
그의 시계에서는 그의 시각이 시간을 친다.
그이, 보다 아름다운 공을 가지고 놀아도 좋다.
너에 대해, 나에 대해 이야기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