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4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마르코 1,29-39)
He cured many who were sick with various
diseases, and he drove out many
demons,
Rising very early before dawn, he left and went off to a deserted place,
where he prayed.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성체성사의 은혜로 초대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와 함께 피와 살을 나누셨고, 죽음의 종살이에서 우리
영혼을 해방시키셨다는 설득은 장엄한 선포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 주신다. 이렇게 병고에 시달리고 악령에 포박당한 이들의 영혼과 육신을 해방시키시는 일 또한 장엄한 선포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될 때까지 그
일을 지속하실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기적의
성격은 자연 질서의 초월, 병자의 치유, 악령의 추방, 이 세 가지이다. 일그러진 삶의 모습을 본디의 창조 상태로 회복시키는 인간화의 작업이다.
마르코 복음과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인 하느님 나라의 운동이 악령의 추방보다 우선해 있음을 강조한다. 열두 제자의 선발 목적은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어 세상에 보내려는 것이고, 파견하실 때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신다. 루카 복음은 마귀를 내쫓는 구마를 치유보다 더
적극적으로 강조한다. 악령은 하느님 나라 건설의 방해물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해 왔다.’(마태
11,12 참조)고 말씀하셨다. 비인간적 현상들은 악령이 활개 치는 상태다. 우리는 개성과
자유, 성취욕으로 말미암아 도덕과 공동체의 윤리를 버린 지가 너무 오래다. 많은 경우 악령의 속삭임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악령이 자신을
포박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악령과 마귀는 내 몸과 마음에 둥지를 틀고 산다.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 지역의 중심적인 종교 고장인데 어찌 그렇게도 마귀가 많았을까? 과학 시대의 오늘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예수님의 추방 일정이 너무
바쁘시다. 예수님께서는 악령에게 단호하셨다. ‘말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다’(마르 1,34 참조). 진리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뜻일 게다. 소비문화의 시장 관리는 늘 기품 있고 아름다운 삶에 필수적임을 앞세운다. 악령의 입을 다물게 하는 좋은 방법가운데 하나는
거실의 텔레비전을 없애는 것이다. 거짓된 것을 듣고 보지 않으면 참된 것이 들리고 보이게 된다.
어제 운전을 하다가
조금 황당한 일을 겪었습니다. 글쎄 커다란 덤프트럭이 마치 스포츠카처럼 속도를 내면서 차선을 변경하면서 운전을 하더니 두 개의 차선을 막으면서
어떤 승용차 앞에서 갑자기 서버리는 것입니다. 큰 사고가 날 뻔 한 위험한 상황이었지요. 그리고 덤프트럭 기사는 내려서 자신이 막은 승용차
운전사에게 다가가 마구 욕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제 바로 옆이었기에 그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는데, 승용차 운전사가 초보 운전이었는지
덤프트럭 앞에서 계속 가다 서다를 반복했나 봅니다. 이를 덤프트럭 기사는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여겼고, 이를 따지려고 차선을 이리저리 변경하면서
속도를 내서 그 승용차 앞을 가로 막고는 화를 낸 것이었지요.
기분이 나쁠 수도
있었겠지만 이 덤프트럭 기사의 행동으로 인해서 추돌사고가 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덤프트럭 기사의 행동에 저를 포함해서 뒤따르던 많은
운전수들의 기분 역시 안 좋았다는 것입니다. 사고도 날 뻔도 했지만, 바쁜 출근 시간에 가뜩이나 길이 막히는데 두 개의 차선을 가로 막아서 꼼짝
없이 가만히 있어야만 했으니까요. 그래서 몇몇 운전수들은 내려서 덤프트럭 기사에게 따지더군요. 덤프트럭 기사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운전수
때문에 화가 났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역시 서버린 덤프트럭 기사 때문에 화가 난 것입니다.
덤프트럭 기사의 이
갑작스런 행동으로 인해 자신의 기분 나쁨이 해소가 되었을까요? 아마 다른 사람들로부터 심한 항의를 듣고는 더 기분이 나빠졌을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
기분대로 살아가는 곳이 아닙니다. 또한 자기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곳도 아닙니다. 희생을 동반하는 사랑을 나누면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주님께서 창조하신 곳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손을 잡으시자 열이 내리지요. 그리고 시몬의 장모는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든다는
내용입니다.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시몬의 장모처럼 우리 역시 종종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자기 힘들다고 또 화가 난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바로 이 때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주님의 손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손으로
사랑이 가득한 마음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나의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손을 잡아주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혼자 끙끙대며 어렵고 힘들어하는 그 순간을 잘 극복할 수 있으며,
주님께서 전해 주시는 사랑의 마음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힘들어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주님의 손을 잡으며 기쁘게 살아가야 하는 세상임을 떠올리면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손을 꼭 잡으시길 바랍니다.
사랑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언제나 자신을 새롭게 만들기 때문이다(블레즈 파스칼).
좋은 운전 습관
어떤 분이 운전하는
차를 탔는데, 그분께서는 자기 앞으로 끼어드는 차를 무조건 양보해서 끼워주시더군요. 운전을 잘 못해서 양보하는 것도 아닙니다. 끼워주지 않으면
목적지까지 아주 조금 빨리 갈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양보함으로 인해 더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씀하시더군요.
평소에 잘 베풀지
못했는데, 이를 통해서 베푸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합니다. 또한 다른 운전수와 달리 자신의 마음이 넓어지는 것 같아서 역시 기분이
좋아진답니다. 그리고 여유를 가져야 기분 좋게 운전할 수 있답니다.
하긴 빨리 가면 또
얼마나 빨리 갈 수 있을까요? 그 급한 마음보다는 여유 있는 마음을 간직할 때 내게 다가오는 행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안전 운전
하세요~~~
신앙인들의 차원은
고차원
-이기정신부-
눈이나 다른
감각으로 또는 전류로 감지가능 기계들로 표시되는 세상. 이런 영역만이 있음의 전부라고 정한 사람들로 득실거리는 저차원 세상! 물질규정으로
사육되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사람들 뭐 그리 대단한가요?
감지가능 영역을
넘어 더 넓고 높은 곳을 부정하는 저차원의 소굴인 세상 귀신 천신 혼 영 하느님이 없다면 죽음 다음 말은 할 자격이 전혀 없지요. 예수님처럼
감지불능 영역을 당연시하는 신앙인들의 차원은 고차원 맞습니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코 1,33~34)”
< 거룩한
교환 2; 우선 형제들의 처지가 되기 >
-전삼용신부-
한 재벌이 한
아이와 거래를 할 수 있을까요?
아이가 재벌이
되던지 재벌이 아이처럼 되던지 해야 거래가 성사 될 것입니다.
거래는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끼리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재벌이 되는 것이 빠를까요,
아니면 재벌이
아이의 수준에 맞추어 주는 것이 빠를까요?
당연히 후자일
것입니다.
만약 재벌이
아이에게 재벌이 되기까지 만나주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아이와의 관계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남미를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보았던 것은 극도의 빈부격차입니다.
고급 호텔들은
하나같이 높은 벽으로 둘러쳐져 있습니다.
또 그 위에는
전기가 흐르는 철망이 둘러져 있어서 사람들이 절대 넘어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도시
주위로는 그 도시의 몇 배가 되는 빈민촌들이 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곳에는 경찰도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남미 어느
나라나 치안이 불안해서 날치기와 강도들을 만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차를 멈추어 서면
문을 잠그고 창문을 닫고 있어야 합니다.
총을 들이대고 다
빼앗아가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호텔들에 들어가면 그나마 안심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도짓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본래 그 땅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입니다.
물론 미국도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800만이 넘는 인디언이
살았지만 지금은 겨우 35만 만 남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전쟁과 추방,
전염병
등인데,
미국인들은
인디언들이 자신들의 수준을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지만 이들이 자신들을 받아들일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남미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인들이나
동양인들이 부를 장악하고 있고 본래 살고 있던 원주민들은 판자촌으로 밀려나서 일자리가 없으니 강도짓이라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미나
남미나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명목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결국 복음이 그들의
모든 생명과 삶을 앗아갔습니다.
멕시코 대성당
앞마당에는 원주민들을 성당 짓는데 사용하고 죽여서 묻어버렸기에 아직도 수많은 원주민들의 유골이 묻혀있는 것을 유리판을 통해 조금이나마 볼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그들은 복음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아메리카를 빼앗았습니다.
만약 진정한
복음이었다면 그들보고 자신들을 닮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은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그들의 얼굴을 하고 발현하셨습니다.
구원하는 방식은
내가 먼저 그들의 처지가 될 줄 알아야지 처음부터 무조건 자신처럼 되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인간과
거래를 하고 싶으셨습니다.
당신 거룩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대신 우리 인간의
죄악을 받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없는 것으로 여길 수 없으셨고,
그래서 당신 스스로
사람이 되셔서 인간 모든 죄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 대신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신비를
‘거룩한
교환’이라
부릅니다.
거룩한 교환도
하나의 거래입니다.
거래를 위해서
하느님이 하느님으로 계시지 않고 인간의 옷을 입고 창조주가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 없으니,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거룩한
거래를 위해서,
오늘 독서의
말씀에서처럼,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던 것입니다.”
‘거룩한
교환’이 곧 복음 선포의
방식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
선포를 위해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어주셨는데,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면서는 먼저 우리 처지를 닮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위선인 것입니다.
문둥병자의 다미안
성인은 문둥병자들이 자신의 사랑을 믿을 수 있도록 자신도 문둥병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같은 처지가
되어야만 그들이 자신을 믿고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믿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문둥병이
걸렸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요?
그렇다면 복음
선포를 해야 하는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권위적이어야
할까요,
아니면 겸손해야
할까요?
부자여야
할까요,
아니면 가난하며
세상 사람들의 어려움을 함께 겪는 사람들이어야 할까요?
그리스도는 가난한
이들의 구원을 위해 가난한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 또한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라고 파견 받았습니다.
그런데 먼저
가난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들을 부유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어떤 목사님이
병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저 병을 저에게
주시고 저 사람은 낫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제 자신이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의 것을 내
것으로 취할 마음이 없다면,
내 것을 그
사람에게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다가가면서 과연 그들의 처지가 나의 것이 되고 나의 좋은 것들이 그들에게 가기를 원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리서2,18) -김대열신부-
비교적 유혹에 약한
사람이 있고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큰 눈으로 바라볼 때,
모든 인간은 유혹에
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유혹인 것이지요. 그러니 타고난
성품이 유혹에 약하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두 유혹에
약하지만 이겨낸 사람이 있고 이겨내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요? 잘 넘어지시는 편인가요? 아니면 잘 이겨내시는 편인가요? 그냥 모두 잘
넘어지는 편이라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이런 우리에게
히브리서는 위로와 용기를 안겨줍니다. 예수님조차 유혹을
받으셨다고 전합니다. 유혹을 받았다는 것은 유혹으로서 느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
유혹을 끝내 이겨내셨고, 따라서 그 유혹의 강한 힘을 알기에 유혹에 약하디 약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는 말을 히브리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유혹이던지 그
유혹 앞에서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자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나약함은
작은 유혹에도 늘 넘어질 수 있는 나약함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도와주시겠답니다. 그러니 청하십시오.
다양한 유혹 속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분명 인생이지요. 유혹의 대상에
대해서 일일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욕심이 들어갈 때 유혹이 되고 말 테니까요.
우리와 똑 같은
조건으로 유혹을 이겨내신 그분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희망을 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가 원한다면 함께 해주시겠다고 합니다. 붙어볼
싸움입니다. 늘 아름다운 길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아름다움의 한 가운데 예수님께서 계심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중심
-외딴곳의
기도처(祈禱處)-
-이수철신부-
영성생활은
이벤트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입니다.
연중
1주간이 시작되니 평범한 일상의 단순함이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흰색
제대보 앞, 양쪽의 초록색 수직선의 굶은 면이,
그리고
제대 앞의 초록색 난의 조화가 참
단순하고 깨끗하여 좋습니다.
맑게
깨어 있는 영혼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바로
뉴튼수도원 수도승들의 삶의 중심인 성전 제대입니다.
삶의
중심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삶의
중심이 없어, 삶의 중심을 잃어 방황과 혼란이요 허무와 무의미의 삶입니다.
삶의
중심에서 삶의 방향이, 삶의 목표가, 삶의 의미가 계시됩니다.
삶의
중심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삶의 중심입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분주한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침묵과 고독의 외딴곳이 상징하는바
바로
삶의 중심인 하느님입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느님을 만나는 삶의 중심,
외딴곳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새벽의
고요한 외딴곳에서 하느님과 만나야
비로소
매일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살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올해 25주년 서품 은경축을 맞이하기 까지 매일 새벽 3시 전후로 일어나
외딴곳인
제 독방에서 그날 독서와 복음을 렉시오디비 하고 강론을 쓰며 주님을 만났고
이어
두 번째의 외딴곳 성당에서 성체성사를 통해 형제들과 주님을 만났기에 살 수 있었습니다.
산티야고
순례중에도 외딴곳을 찾아 새벽마다 묵상하여 강론을 써 올렸고 미사를 올렸으니
하느님의
은총이 놀랍습니다.
지금
1월 14일 강론을 쓰는 미국시간은 1월13일 새벽 3시, 뉴튼수도원 제
방의 외딴곳입니다.
세상
어디나 사막입니다.
사막의
수도승들뿐 아니라 모든 이들이 사막의 영성을 살아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정말
사막같은 수도원에 지내다보니 기도시간과 밥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루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는 기도시간, 밥시간입니다.
하여
수도가정의 중심은 '성당'과 '식당' 둘이라고 합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밥먹을 때 개인은 물론 공동체도 중심과 질서를 잡기 때문입니다.
"기도시간과
밥시간만 잘 지키면
살 수 있다.“
아주
평범하나 실제적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사막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최소한의 필수요소입니다.
삶의
중심의 은총은 뚜렷이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무집착으로
인한 초연한 자유입니다.
외딴
곳에서의 기도를 통해 삶의 중심인 하느님을 만나야 비로소 자유로운 삶입니다.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한 자유를 누립니다.
세상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으니 매임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놀라운 기적과 그 많은 인기중에도 내적자유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외딴 곳에서의 기도의 은혜였습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Everyone is looking for you).“
예수님의
인기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활동주의의 유혹은 크기 마련이고
영육의
충전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외딴곳에서의 기도는 필수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인기에 편승하여 자기를 잃는 일 없이 즉시
외딴곳을 찾아나섬으로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공을
이뤘을 때 거기 머무르지 않음)의 지혜를 실천했습니다.
외딴곳의
초월적 거점을 마련하여 세상과 거리를 둘 때,
현실에
투신하면서도 영적고공비행이 가능함으로 내적자유를
누릴수 있습니다.
세상
것들의 중독의 치유와 예방에 외딴곳에서의 주님과의 친교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군중의
인기는 뜬 구름과 같습니다.
결과는
외로움과 고독입니다.
바로
연예인들의 우울증과 자살도 여기서 연유합니다.
외로움과
고독이 바로 외딴곳의 기도처에로 하느님의 부르심인 줄 믿고 응답했다면
삶이
그렇게 불행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여
진정 영성생활을 추구하는 이는 앞문은 세상의 활동에,
뒷문은
사막의 관상에 활짝 열어 놓고 균형잡힌 삶을 삽니다.
둘째,
분별의 지혜입니다.
탐욕은,
지나친 활동은 우리의 눈을 멀게하고 자기를 잃게
합니다.
자신의
신원을 정체성을 잃게 합니다.
나는
어디에 있는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왜 사는지 질문을 삼켜 버리는 '활동주의(activism)의 늪'입니다.
영혼없이,
생각없이 살게 합니다.
외딴곳의
기도처(祈禱處)를, 안식처(安息處)를 잃은 탓입니다.
육적
욕망을 추구하다보니 영신사정은 전혀 돌보지 않은 업보입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 있는 분주한 공직자들이
이런
외딴곳의 기도처를 마련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주님은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외딴곳에서
주님을 만나 기도할 때 눈이 열려 참 나의 발견이요 살 길을 안내 받습니다.
지식이
범람하는 시대에 분별력의 지혜도 선물받습니다.
다음
예수님의 확신에 넘친 말씀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외딴곳에서의
기도 중에 자신의 사명을 새롭게 각성한 주님이심이 분명합니다.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성령따라 흐를수 있음은
바로
하느님안에 정주처(定住處)를 뒀기 때문입니다.
셋째,
활력의 선물입니다.
주님은
생명의 샘, 활력의 샘입니다.
예수님의
지칠줄 모르는 활력과 열정의 진원지, 바로 외딴곳의 기도처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주님의 영과 지혜, 능력으로 충만했기에
온갖
병자들을 치유하고 마귀들을 쫓아냈습니다.
외딴곳의
기도처에서 아버지의 능력을 그대로 전수받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십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하느님의
힘이 아니곤 불가능한 기적들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런 치유, 구마활동이 끝나자 즉시 외딴곳의 기도처로 물러나십니다.
하느님을
만나 소진된 영육의 에너지를 충전시키기 위함입니다.
활력의
샘중의 샘이 매일 외딴곳에서 함께 거행하는 이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다음
히브리서 말씀이 성체성사의 위력을 증거합니다.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주시려는 것이 었습니다.“
외딴곳에서의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예수님의 성체(살) 성혈(피)을 모심으로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악마는 파멸되고,
'죽음의
공포'의 종살이로부터의 해방이 이뤄집니다.
성체성사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매일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을 새롭게 모시며 확인하는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그분은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네."
(시편107.8-9).
아멘.
수도자들이
가장 멋져 보일 때
-양승국신부-
국도를 타고 가다가
길고도 긴 방파제 위로 올라갔을 때의 일입니다.
자칫 을씨년스럽고
황량할 뻔 했던 겨울 들녘이었는데,
수많은 철새 떼들이
멋들어진 군무(群舞)로 제 눈을 즐겁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수확이 끝난
아무것도 없던 너른 들판과 창공이 순식간에 아름다운 공연장으로 탈바꿈하더군요.
철새들이 저리도
멋지게 날아다닐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새들은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기 위해 스스로를 최적화시켰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새들은
날기 위해 가장 중요한 날개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감량(減量)입니다.
새들의 뼈는
포유류들의 꽉 차고 단단한 뼈와는 달리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뼈 속을 비웠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조금이라도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새들의 내장기관은 아주 단순화시켰답니다.
섭취한 음식물을
소화시키는 데 인간처럼 긴 장기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수시로 배변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다보니 재수
없는 사람들 가끔씩 그로 인한 큰 피해를 보기도 합니다.
자유자재로 창공을
날아다니기 위해 수시로 자신을 말끔히 비워내는 새들의 모습에서 멋진 수도자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또 다시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이 정들었던 임지를 뒤로 하고 물설고 낯선 곳으로 떠나갑니다.
마치도 습관처럼
아무런 미련도 없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떠나가는 뒷모습이 눈물겹게 아름답습니다.
수도자들이 가장
있어 보이고 멋져 보일때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든
봉헌생활자들의 스승이자 모델이신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카파르나움에서
수많은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활동은 정말이지 성공적이었습니다.
믿기지 않는 치유와
구마 앞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행복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예수님과 제자들도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은근히 한
가지 기대를 했겠지요.
이런 전지전능하신
착한 목자 예수님께서 다른 고을로 떠나지 말기를.
평생토록
카파르나움의 전속사제나 최고 관리로 남아주시기를.
제자들까지 찾아와서
힘을 보탭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코 복음
1장
37절)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면에서 아주 단호하십니다.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체 없이 길을 떠나십니다.
한 마리 산새처럼
미련 없이 훌훌 털고 날아가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코 복음
1장
38절)
예수님께서 늘
자신을 비워냈기에,
예수님께서 언제나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생각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외딴
곳으로 가라
-반영억신부-
어떤 능력이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그만한 수고와 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희생과 노력 없이 능력을 지닐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가지고
마귀를 좇아내며 앓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는데 이 또한 그만한 정성을 쏟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힘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갖지 않고는 그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도 입니다. 토마스 키팅 신부는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라고 정의
하였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기도를 “심장과 심장의 만남”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만큼 긴밀한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 곳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른 새벽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입니다. 하루를 아버지의 뜻 안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도는 나의 원의를 이루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렇게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쳐왔으면서도 주 하느님의 뜻보다 내 뜻을 이루려 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마르코 복음
1,35를 보면,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한 곳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1,3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할 소명을 확실히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기도하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신앙인에게 기도가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노자는 “고요함이 없는
활동은 다만 어지러운 난장판” 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늘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외딴곳으로 가셨을까요? 외딴 곳은 광야입니다. 고요함이 있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달콤하고 안락한 잠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늘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6,6).
당신이 먼저 그렇게 하셨고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힘을 입으려면 고요 속에서 외딴 곳을 찾아 기도 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전히 바쁜 일상이지만 오늘은 성경읽기나 성체 조배를 통해
고요함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신부-
지난 토요일
안타깝게도 의정부의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이 화재로
4명이
사망하고,
225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습니다.
화재가 난 곳은
아파트라고 하기 보다는 서민형 복합 주거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10평 내외의 원룸형
주거공간이었고,
그래서 피해자
중에는 20대와
30대의 젊은 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새해의
벽두에,
추운 겨울에 화재로
목숨을 잃은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또 부상당하신
분들과 거처할 곳을 잃어버린 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런 화재의
현장에서 사람들의 탈출을 도와주었던 의로운 소방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13명이 탈출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본인은 나중에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경찰들도 위험한
불길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구해 주었고,
부상을 입어
병원으로 갔다고 합니다.
화재의 원인을
파악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화재로 피해를 입은 분들을 위로하고,
그분들이 생활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의정부시는
부상자들의 치료비를 위한 보증을 서고,
긴급 생활 자금을
지원한다고 합니다.
정부에는 긴급
재난지역 선포를 건의한다고 합니다.
24년 전 중곡동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화재가 발생해서 갈
곳이 없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다른
곳에서 일을 하면서 지내기로 했는데,
어린 딸이
있었습니다.
딱한 소식을 들은
본당 교우 분이,
한 가지 제안을
하셨습니다.
집을 새로 얻을
때까지 가난한 부부의 딸을 데리고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젊은 부부는 감사한
마음으로 딸을 교우분의 가족들에게 보낼 수 있었고,
다시금 용기를 내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어린
아이를 위해서 옷을 보내 주었고,
먹을 것을 나누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도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2001년
여름,
적성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당시에는 기록적인
가뭄으로 논들이 갈라지고,
농부들의 시름은
깊어갔습니다.
당시 교구
사회사목부에서 양수기를 보내 주었습니다.
양수기를 이용해서
갈라진 논에 물을 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논에 물이 들어오자
환하게 웃던 농부들의 모습도 생각납니다.
초대교회는
4가지 특징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이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모두 함께 빵을
나누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둘째는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신분의 벽을
허물었고,
남녀의 구분도
없었고,
학력의 담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한
형제자매로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셋째는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아픈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공동체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넷째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마치 우리의 몸이
많은 지체가 있지만 한 몸을 이루듯이 교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지체를 이루어 신앙 공동체로서 마치 한 몸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웃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 될 수 있었고,
이웃의 기쁨은 또한
나의 기쁨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의정부 교구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 것입니다.
이웃인 우리들도
함께 기도하고 도움을 준다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랑의
‘즉각성’(卽刻性)과 전존재적
투신
-기경호신부-
오늘
복음의
첫 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나오시어 곧바로 가파르나움의 근거지로 쓰셨던 시몬의 집으로 가시어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에 대한
사정을 들으시고 다가가 손을 잡아 일으키시어 열이 가시도록 해주셨다(1,30).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미 시작되었고,
인간의 고통을 해방시켜주는 것이 안식일법이나 정결법보다 중요하며, 귀신 따위는 겁낼 것 없음을 가르쳐준다.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짐을 지거나
가지고 거리를 지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인데도 ‘곧바로’ 달려가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셨다. 우리가 중요시하며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은 인간을 구속하는 안식일법이 아니라 사람을 해방시켜주고 살리는 것이다. 이 해방을 체험한 시몬의 장모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시중을
들었다(1,31).
효율과
성과를 추구하며 경쟁과 속도의 관성(慣性)에 젖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인간’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가치요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최종 목적임을
잊고 살아간다.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신 예수님이 지니신 삶의 방향, 가치관, 행동방식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추종하는(sequela Christi) 우리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늘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람을 가장 고귀한 가치로 여기며 서로 존중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여기고 모두가 신명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나누고 공유하고 도우며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길이 바로 인간다운
길이며 가장 하느님다워지는 길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이 근본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1,32) 유다인들은 하늘에서 별이 세 개 나타나면 그 날이
끝나는 것으로 간주하여 안식일도 끝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병자들을 예수께 데려왔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인데도 ‘곧바로’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시기 위하여 달려간 것과는 다른 태도이다. 사랑은 ‘나중에 형편이 될 때, 시간이 허락할 때’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은 제도나 원칙을 뛰어넘어 ‘곧바로’ 행하고 응답해야 하는 ‘즉각성’(卽刻性)을 지닌다. 우리도 흔히 ‘있을 때 잘
해!’라고 말하지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1,34). 그분은 시간과 장소, 대상을 가리지 않고 ‘함께
하시며’, ‘병을 고쳐주시고’ 해방의 길로 이끌어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 회당 안과 밖, 집 안과 바깥에서는 물론이고 길을
가시다가도 병자와 죄인을 돌보셨으며, 때로는 먼저 다가가시고, 때로는 찾아오는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그분께서 취하신 행동방식은 한마디로
조건도 한계도 없었다. 그분의 몸짓은 하느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전존재적 투신‘이었던 것이다. 사랑은 분별이 있어야 하지만 때를 가리고 대상을
가리고 방법을 가리기 시작할 때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자기중심적인 것으로 변질되어버림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치유해주시고, 다음 날 새벽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셨다. 그분은 늘 이렇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함’과 ‘하느님 앞에 멈추어
호흡함’ 사이를 오고 가시며 사랑의 순례를 하셨다. 또한 그분은 사람들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말에,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1,38) 하고 말씀하셨다. 치유에 대한 사람들의 찬사와 감사, 인간적 집착을 뒤로 하고 오직 하느님의 일을 위해
떠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몸짓을 따라가야 하리라!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송영진신부-
1월 14일의 복음 말씀은 마르코복음 1장 29절-39절,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다.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전도 여행을 떠나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이야기는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사람들에게 '구원의 자비'를 베풀어 주신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찾고 있다고 말하는데도(마르 1,37)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을 떠나시는
모습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보게 되는 '반전'과 비슷합니다. 자비로우신 모습에서 조금은 냉정하게 보이는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점도
그렇고, 병자 치유를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이 말씀에서 '그곳에도' 라는
표현은 '이곳에서도' 복음을 선포하셨음을 나타내는 표현이 됩니다. 카파르나움에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사실상 복음을 선포하신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과 말씀들은 모두 다 '복음 선포'였고, 그 자체가 '복음'이었고,
'구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만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병자 치유, 마귀 추방과 같은 기적으로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려고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병자들에게는 치유 자체가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는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중단하고 복음
선포만 하겠다는 뜻은 아닌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고을들에서도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카파르나움을 떠나셨을까?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그곳에 그대로 계셨어도 되었을 텐데, 왜
온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을까? 이것은 '복음'이란 '저절로 퍼지도록 내버려 두어도 되는 소문'이 아니라, '가서 전해 주어야 할
소식'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소문이 퍼지는 것과 소식을 전하는 일은 분명히 다릅니다.
또 '복음 선포'는 '영업'이
아니라 '은혜를 베풀어 주는 일'이라는 것도 나타냅니다. '영업'은 내가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일이고, 내가 아쉬워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베풀어 주는 일은 내가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일도 아니고, 내가 아쉬운 처지에 있기 때문에 하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 '가서' 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해 주기 위해서 가는 일 자체도 은혜가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을 떠나시기 전에 몰려든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을까? 아니면 중간에 중단하셨을까?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 1,37)." 라는 말만 놓고 보면, 아직도 병자들이 많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들을 그냥 버려두고 냉정하게 떠나신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그렇게 냉정하신 분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마태오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고(마태 8,16), 루카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고쳐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4,40). 예수님은 딱한 사람들을 버려두고 그냥 떠나실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면,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찾았을까? 루카복음을 보면, 사람들은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4,42). 그들은 병을 잘 고치는 의사를 자기들 곁에 붙잡아 두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곳에 빼앗기기 싫어했다는 것.) 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든지 안 믿었든지 간에 그들은 예수님을 독점하고
싶어 했던 것 같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를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뿌리치고 그곳을 떠나신
것은, '복음'이란 독점하면 안 되는 은혜, 널리 모든 사람과 나누어야 하는 은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만일에 '기쁜 소식'을
들은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고 혼자서만 그 기쁨을 누리려고 한다면, 그때부터는 '소식'이 아닌 것이 되고, 결국 기쁨도
희미해지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기쁜 소식'은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언제까지? 세상 끝 날까지(마태
28,20). (신앙인은 '기쁜 소식'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이기도 하고, 그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어 했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
전하여라(요한 20,17)." 이 말씀은 혼자서만 기뻐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지시입니다.
-한상우신부-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주님 사랑을
알고부터 달라진 제자들을
봅니다.
주님의 일과
사랑은 언제나
하나였습니다.
사랑은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기에 익히고 배우고
깨닫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산다는
건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기쁘게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잘 떠나는
사람이 잘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잘 사랑한
사람이 또한 아름답고
향기로울 수
있습니다.
길을
떠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치유와
회개 봉사와
기쁨이라는 십자가의
일을 주님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주님의 일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떠나온
곳은 모두
하나입니다.
하느님이
계시기에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은 사랑할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사랑의 일을
통해 모두가
기뻐지는 기쁨 가득한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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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