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의 「그녀, 요나」평설 / 강계숙
그녀, 요나
김혜순
어쩌면 좋아요
고래 뱃속에서 아기를 낳고야 말았어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못했는데
사랑을 하고야 말았어요
어쩌면 좋아요
당신은 나를 아직 다 그리지도 못했는데
그림 속의 내가 두 눈을 달지도 못했는데
그림 속의 여자가 울부짖어요
저 멀고 깊은 바다 속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그 여자가 울어요 그 여자의 아기도 덩달아 울어요
두 눈을 뜨고 당신을 보지도 못했는데 눈물이 먼저 나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게 분명하지요?
그러니 자꾸만 자꾸만 당신이 보고 싶지요)
오늘 밤 그 여자가
한번도 제 몸으로 햇빛을 반사해본 적 없는 그 여자가
덤불 같은 스케치를 뒤집어쓰고
젖은 머리칼 흔드나 봐요
이파리 하나 없는 숲이 덩달아 울고
어디선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함박눈이 메아리쳐 와요
아아, 어쩌면 좋아요?
나는 아직 태어나보지도 못했는데
나는 아직 두 눈이 다 빚어지지도 못했는데
—시집『한 잔의 붉은 거울』(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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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 시인'이라는 표현이 사라진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것은 김혜순의 등장과 관련이 깊다. 그에 이르러 한국의 '여성시'는 고유의 시학을 뜻하는 명칭이 되었다. 전래의 감상적 취향과 지성의 부족을 과감히 걷어낸 그의 시는 여성성의 발견이 시의 새로운 스타일이 되는 순간을 선보여왔다. 그에게 여성성은 남성의 반대나 결여가 아니라 남성적 방식으로 구축된 기존의 인식 틀을 배반하는 적극적 실천이자 이를 위한 '다른' 언어의 창조를 뜻한다. 그것은 '다른' 시간, '다른' 몸의 열림이기도 하다.
김혜순의 시에서 시간은 겹치고 쌓이고 포개지고 뒤엉킨다. 그래서 '그녀, 요나'의 '나'는 시간이 뒤섞인 목소리이다. 지금 '당신'은 '나'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는 미래로부터 현재로 거슬러와 앞으로 있을 사랑을 미리 하고, 아이도 먼저 낳고, 이별도 앞당겨 앓는다. '당신'의 붓끝을 따라 완성되는 '나'의 몸은 만남 이전과 이후의 전 과정을 동시에, 한꺼번에 체험하는 숨 가쁜 현실이다. "어쩌면 좋아요"라는 말 속에 두근거리는 설렘과 애타는 기다림, 깊은 슬픔이 묻어나는 것은 '당신'과 '나' 사이에 준비된 사건이 조금씩 그려지는 '내' 몸을 따라 전부 응축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 요나'는 시간의 아픈 몸살이고, 가눌 수 없는 감정의 혼돈이며, 예정된 결말을 슬퍼하는 눈물이다. 요나의 저 고백은 현재 진행 중인 생생한 사랑의 현장 그 자체가 된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 대개 과거 완료형을 쓴다. 과거 완료 속에서의 사랑이란 끝나버린 것이 됨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요나는 다르다. 오지 않은 시간 속에서 미래의 씨앗으로 잉태된 요나에게 사랑은 언제나 시작하는 삶이며, 출발하는 현재이다. 숲과 함박눈이 그랬듯 그녀의 울음이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까닭은 그녀가 '다른' 시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여성적 시간의 흐름은 이렇게 익숙한 사랑의 양상도 '다르게' 만든다. 사랑만이 아니다. 삶의 이면은 직선적인 남성적 시간 밖에서 비로소 다양하게 자기 몸을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요나가 낯설면서도 매력적인 이유이다.
강계숙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