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일 금요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바 실리오 성인은 3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오늘날의 터키 카파도캬) 체사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와 조모, 누이 마크리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 주교와 세바스테아의 베드로 주교가 모두 성인일 만큼 영광스러운 가문의 출신이다. 은수 생활을 하기도 한 바실리오는 학문과 덕행에서 특출하였다. 370년 무렵 체사레아의 주교가 된 그는 특히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싸웠다. 바실리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그의 수도 규칙은 오늘날까지도 동방 교회의 많은 수도자가 따르고 있다. 379년 무렵 선종하였다. 그 레고리오 성인 역시 330년 무렵 바실리오 성인과 같은 지역의 나지안조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료 바실리오를 따라 은수 생활을 하다가 381년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되었다. 그레고리오 주교도 바실리오 주교처럼 학문과 웅변이 뛰어났으며,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90년 무렵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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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19-28)
“I am the voice of one crying out in the desert, ‘Make straight the way of the Lord,’ as Isaiah the prophet said.”
말씀의 초대
‘여러분이 처음에 들은 복음을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영원한 생명이므로 그 약속을 간직하고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요한은 특별히 현학적인 말에 속지 않도록 당부한다(제1독서).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요한은 영원한 생명을 주러 오시는 메시아에 대하여 ‘그분은 바로 너희가 모르는 가운데 서 계시고 나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시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치 않다.’고 하면서 자신을 낮추고 그분을 높인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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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구원’이란 무엇일까? 교리처럼 어려운 대답이 아닌 지금 내 삶의 차원으로 쉽게 생각해서 말이다. 구원이란 ‘문제의 해결’이다. 구원자란 ‘문제 해결사’가 되는 것이다. 말기 암 환자에게 구원이란 완치되는 것이다. 고금리 사채로 말미암아 밤마다 잠 못 이루고 시달리는 이에게는 탕감이 구원 아니겠는가. ‘구세주는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이니 내 문제를 넘어 세상의 문제, 죽음 저편의 문제까지 해결해 주시는 분이다. 성탄의 의미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내게 절실한 문제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어떤 구원이 필요한가?’ ‘나는 메시아의 도래를 절실히 기다렸던가?’ 삶이란 두 가지 양식이 있다. ‘주어진 대로 사는 것’과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을 ‘단순함의 미덕’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생각 없이 사는 것을 선(善)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인간은 본성의 욕구를 따라 사는 생리를 가졌기 때문에 창조와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삶이 되기 십상이다. 악과 죄와 번뇌와 고통은 의심 없이 사는 데서 오고 이것이 우리 시대 문제의 핵심이다. ‘하, 이것은 무슨 현상인가?’ ‘나에게는 무엇이 소중한가?’ 삶의 차원은 물론 ‘의심할 수 없는 진리’까지도 질문해야 신앙이 삶의 해답이 되고, 믿음이 완전한 삶에로 인도하게 된다. “당신은 누구요? 그리스도요?” 요한의 정체를 묻는 유다인들에게 정말 그리스도가 필요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질문은 해야 한다, ‘무엇이 그리스도냐?’고. 올해 하루하루 전례의 말씀이 삶에 큰 해답의 선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느 마을에 욕심쟁이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이 할아버지 집 앞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는데, 무더운 여름에 이 나무 그늘 아래는 더위를 식히는 곳으로는 최고였지요. 하루는 한 젊은이가 이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와 더위를 식히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께서는 화를 내면서 이 나무가 자기 것이니 그늘에서 당장 나가라는 말씀하셨지요. 그 순간 젊은이는 “제가 이 나무 그늘을 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10만원에 팔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이 젊은이의 우둔하다고 생각하면서, 공짜로 10만원 벌었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해가 기울자 나무 그늘이 욕심쟁이 할아버지 마당으로 벋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그늘을 따라 할아버지 집 마당으로 들어섰지요. 잠시 뒤, 나무 그늘이 안방으로 길게 드리워졌습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안방에 들어가 누웠습니다. 할아버지가 화를 벌컥 내며 내쫓으려고 했지만, 젊은이는 나무 그늘 판 것을 잊었냐면서 그냥 안방에 누워 한숨 푹 자고 일어났지요.
그 뒤로 젊은이는 틈나는 대로 그늘을 따라 욕심 많은 할아버지의 안방으로 들어가 쉬곤 했습니다. 심지어는 더 나아가 동네 사람들에게도 큰 인심을 쓰듯이 “이 나무 그늘은 제 것이니 언제든지 와서 쉬다 가십시오.”라고 말하면 초대까지 했지요. 결국 이 할아버지는 참다못해 결국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고 말았지요.
내 것이 아닌 것에 욕심을 내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어떤 이득을 취하려고 했던 적은 아니었을까요? 내 것은 내 것, 남의 것도 내 것이길 바라며 살고 있는 우리는 아닐까요? 생각해보면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삶을 모두 마친 뒤에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내 것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잠시 우리들에게 맡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은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절대로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솔직히 자신이 이제까지 보여준 그 모든 행동을 통해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지요. 그래서 엘리야, 예언자 등의 호칭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절대로 그 호칭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단지 주님의 길을 곧게 낼 뿐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충실할 뿐임을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며 지극히 겸손한 모습을 보입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에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오로지 하느님께 집중했었고 그래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데 모든 것을 투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소유도 그리고 나의 명예도 결국은 내 것이 아님을, 오직 주님의 것이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눈으로 남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귀로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머리로는 남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훌륭한 사람이다(유일한).
내 개가 아닌데...(‘좋은 생각’ 중에서)
한 청년이 커다란 개를 데리고 있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개는 사람을 무나요?”
아저씨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허허, 내 개는 사람을 물지 않아요.”
청년은 그 말에 안심하고 개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개가 잽싸게 손가락을 무는 것이 아닌가! 화가 난 청년이 아저씨에게 따졌다.
“안 문다고 했잖아요!”
그러자 아저씨가 하는 말...
“이 개는 내 개가 아닌데...”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청년의 잘못? 아저씨의 잘못?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하기가 상당히 애매한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자세히 묻지 않고 개를 만진 청년에게 잘못이, 자신의 개가 아님을 말하지 않은 아저씨에게도 잘못이 어느 정도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이 어쩌면 이런 상황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누구의 잘못이라고도 말할 수 없으며, 또 누가 잘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힘들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런 불확실의 세상에 살면서도 왜 이렇게 잘잘못을 구분하려고 할까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대충 살면 물리고 맙니다. 악이라는 사나운 개한테 말이지요.
금년부터 삶의 방향을
-이기정신부-
금년부터 삶의 방향을 실수에서 성공으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꿔봅시다. 그른 길에서 바른 길로 감정에서 이성으로 이기주에서 이타주의로 말입니다. 뒷길에서 앞길로 어두운 길에서 밝은 길로 당당하고 부끄럼없이 말이지요.
그렇게 살면 좋은 걸 누가 모릅니까. 허나 물질욕의 유혹에 말려들거든요. 작심삼일이란 말에 끌려들지 말고 세상에 자신의 삶을 외치며 살아봅시다. 담배도 끊고 술도 줄이고 숨긴 생활이라면 드러나 당당히 외치며 말입니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사막의 꽃
-이수철신부-
봄이 저 따라 미국 뉴튼수도원에 왔나 봅니다.
한국은 강추위라는데 여기는 봄처럼 푸근하니 사막 같은 수도원에 훈풍이 감돕니다.
사막이 상징하는 바 수도원은 물론 세상이요 내 마음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자 나를 만나는 곳이 사막입니다.
사실 옛 구도자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악마와 싸우기 위해 사막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제 사막을, 광야를 찾아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바로 내 몸 담고 있는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가 사막입니다.
사막에 꽃이 피었습니다.
사막이 오아시스가 되었습니다.
바로 주님 탄생으로 일어난 기적입니다.
겨울 한 복판에 봄처럼, '하느님의 시(詩)'처럼 탄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계속되는 성탄축제입니다.
그대로 이사야 예언의 실현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뛰고
즐거워하며 환성을 올려라.
너희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른다.
끝없는 즐거움이 너희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너희와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이사35,1-10참조).
올 한해, 하루하루가 이런 날이 되길 축원합니다.
이 시대의 아픔과 갈망을 헤아리는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명불허전(名不虛傳), 최고의 '하느님의 시인'이자 '하느님의 예언자' 이사야입니다.
사막의 현실 중에도 이미 패라다이스(paradise)의 낙원을 앞당겨 사는 이사야입니다.
마침내 주님 성탄으로 현실화되기 시작한 이사야의 찬란한 비전입니다.
이미 이런 파라다이스의 하늘나라 비전을 앞당겨 산 예수님이요 그의 선구자 '광야의 요한'입니다.
광야의 요한은 사막 수도승의 전형이자 광야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빛나는 모델입니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이사야의 돌직구가 통쾌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얼마나 당당한지요.
사막의 수행생활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 자기를 발견한 요한입니다.
그대로 광야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의 신원으로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복음적 삶을 통해 광야에 길을 내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하느님이 피어내신 '사막의 꽃'이 바로 요한입니다.
우리 역시 탄생하신 주님과 함께 사막의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어제 2014년 12월 31일 마지막 날은 참 행복했습니다.
식탁 위의 마티아 수사님 작품인 꽃꽂이가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탄생을 기다리던 대림 촛불 '빛자리'가 주님 탄생을 축하하는 '꽃자리'가 되었습니다.
"아, 저는 매일이 축일입니다.“
옆 형제와 덕담을 나눴습니다.
마치 꽃꽂이가 제 영명축일을 축하하듯
성탄시기 내내 제 식탁 앞자리에 자리 잡고 있으니 그대로 매일이 축일의 분위기입니다.
마침 버나딘 수사가 '오늘은 죠엘 아빠스님 생일(birthday)이다.' 하기에
'Everyday is my birthday(매일이 내 생일이다)'화답하며 크게 웃으니 참 마음 상쾌했습니다.
더불어 영감처럼 떠오른 예수님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누더기 옷입니다.
요즘이야 말끔한 옷들이지만 예전에는 옷도 많이 기워입었습니다.
성철 스님은 수없이 실로 꿰멘 누더기 승복을 입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 옵니다.
"아, 예수님이 누더기 옷을 입으셨네. 그런데 왜 이리 아름답게 빛나는 옷이지!“
다양한 색깔의 형제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상징하는바 바로 '주님의 누더기 옷'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수도공동생활을 하는 우리도 이런 영적 '아름다운 누더기 옷'을 입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참 은혜로웠습니다.
진정 '사막의 꽃'으로, 아름다운 '누더기 옷'을 입고 살 때 참 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은 이런 삶에 대한 묵상입니다.
첫째, 주님 머무르는 삶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를 때, 정주할 때
내적사막의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은 서서히 사라지고 안정과 평화의 빛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으로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를 때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광야의 요한이 그 모범입니다.
'주님 안'을 떠나 살기에 그리도 고단하고 아픈 일이 많이 생깁니다.
궁극적인 위로와 치유도 주님 안에서 만이 가능합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이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 사도의 간곡한 권고가 고맙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 때 이런 확신에 넘치는 희망입니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든 주님 안에 머무르십시오.
'사막의 꽃'으로 '참 나'를 사는 구원의 길입니다.
둘째, 가난한 삶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관상적 삶일 때 저절로 따라오는 가난입니다.
빈궁의 가난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소유한 부유한 가난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행복한 사람이요, 이것은 이미 주님께서 산상수훈 첫 말씀에서 인정하셨습니다.
광야의 요한을 보십시오.
가난의 절정이지만 전혀 가난해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당당하고 의연하기로 하면 당대 최고의 부자입니다.
정치계든 종교계든
이런 요한 같이 의롭고 용기있고 순수한 야인(野人)인 '들사람'이 참으로 그리운 시절입니다.
어제 깨달은 가난이 새롭게 마음 깊이 각인 되었습니다.
"아, 이것이 가난이구나!“
저녁기도차 성당에 들어가기에 앞서 성당 문 앞에서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 수도형제들,
또 저녁기도 후 밥을 먹으려 줄줄이 식당을 향해 가는 모습도 가난 그 자체였습니다.
피할 수 없는 실존적 가난의 적나라한 장면이었습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기도해야 살고', '먹어야 사는'
우리 모두가 광야의 가난한 수도승들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가난의 깨달음이
하느님께 대한 한없는 신뢰의 사랑, 동료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의 사랑을 지니고,
지금 여기서 가식이나 거짓이 없는 진실하고 순수한 '참 나'를 살게 합니다.
셋째, 겸손한 삶입니다.
역시 주님 안에 머물 때 저절로 겸손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 때 주님은 내 '삶의 문장'에 주어가 되지만,
주님을 떠나면 내가 내 삶의 문장에 주어가 되어 겸손은 고스란히 실종되고 교만만 남습니다.
나를 아는 것이 겸손인데
주님을 떠나서는 나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니 애당초 겸손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겸손하여 참 사람이요 바로 요한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겸손의 극치입니다.
등을 굽히는 비굴함이 아닌 무릎을 꿇는 겸손입니다.
왜관수도원이나 뉴튼수도원의 성전이 좋은 것은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받침대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이 진정 겸손의 표지인데
이것을 잃어버려 가는 것 또한 오늘날 신자들의 큰 영적손실입니다.
무릎을 꿇어야 신발 끈을 풀 수 있는데
무릎 꿇을 자격 조차 없는 몸이라 자기를 낮추는 요한의 겸손이 참 아름답습니다.
내적 아름다움은 겸손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오늘 미사 중 기념하는 '성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처럼,
또 요한처럼 우리 모두 세상 광야에서 '사막의 꽃'이 되어 '참 나'의 낙원을 살게 해 주십니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시편98,3ㄷㄹ-4).
아멘.
주제를 아는 사람
-반영억신부-
1일 2015년을 맞아 KBS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해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은 47.3%, 반면 잘하고 있다는 응답은 46.3%로 오차범위 내에서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한편,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서치뷰'가 지난달 17일 대선 2주년 조사에서 31.3%를 기록했던 박 대통령 긍정평가는 지난달 30일 39.5%로 높게 나왔답니다. 박 대통령 지지층의 긍정율은 80.7%(2013. 5) → 73.3%(2013. 12) → 71.1%(2014. 11) → 67.5%(2014. 12)로 급 하락하고 있다고 합니다.
흠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덕이 있는 지도자가 그리운 세상입니다. 인기는 없지만 묵묵히 자기 위치를 지키며 해야 할 일을 하는 성실한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인기 높은 대통령이 아니라도 고집 부리고 ‘말귀 안 통해 어렵다’고 투덜대는 지도자는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말귀가 안 통하면 통하는 방법을 찾으면 되는 것이지 그 탓을 남에게 돌리고 상대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의사소통은 더욱 어렵게 될 것입니다. 가장이 자식의 부족한 탓만 나무라고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줄 생각을 소홀히 한다면 그는 이미 가장으로서의 덕이 없는 것입니다. 최고 지도자부터 그 아래 지도자들까지 자기 위치에서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하고 분별력 있는 처신을 할 사람들이 그립습니다. 소통이 만사형통이거늘 먹통, 불통, 깜깜통은 아니지 모르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당시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대사제들과 레위 사람들이 그의 신분을 알고자 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였던 같습니다. 그만큼 대중에게 끼친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사람들이 “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었을 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하고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요한은 이미 사람들이 자기를 그리스도로 잘못인식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 초점을 둡니다.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인기가 높아지면 자기를 뽐내고 싶은 마음이 더해질 텐데 요한은 오히려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모습으로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를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세상이 그에게 온갖 존경과 관심을 표명할 때, 그는 그런 세상을 향해 과감하게“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1,27)고 고백하였습니다. 자기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야말로 자기 주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분별력 있는 지도자 입니다. ‘나’로 가득한 세상을 하느님의 세상으로 바꾸어 가는 사람, 세상 안에 하느님의 뜻이 가득 차게 하는 사람의 몫을 해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몫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맛들인 사람은 자신의 인기를 과장하고 자기가 최고라고 합니다. 자기가 아니면 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떠벌립니다. 잠시 잠깐 백성의 심부름꾼이 된 사람들이 오히려 모든 것을 차지한 양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을 힘들게 합니다. 이런 일은 더 이상 없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분수를 압니다. 마더 데레사는 자신을“하느님의 손에 쥐인 작은 몽당연필” 이라고 했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언제나 진실한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 보다는 남을 배려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랑하려거든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하고 하느님 앞에 자기 분수를 알고, 주제를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 바실리오는 말합니다.“여러분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랑과 희망을 하느님께 두십시오.” 사랑합니다.
-인영균신부-
새해 둘째 날 우리는 두 성인을 함께 경축합니다. 바실리오 성인과 그레고리오 성인입니다. 두 분 다 동방 교회의 수도자이며 주교였습니다. 이분들은 이른바 ‘절친’이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경축하는 것입니다. 특히 바실리오 성인은 동방 교회에서 수도생활의 기초를 세운 분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당신 규칙서에서 “우리의 거룩한 사부”(Sanctus Pater noster)라고 하면서 바실리오 성인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성인들을 어떤 이유로 경축할까요? 그냥 삼위일체 하느님만 섬기면 되지 성인들을 굳이 공경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회 달력은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지요. 우선은 주님의 신비를 경축합니다. 대림으로 시작하여 성탄, 사순과 부활, 그리고 연중 시기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한 해 동안 예수님의 구원 신비를 나누어서 경축합니다. 주님의 신비 가운데 최고 절정은 파스카 성삼일(죽음과 부활)이지요. 또 다른 구성 요소는 성인들의 축일들을 경축하는 것입니다. 성인들 가운데 가장 큰 분은 물론 성모님이고 사도들과 순교자들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서 성덕을 드러낸 성인들 축일들이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배열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성인들이 돌아가신 날을 축일로 정해서 경축합니다.
성인들은 무엇보다도 거룩히 사신 분들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을 이 땅에서 몸소 드러낸 사람들이지요. 성인들의 공경 목적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성인들 안에서 활동하신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성인들의 신분은 다양합니다. 성직자, 수도자,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던 평신도들입니다. 우리도 ‘거룩함’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각자가 있는 자리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도록 사명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고 자신의 사명을 증언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을 다양한 모습으로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해서 사명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내가 하는 이 일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임을 의식하는 사람은 사명을 실천하고 몸소 살고 있는 사람이며 거룩한 사람, 곧 성인입니다.
-조재형신부-
오늘은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님의 축일입니다. 주교님께서는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목 방문을 오시거나, 미사를 하시는 경우에도 30분 전에는 오셔서 성당에서 조배를 하셨습니다. 손에는 묵주를 드시고, 기도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사제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셨습니다. 건강이 나빠진 사제, 상처를 입은 사제, 사목활동 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제들을 만나 주셨고, 그분들에게 용기를 주였습니다. 사석에서는 친근한 이름을 불러 주셨고, 힘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사제들의 친교와 일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사제들과 함께 도보 성지순례를 가기도 하셨고, 산행을 하기도 하셨고, 체육대회를 하기도 하셨습니다. 주교의 첫 번째 사목의 대상은 바로 함께 일하는 사제들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강론과 강의를 잘 해 주셨습니다. 강의와 미사를 부탁드리면 언제든지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 성모님에 대한 강의를 해 주셨고, 신자들은 모두 주교님의 말씀을 좋아하였습니다. 언제나 기도 중에 있기 때문에 좋은 말씀이 깊은 샘물처럼 마르지 않고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주교님께서 더욱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책상 앞 벽에는 예수님의 고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둥그런 시계가 걸려있습니다. 문득 영원한 생명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새로운 한해를 끊임없이 맞이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일까요? 재물과 명예, 권력과 건강이 영원한 생명을 보증해주는 것일까요? 올해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얻으려고 달려갈 것입니다. 분명 우리는 시간 속에 또 무엇인가를 채워나갈 것입니다. 욕망이라는 전차를 몰고 갈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은 우리를 유혹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세상의 것들을 통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2000년 전 세례자 요한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를 넘어서 영성과 정신의 세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 주었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고 겸손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물질과 욕망의 세상이 줄 수 없는 것들을 말하였습니다. 회개와 속죄로 세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래야 물질을 넘어서 참된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예수님의 고상은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분명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표징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죄, 죽음, 악’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2015년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었으면 좋겠습니다.
참 행복을 준비하는 주제 파악
-기경호신부-
오늘 복음에서 당시 유다 백성의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사이들이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한다. 그들의 질문에 요한은 서슴지 않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라고 사실대로 고백하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거짓말쟁이”(1요한 2,22)가 아니었다. 계속 누구인지 묻는 그들에게 그는 “나는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한 1,23)이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1,27) 라고 한다. 어느 날 그가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눈여겨보다가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1,36) 하고 말하자 그의 두 제자가 자신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갔다(1,37). 이렇게 그는 계속 사람들의 관심을 자신이 아닌 ‘예수님께로’ 돌렸다.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며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도구일 뿐임을 고백한다. 사실 그는 자신을 추종하는 이들이 많아 두려움을 느낀 헤로데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그에게는 상당한 지지 세력이 있어 얼마든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요 길을 닦는 자임을 분명히 인식하였고, 그 인식의 바탕 위에서 생각하고 행동하였다. 그는 평생을 그렇게 자기 위치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철저히 살았다. 그는 체포되어 감옥에서 자신의 생명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 즉 ‘자신의 영혼의 어두운 밤’과 대면한다. 그래서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1-19) 하고 물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식으로 오신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우리에게도 언제든 이런 상황은 일어날 수 있다. 이른바 영혼의 어둔 밤을 몰고 오는 것들, 예컨대 내가 기대하는 하느님의 모습과 성령의 활동과는 다를 때, 위기와 고통의 순간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원하는 식의 응답이 없을 때, 온갖 영적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듯 느껴질 때 우리는 깊은 어둠에 빠질 수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마태 3,11)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하느님과 이웃을 귀한 손님이요 왕으로 모시며, 자신을 심부름꾼으로 뚜렷이 인식하였다. 그의 이런 겸손과 더욱 작아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자세야말로 우리가 걸어야 할 행복의 길이다! 에릭슨이 말하는 자아정체감은 비단 청소년기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 여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광속(光速)으로 흘러가는 일상사 속에서 많은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주어진 세상의 현실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다.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갈 수 있을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창조하신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곧 기도 안에서 그분과 일치함으로써 그분이 주인이시고 자신은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하느님의 말씀과 눈으로 자신을 보지 않고서는 자기 주제파악을 할 수 없다. 하느님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올바로 깨닫게 된 사람의 삶의 방향은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철저히 이타적(利他的)으로 바뀐다. 무엇을 하든 자신의 뜻을 앞세우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하느님 안에서 의미 없는 것은 바라지도 행하지도 않게 된다. 이것이 참된 영적 성숙을 위한 기본자세요 지름길이다.
또한 인간학과 심리학 등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깊이 이해할 필요도 있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수용이 있을 때에야 자신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을 진정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의 말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원하고 사랑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삶의 어려움과 영혼의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주제파악을 하여 겸손되이 사랑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자!
-한상우신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모든 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은 세례자 요한과 같은 겸손함입니다.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겸손되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겸손해질 수 없는 우리의 삶을 만납니다.
겸손했기에 자신을 인정했으며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겸손했기에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다른 생명들과 나란히 설 수 있었습니다.
겸손은 집착이 아닌 사랑으로 나아가는 삶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집착이 아닌 사랑의 삶을 살다간 두 주교님의 겸손의 기쁨을 기억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식별케하며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지 않게 하는 건 겸손의 기쁨입니다.
겸손의 정상에는 하느님과 합일이라는 영원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을 기쁨으로 가득 차오르게 하는 주님의 겸손으로 새로워지는 한 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허망한 집착을 좇는 것이 아닌 영원한 행복을 좇는 겸손은 언제나 주님을 향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