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김시종
ksjong4321@hanmail.net
가을이 되면 상념에 머물 때가 있다. 들녘을 황금 들판으로 물 드린 만추의 계절이 되면 지나간
옛 추억이 새삼스럽게 마음을 슬프게 한다.
나는 젊은 시절 많은 세월을 방황하며 살았다. 야망과 포부 탓에 다양한 직업으로 전전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마저 타고난 사주팔자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채로운 인생 경륜이 어째보면 오늘날 글감이 되기도 했다.
신문 배달을 하며 학창시절을 보냈고, 1959년경 문우들과 문등이(文登伊) 단체를 설립하여 출판도 하고, 연극, 영화 예술에도 참여하였으며 중, 고, 대학생의 작품을 수집하여 『봄의 지열』이란 경상북도 학도 시집 출간도 해 보았다. 출판을 위해 대구교도소 교정국 출입이 빈번했다. 간행한 시집 5,000부 판매를 위해 대구시내 고교 문예반장이나 지도 선생님을 자주 만났다. 때에 따라 고교 문예반장들에게 판매를 일임시키기도 하였다. 그 시절은 전쟁이 끝나고, 정전 협정이 된지 오래되지 않아 모두가 생활이 궁핍했던 시기였다. 책 판매는 처음 생각과 현저한 차이로 실망이 컸었다.
나는 한때나마 청년 시절 문학도로 문단 선배들과 자주 어울리는 좌석이 많았다. 오전에는 월간지 정기구독이나 할부 책 판매를 하였고, 오후에는 포정동 무랑루즈나, 대구 극장 앞 하이마트 등지에서 음악과 문학 토론으로 시간을 보냈다, 저녁노을이 물드는 석양 때가 되면 아카데미 극장 건너편 옥이 집이나, 가보자 주점을 출입하며 주석에서 문단 선배들이 하시는 이야기를 하나씩 귀담아들은 시간이 많았다.
그 당시 문단의 중견 선배들은 대개 4. 5십대가 대다수였다. 전후 시대라 복구가 되지 않았던 암울했던 시절에 낮에는 생업에 종사하시다가 저녁 무렵이 되면 삼삼오오 모여 주로 다방이나 주점에서 자주 뵈올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청구대학 청강생으로 문학에 심취하여 지역 신문에 작품 발표를 하며 자만심이 가득했다. 대구에서 유일하게 월간지로 발행되는 교양지는 도 공보실에서 발행하던 『도정월보』가 고작이었다. 편집 주간은 여류 시인인 서정희 여사였다. 서여사가 지병으로 작고하신 후 극작가이신 K 선생이 편집을 맡게 되었다. 어느 날 K 선생이 나에게 공보실에서 함께 일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나는 징집영장이 발부되어 입대해야 할 처지였다. 그래서 문우인 M 군을 채용해 달라고 요청하고 입대 하였다.
35개월이란 군 복무를 마치고 귀향하니 그동안 세상은 많이 변한 듯했다. K 선생과 M 군도 대우가 좋은 대구 MBC 문화 방송으로 자리를 옮겼고, K 선생은 달구벌 만평을 담당하셨고, M 군은 일선 기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제대 후 무엇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마땅한 직업 없이 지내다가 지인의 소개로 매일경제신문 대구지사에 몸을 담고 기자생활을 해 보았으나 생리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학원사 대구지사에 입사했다. 당시 학원출판사는 국내 출판업계에서 선두주자였다. 월간 주부생활은 가정마다 인기가 대단했다.
어느 날 학원사 K 사장이 대구지사를 방문 했었다. 전 직원을 모아 놓고 인사 겸 간담회를 실시했다. K 사장도 대구가 고향이었고, 조카 또한 대구지사에 업무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인생 선배로서 사회적 경험담을 격의 없이 이야기하는 분위기는 진지하였다. 간담회를 진행하는 도중 K 사장은 불시에 “기관에서 몸담아야 할 사람이 책장사를 하고 있다”는 투의 이야기가 있었다. 많은 직원 중에 특정인을 지명하지는 않았다. 그저 분위기의 느낌과 생각을 말한 듯했다.
사원들은 서로 간에 얼굴을 쳐다보며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내 얼굴은 홍당무가 되는 듯 뜨거워 옴을 느낄 수 있었다. 매일 자전거에 월간 주부생활을 싣고 구독 신청과 판매를 하였지만, 수익은 신통치 않았다. 월간지 책장사는 나의 영구적인 직업이 될 수 없었다. 때는 5˙16 군사혁명 직후라 군 복무를 하지 않은 공직자는 공직 사회에서 모두 퇴출해 국토건설단에 투입 군 복무를 대체시킨 바 있었다.
하루는 아내가 나에게 "경찰관 시험에 응시해 보세요." 하며
“당신 사주에는 권세가 들어 있으니 경찰관을 해 보라고 권유했다."
“이제 당신 나이도 30세가 되었고, 아이도 있으니 안정된 직업을 구해야 하지 않겠나." 하였다.
“그렇게 해 보지요”
그 당시만 하여도 경찰관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아 별 흥미가 없었다. 어린아이가 울면 “순사가 온다.” 하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칠 정도로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나는 직업에 대한 선입견보다 우선 처자식을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는 가장이었다. 책장사를 하면서 틈틈이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다. 당시 안정적이고 장래성 있는 마땅한 직장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구에는 기껏해야 제일모직이나 대한방직 등의 섬유공장뿐이었다.
경찰관 채용 시험에 응시하자면 우선 신체검사에 합격하여야만 필기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낮에는 책장사를 하고 밤이 되면 시험 준비를 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국가 공무원인 경찰관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나 같이 내성적인 사람이 자연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임명장을 받고 제복을 걸친 자신이 한편으로 얄밉상스레 보였다. 무엇보다 내가 태어난 대구에서 제복을 입은 직업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직업이 되었다
. 경찰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자신의 삶이 때에 따라 보람과 희열을 느낄 순간도 있었다. 막상 약자의 편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는 거리의 판사처럼 보람도 많았다. 지난 세월은 잡을 수 없듯 돌고 도는 인생살이가 내 삶의 토양이 되고 말았다.
국록(國祿)을 받으며 안정된 생활과 노후에 연금이 효자 노릇을 할 것이라 생각하니 어찌하다가 먼 길을 돌고 돌아 온 자신을 되돌아보면 그것 또한 인생살이 같기도 한 나의 삶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첫댓글 공감합니다. 저도 안개자욱한 희미한 신작로를 걷고 있습니다. 파이팅!
이병훈 선생님 ! 방문과 댓글 감사합니다. 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