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적 영성과 목회전략
이기춘 교수 (감신대)
Ⅰ.서 론
전국 방방곡곡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느라 수고하시는 여러 목사님들과 함께 한국적 영성과 목회전략”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오늘 목사님들께 말씀 드릴 내용은 저의 저서인 「한국적 목회신학」이라는 책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주로 실제적인 문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Ⅱ.본 론
지구상에 존재하는 세 가지 풍토
일본 철학자 와즈쯔 데쯔로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세 가지 풍토를 설명하면서 각 풍토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고 신앙의 형태도 조금씩 다르게 형성된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첫번째 풍토로서 사막풍토를 말합니다. 이 사막풍토는 모래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극심한 메마름이 있습니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풍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땅보다는 늘 하늘을 바라보고 우러러 보면서 희망을 찾아내곤 했습니다. 이 풍토에서는 하나님이 언제나 조물주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창대케 되리라(창 12 : 2)’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사막풍토에서 올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사막풍토에서는 민족을 이루어 힘을 합해서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살아가기에 적합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땅에서 먹을 것을 생산하는 게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에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하나님 개념, 종교개념을 발전시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계의 유수한 유일신 종교들의 대부분은 사막풍토에서 발생했습니다. 유대교를 비롯하여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이 사막풍토에서 생겨난 종교들입니다
두번째는 목장풍토입니다 목장풍토는 유럽대륙을 발합니다. 양들을 키우기에 알맞은 풀과 온화한 기후를 가진 구라파의 풍토를 말합니다. 특별히 복음이 세계적인 것으로 발전되게 한 남유럽은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곳은 사막과 같이 메마르지 않고 모래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강도 있고 풀도 자랍니다. 그러므로 양도 잘 키울 수가 있으며 자연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따라서 이들은 희랍사람들이 좋아하는 관념, 즉 ‘이데아’라는 철학적인 개념을 찾아냈습니다. 이 목장풍토에서 기독교는 굉장히 많은 뿌리를 내리고 세계적인 종교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로마사람들은 이 희랍적인 문화풍토를 이용해서 이탈리아를 로마 카톨릭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세번째는 몬순풍토입니다. 이 풍토는 아시아 대륙을 말합니다. 계절풍기후인 이 풍토는 인도양과 중국 연안에 특수한 관계를 갖게 했습니다. 일년 중 육 개월 동안 이곳은 열대의 서남방으로부터 몬순계절풍이 내륙쪽으로 불어와 지독한 습도와 열기를 뿜어냅니다. 따라서 이 여름 계절풍은 식물을 무성하게 자라게 하고 정글을 만들어 냅니다. 계속해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수목이 나고 죽습니다. 이 몬순풍토 속에서 자연은 끝없이 계속되는 계절풍처럼 살고 죽는 일을 되풀이합니다. 이 풍토에서 제일 적합하게 태어난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불교는 그 결과 삶을 기독교의 삶처럼 유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출생과 죽음의 윤회가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으로 봅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 종교는 ‘어떻게 하면 영원히 사는 삶에 종지부를 찍어 두느냐’를 고민하게 됩니다. 따라서 불교의 목적은 이 윤회라고 하는 삶에 종지부를 찍어서 삶, 죽음, 탄생을 뛰어넘는 열반의 세계로 올라가는 것이 되었습니다. 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는 사건을 기록할 때 ‘때가 차매’라는 말을 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때가 차매'라는 말씀을 이 풍토에 적용하여 해석을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막이라는 메마른 풍토에서 탄생한 기독교가 직접 이 아시아 대륙인 정글지대로 오게 된다면 살지 못하게 됩니다. 모래에서 살던 사람을 무작정 정글 속에 집어넣으면 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모래속에서 태어난 이 복음의 씨앗이 구라파로 넘어 갔습니다. 목장풍토입니다. 풀이 발꿈치만큼 자라는 풍토이므로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 씨앗은 구라파에서 뿌리를 내리고 구라파 사람들의 혼속에 들어가서 그 삶의 주체가 되어 훈련을 받은 다음에 다시 아시아쪽으로 들어와 밀림 속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목장풍토에서 생긴 생명력 덕분에 시들지 않고 왕성하게 자라게 됐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역사하는 섭리입니다. 사막에서 태어난 복음의 씨를 목장풍토에서 잘 자라게 하시어 잘 자란 복음의 씨를 다시 아시아 대륙의 몬순풍토에서 왕성한 생명력을 발휘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문화 특성
우리나라는 두 가지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부성적(父性的)인 문화입니다. 이 문화는 유교에 의해서 주도된 문화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남편과 아내의 관계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는 문화풍토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문화의 하나인 샤머니즘적인 성향입니다. 불교로도 유교로도 무교를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강력한 정치적 통치력을 행사하여 무교를 억압했지만 지금도 무교는 없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 있습니다. 저는 북한산에 자주 오르는데 그곳에 가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한쪽 골짜기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모여 열심히 기도하는데, 반대편 골짜기에서는 돼지 머리를 삶아 놓고 무당들이 굿을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소리를 높여 기도하지만 그들의 징과 북을 당해내지 못합니다. 그것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며 무교의 끈질김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무교의 좋고 나쁨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렇게 한국인의 정신 속에는 부성적인 성격과 샤머니즘적이고 모성적인 감정적 성격이 끊임없이 이어져 옵니다.
요즈음 민중신학에서는 한(恨)이라는 문제를 신학적으로 조직화해서 세계적인 신학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민중신학 한(恨)의 신학’이라고 하면 서양사람들도 대부분 알아듣습니다. 저는 한국사람들에게 한(恨)이 있다면 한을 풀어 주는 것이 복음이 해야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이 한국사람의 혼을 누르고 불행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치유해 주는 것이 한국교회와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대대로 한(恨) 맺힌 민중은 무당들을 찾았습니다. 무당들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푸닥거리를 해주었습니다. 개인 굿, 동네 굿, 공동체 굿 등을 모두 했습니다. 굿이 민중들의 차지였다면 유교는 지식인들의 것이었습니다. 유교는 주로 양반을 위한 것으로 종교적이고 지식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교는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감정 표현을 억제해야 되고 체면을 잘 지켜야 하고 특별히 가정이나 사회에서 윤리와 도덕의 체계를 잘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유교는 사람의 도덕적인 양심을 부끄러움을 통해서 개발합니다. 유교의 교육 가운데 오줌을 가려야 할 나이에 가리지 못하는 아이에게 옷을 벗기고 키를 뒤집어쓰게 해서 동네를 돌아 소금을 얻어 오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수치심을 느끼게 하여 오줌을 잘 가려야겠다는 도덕적인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이렇게 유교는 지금까지 정치적인 통제력을 가지고 인간의 감정에 제재를 가합니다. 한(恨)이라는 것은 통치자보다는 민중 속에 있으며 유교보다는 무교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당은 늘 이들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해 푸닥거리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감정의 세계입니다.
한국문화 풍토는 부성적 문화인 유교와 감정의 문화어머니의문화인 샤머니즘의 두 문화가 오천년 동안 끈질기게 한국 사회를 유지해온 것입니다.
한국문화 속에서 기독교의 역할
기독교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봅니다. 둘이라는 것은 항상 갈등을 일으키게 돼 있습니다. 둘은 화해가 잘 안되고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것도 퍽 힘듭니다. 그래서 항상 셋이 중요합니다. 셋이 있으면 즘 격한 감정이 있어도, 옆에서 참으라고 말릴 수 있으며, 극도의 갈등이 일어날 때도 한 사람이 중재자 역할을 합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관을 교리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면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것은 삶을 살아가는 한 방식과 같은 것으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한국에서 제일 큰 문제는 유교적 사고방식과 무교적 사고방식이 싸우는 것이며 소위 우리나라의 지역감정도 바로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 이조 오백 년 동안 유교적인 권세를 잡아 통치한 지역이 영남학파, 경상도입니다. 이로 인해 억압을 받은 곳이 호남이었습니다. 호남은 샤머니즘의 중요한 본거지입니다. 나주는 샤머니즘의 기법이나 예술의 명맥을 제대로 유지해 온 전통있는 지역입니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전주만이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의 정치적인 판도도 그렇습니다. 호남은 광주 민주 항쟁 등으로 억압을 당해온 곳입니다. 이것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복음은 이 두 문화를 화해시키고 조화시키는 책임을 한국 역사 속에서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저는 책표지에 암소와 숫소가 쟁기를 연결시켜 이 쟁기를 가지고 밭을 가는 것을 실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쪽 황소는 유교를, 다른 한쪽 암소는 무교를 표현한 것입니다. 뒤에서 보습을 잡고 땅을 가는 농부는 복음이고 기독교입니다. 앞에 있는 두 문화적인 요소를 앞세워 가면서 싸우지 않고 올바른 목표를 향해 가도록 조정해 주는 것이 복음의 참 역할입니다. 한국의 정신적, 문화적 풍토를 갈아엎어서 이 둘이 화해가 되도록 중재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기독교가 이 둘을 화해시키는 주체가 되어 한국의 정신적인 풍토를 갈아엎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인 것입니다.
영성개발
목회자의 인격을 가장 깊이 있게 개발할 수 있는 방법은 영성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성훈련을 책 몇 권 보고 나서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다고 주장하는데, 책 몇 권 읽고 영성훈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성훈련은 일정 기간 동안 몸을 바쳐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후 훈련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신문 보는 일, 텔레비전 보는 일, 커피 마시는 것, 모든 음료까지도 완전히 끊고 일정 기간 동안-한 달이든, 두 달 이든, 몇 년이든 의식을 집중해서 심오한 영성적 훈련을 받는 데서 목회자의 인격은 개발되는 것입니다.
제가 70년도 중반에 공부를 하는데 개신교 신학에서는 처음으로 (영성훈련)이라는 과목이 도입되었습니다. 저는 카톨릭 수도원에 들어가 6개월 동안 훈련을 받았습니다. 아침 8시에 출발해서 저녁 6시에 도착했는데, 점심은 고속버스 휴게소에서 햄버거로 먹고 계속 달렸습니다. 베네딕트 수도원에 도착했습니다. 공동체 훈련이기 때문에 한 방에 5~6명씩 사용하게 됩니다. 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에 갔더니 카톨릭의 중후한 분위기가 흘렀습니다. 마룻바닥은 어두운 색깔을 칠했으며 두꺼운 식탁이 놓여 있었습니다. 수 백만 평의 수도원에 오십 명쯤 되는 수도사들이 둘러 않았습니다. 수도원 원장님이 기도를 드리고 식사를 합니다. 음식은 단백질을 다 빼낸 멀건 우유 한 컵과 보리빵 두 쪽, 수도사들이 농사를 지어 생산한 호박과, 호박잎을 우리가 참 싸먹는 식으로 삶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소금을 주었습니다. 우리 개신교 학생들은 그것이 수도원에서 먹는 애피타이저(Appetizer)로 생각하고 본격적으로 음식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루 온종일 버스를 타고 왔기에 모두들 배가 고파 재빨리 먹었습니다. 2~3분에 우리는 먹어치웠습니다. 그래도 저는 눈치가 있어 다른 수도사들과 원장님이 얼마만큼의 속도로 먹는지 보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기도하는 것 같습니다.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는 두손을 모으고 중얼중얼 합니다. 속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속도와 비슷하게 맞춰 먹으려면 천천히 먹어야겠기에 속도를 줄였는데도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다 먹어버렸습니다. 우리 개신교 신학생들은 수저를 놓고 수도사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저 사람들이 빨리 먹어야 칼과 포크를 가지고 잘라먹는 고깃덩어리가 나을 것 같은데 뭘 저렇게 우물거릴까?’ 한 삼십 분이 지나자 머리가 모두 벗겨진 70이 다 된 인자하게 생기신 수도원 원장님이 여러분 시장하셨나 보죠? 오늘 저녁식사는 이것으로 끝내겠습니다.”(웃음) 가서 주무십시오. 내일은 7시에 아침식사를 마치고 강의실에 모여 영성훈련에 들어 갑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저와 젊은 학생들은 대단히 당황했습니다. 야, 간에 기별도 안 갔는데 저녁 다 먹었다니‥‥‥‥ 뭔가 잘못 됐구나.” 아마 사람이 없어서 시장에 다녀오지 못했나? 수도원에 운전기사가 모자라서 손이 바빴나 보다. 말들이 분분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어디든지 문밖에만 나가도 먹을 것이 풍부합니다. 동전만 집어넣으면 햄버거, 닭고기, 음료수 등이 나옵니다. 미국 학생들은 생전 처음으로 배고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젠장. 빌어먹을”이라고 상소리를 하면서 먹을 것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배가 고프면 두통이 오지 않습니까? 머리가 굉장히 아파 옵니다. 배는 창자가 빠져나간 것처럼 허전합니다. 견디다 못해 그 친구들은 밤새껏 수돗물을 마셨습니다. 배가 고프면 잠도 오지 않습니다. 저도 상당히 배가 고팠지만 오랫동안 훈련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625전쟁, 14후퇴 등이 훈련이었거든요.(웃음) 저는 눈을 감고 가만히 않아 있었습니다. 동료들이 미스터 리는 배고프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아, 난 배가 고픈데 참을 만하다”라고 했더니 어떻게 참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영성훈련 받았기 때문에 괜찮다고 했습니다. 이튿날이 되었습니다. 식탁을 대했는데 겁이 났습니다. ‘이것 먹고 끝인가, 더 있을까?’ 눈치를 보면서 조금씩 먹지만 아무래도 10분을 넘기지 못합니다. 다른 신학생들은 이미 다 먹었습니다. 그러나 음식은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하루, 이틀, 삼일이 되어도 음식은 똑같은 것만 줍니다. 허기가 져 눈이 이상해졌습니다. 잠을 자려고 하면 눈이 빙빙 돕니다. 강의시간에는 전부 졸고 있습니다. 삼일째 되는 날, 제일 뚱뚱하고 덩치가 큰 한 학생이 질문을 합니다. 원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식사가 이것뿐입니까? 운전수가 없습니까? 시장에 못 다녀오는 겁니까? 우리가 낸 등록금이 모자라는 겁니까?” 굉장한 항의를 합니다. 원장님은 딱 한 마디로 얘기합니다. 여러분이 여기 계시는 동안 식사는 이것뿐입니다. 우리들도 쪽같이 이런 식사를 하고 삽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음식을 견디지 못하고 이 훈련에 참여하지 못하겠다면 돌아가십시오. 언제든지 자유롭게 돌아가십시오. 민주적으로 합니다.” 원장님은 계속해서 카톨릭에서 제일 중요한 전통 가운데 하나는 성직자의 독신이지요,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교회사에 나타난 많은 수도사들의 기록이나 동양의 선인들이 써 놓은 기록들을 보면 이십 대에 성욕을 끊어 버리는 것이 제일 어려운 고통이었다고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수도원 원장님은 음식 규제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손들고 맹세한 선서 차원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몸 자체를 그리스도의영광만을 위해서 살기에 적합하도록 훈련시킨다는 의미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성훈련의 제일 기초적인 단계가 신체훈련이라는 것입니다. 영성훈련이라 하여 마음만 훈련하는 줄 알았는데 마음의 훈련은 맨 나중에 하는 것이고 제일 중요한 것은 몸 훈련이라고 했습니다. 배고픔을 견디는 것, 무를 꿇고 앉아 있는 것, 뜨거운 태양 밑에서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 주기도문 한 대목을 가지고 일주일 동안 명상하는 것, 금식으로 몸을 피동적으로 만든 다음에 집중적으로 깊은 차원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 며칠이고 십자가 앞에 꿇어 앉아 하나님과 단독으로 대면하는 훈련 등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제일 기초훈련이 신체 훈련이라고 하면서 몇 가지 관찰을 하라고 합니다. 수도사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눈여겨 관찰해 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전혀 우리 개신교 신학에서는 하지 않는 몸의 훈련을 합니다.
수도사들은 자세를 똑바로 하고 눈은 반쯤 감고 고개를 약간 숙여 5~6발자국을 앞을 보면서 정중하게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밤에 꾸었던 꿈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를 참회하면서 기도합니다. 문여는 것도 조용히 열고 닫습니다. 길을 가다가 도랑이 나오면 개신교 신학생들처럼 깡총 건너뛰지 않고, 천천히 개울목으로 내려가서 천천히 올라옵니다. 청소하는 것도, 그 넓은 곳을 전부 그들 스스로 청소합니다. 또한 영성훈련의 기초작업으로 60~70개 되는 대리석 돌계단을 하얀 걸레로 닦습니다. 닦으면서 주기도문을 외우고 자신의 잘못된 삶을 참회하며 시편을 가지고 주님을 노래하고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시를 낭송하고 찬미합니다. 뜨거운 태양별 아래서 계속 계단을 밟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내려올 때 보면 모든 수도사들의 무릎에 피가 맺혀 있습니다. 청소하는 삶 자체가 하나의 영성훈련이었습니다. 자기의 육체의 정욕을 굴복시키는 훈련입니다. 이해인 수녀의 시 낡은 구두”를 보십시오.
내 몸을 담아서 나를 날라 주었던 것
내 무거운 몸을 지탱하느라고 닳아버린 뒤축
그것이 내 하나의 분신이예요.
정이 들어서, 다 떨어진 구두이지만 그것이 내 일생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냥 쉽게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보고 애틋한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곧 영성훈련입니다. 먼지를 닦는 것도 먼지를 닦는 동시에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인도의 캘커타 뒷골목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있는 테레사 수녀님의 일기에 보면 제일 먼저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는 옷이 두 벌 있다. 그래서 내가 집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빨래하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을 나누어주고, 빵을 나누어주면서 돌보는 그 모든 봉사의 피로와 땀을 빨래로 씻어내는 겁니다. 세탁해서 널어놓고 어제 세탁한 것으로 갈아입는 것, 이것이 바로 수도사적인 체험에서 나오는 신학입니다. 우리 나라에 있는 대부분의 기도원을 보면 대중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지 깊은 영성을 개발하는 차원의 것은 별로 없습니다. 수도원에서 마이크를 쓴다는 것은 전혀 적합하지 못합니다. 전화도 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목사님들은 이런 훈련에 며칠 오시면 전화가 불티나지 않습니까? 집에 연락하시고 교회에 연락하시고‥‥‥‥ 그러므로 몇 날 정도라도 완전히 세속세계와 단절되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제일 먼저 명상훈련을 합니다. 열 사람씩 각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조용한 방으로 들어갑니다. 모든 커텐을 내리고 불을 끄면 가운데 등 한 개가 켜지고, 동그란 책상 위에 하얀 시트, 그리고 그 위에 사람 머리만한 돌떵이가 놓여 있습니다. 돌과 대화를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각-집 생각, 공부하는 생각, 설교하는 생각 등등-을 모두 버리고 진지하게 돌을 보면서 돌과 대화하라고 합니다. 돌과의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하며 돌과 대화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지 않고 하루 종일 있게 합니다. 돌을 보자 의혹이 생겼습니다. ‘영성훈련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데 제일 먼저 한다는 것이 돌을 바라보라는것일까?’ 저와 같은 경우는 부지런히 책보고 빨리빨리 논문써내고, 공부 마치고 돌아가는 건데 ‘잘못 걸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생들은 돌멩이를 5분도 못 봅니다. 배고프고 졸리우니까 그냥 엎드려 잡니다. 코를 골고 침을 질질 흘리며 형편없는 자세로 잠을 잡니다. 수도원 원장님이 와서 깨우거나 잔소리를 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사람들보다 즘 늦게 잠들었을 뿐이지 돌을 계속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삼일쯤 되니까 굉장한 반항심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이 돌이 뭔데‥‥‥‥ 한국에서 온 나에게 왜 미국 돌을 보라는거야. 내가 목사인데. 미국이 좋으면 좋았지 무슨 돌까지 이렇게 굉장하다고 이걸 보라는 거야’ 그러나 참 이상한 일입니다. 사 오일쯤 지나고 나니까 마음에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돌을 보라고 그러시는데 한번 봐라. 수도원 원장님은 일생동안 이런 수도사들을 훈련시키신 분으로 아주 원숙하고 성숙한 분이신데 그 분이 이걸 보라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항감에 대한 반대급부의 저항감이 생겨났습니다. 훗날 저는 이것을 ‘복종을 가르치는 성령의 역사’라고 해석했습니다. 현대인들은 복종이라는 말을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특별히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이 땅에서 복종한다는 것은 아주 원시적인 개념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저는 복종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진지하게 돌을 바라보았습니다. 잡념을 버리고 똑바로 앉아서, 돌을 바라보니 돌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두 세 시간이 지난 후에는 돌이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돌이 줄었다 늘었다 합니다. 제가 숨을 쉬면 배가 들어 갔다 나왔다 하는 것과 똑같았습니다. 돌이 하나의 생명으로 보입니다. 돌에 숨구멍이 있고 아름다운 색채가 있으며 돌이 신축하는 과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허기가 지고 졸렸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려고 살을 꼬집으며 눈도 비비고 지냈습니다. 옆에서 서양 학생들이 자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점점 어떤 영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아! 돌아! 내가 나이 높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왔는데 어머님의 얼굴로 변해 보렴.″ 그러자 돌이 어머님의 얼굴로 변합니다. 우리 아이들과 아내로도 변합니다. 영성차원에서 제일 먼저 뚫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 세상의 시간입니다. 돌파해야 합니다. 비행기가 속도를 내려면 소리보다 빠르게 날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시계로 정해진 시간을 돌파해야만 영원한 시간의 맛을 알게 됩니다. 성서의 말씀과 똑같습니다.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이 정말입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관계도 그와 똑같습니다. 세속적인 시간을 돌파하며 의식을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매료되어야 합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비젼을 꿈꾸면서 깊이 들어갑니다.
기도원에서 밥을 조금 주는 이유도 훈련이 제일의 목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오늘 산에 올라가셔서 서너 시간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신다면 기도하기에 알맞는 정도의 음식을 잡수셔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기도하러 가겠다고 하면서 수저 잡은 김에 먹어두자 하여 갈비 2인분 내지 2인분 반 잡수시고 이왕 먹은 김에 아주 든든하게 먹자고 해서 냉면 사리 잡수시고 또 커피까지 드셨다고 합시다. 그리고 나서 한번 기도해 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5분도 못되어 졸게 될 겁니다. 이 정도되면 기도하기 위해서 잡수신게 아니라 주무시기 위해서 잡수신 것이 됩니다. 신령한 생활을 하고 영적인 차원에서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데는 음식이 상당한 영향을 줍니다. 이런 이유에서 수도사들이 먹는 음식은 집중하기에 알맞은 정도였습니다. 음식물을 소화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식사법을 피하는 것입니다.
돌을 계속 바라보자 아름다운 환상이 나타납니다. 홍학이 춤추는 듯한 환상입니다. 저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친구를 따라 로스엔젤레스 동물원에 가서 홍학의 아름다운 춤을 보았습니다. 세상에서 보고들은 경험들은 중요한 영성적 차원의 자원들입니다. 홍학이 오백 마리쯤 되는데 춤을 춥니다. 앞으로 가고 뒤로 가고 날개를 벌리고 고개를 숙이고 고개를 들고 아름다운 음악에 맞추어 사육사의 신호에 따라 통일된 행동을 합니다. 그런 아름다운 장면을 보니 배고프다는 생각도 잊게 됩니다. 제 옆에서는 다른 학생들이 코를 골며 자고 있지만 저는 도무지 그런것이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깊은 차원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환상 속에서 한 마리의 홍학이 훼방을 놓습니다. 다른 홍학들이 앞으로 나오면 뒤로 가고 뒤로 가면 앞으로 나오고 고개를 들면 숙이고 숙이면 저는 들고‥‥‥‥ 그것을 보며 제 마음속에는 ‘저걸 끄집어내야 아름다운 조화가 살아나지. 저 한 마리 홍학 때문에 아름다운 조화가 완전히 무너지는구나. 저 녀석을 집어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어내라. 집어내라’ 얼마 동안 지나고 보니 아주 순간적으로 그 훼방 놓는 홍학의 대가리가 이기춘의 머리로 됐다가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보니 홍학입니다. 그러나 다시 이기춘의 머리가 됐다가 홍학대가리로 돌아갑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좀 더 빠르게 이기춘이 됐다 홍학이 됐다 합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완전하게 제 모습으로 변해서 훼방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왜 저기 있습니까? 왜 제가 저것입니까? 왜 제가 저 정도밖에 안 됩니까? 화가 나고 수치심이 생겨 항변합니다. 저 것은 내가 아니다 내가 그럴리가 없어.” 항의하고 부정하려 애를 쓰는데 어느 정도시간이 지나자 무슨 레이저광선같은 비둘기가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날아오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의 과학기계가 만든 그런 것이 아니라 아주 밝은, 하늘에서만 올 수 있는 그런 섬광이 저를 비추어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너무 가슴이 뜨거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뜨겁고 강렬한 느낌은 저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주님을 부르면서 나를 도와주십시오. 제가 견딜 수 없습니다” 라고 소리쳤습니다. 거기서 저는 잘못된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신학교를 나오고 목회도 8~9년 하고 기관 목회를 하다가 유학을 가면서 저는 야망이 생겼습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학위를 받고 충실히 어학을 하여 많은 자료를 확보해 설교하며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범위까지를 섭렵해서 유능한 목회자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삼십 대에 그런 꿈들을 꿉니다. 저도 똑같이 그런 꿈을 가지고 공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홍학환상이 저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목표는 네 동역자들보다 뛰어나 보이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남들보다 더 많이 알고 몇 발자국이라도 앞질러 가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하고 그런 욕망으로 목회선상에 서 있을 때에는 동역자를 누르게되고 친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게 된다. 그것은 목회자가 되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추한 인간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으며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의 참된 모습이 아니다.’ 아직도 유치한 차원에서 맴돌면서 공부하고 있는 제 모습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 삶이 이것 밖에 되지 않았나 생각되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거기에 대해 저 자신을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말을 영어로 하라. 일기도 영어로 쓰고, 메모도 영어로 하라. 한국에서 왔지만 한국어는 한 마디도 하지말라”는 주의를 무시하고 우리 말로 통회, 자복하고 저의 잘못된 점을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전부 털어놓고 참회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녁식사를 하면서 제가 나오지 않으니까 “미스터 리가 우리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아 아마 피곤하고 허기가 져서 그곳에서 자고 있나보다. 우리가 가서 깨워야겠다고 수도원 원장님에게 이야기했나 봅니다. 그분은 매 시간마다 돌아다니시며 학생들 얼굴 하나하나를 살펴보셨습니다. 아마 제가 똑바로 앉아 이야기도 하고 울기도 하여 ‘뭔가 이 세상의 시간을 돌파하는 문턱에 저 학생이 들어간 모양이다’ 생각하셨는지 함께 올라오셨습니다. 원장님은 그들에게 저를 깨우지 말고 창문도 열지 말고 커텐만 젖히고 살짝 보기만 하라고 하셨답니다. 제가 우리말로 죄를 고백하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됐으니 형편없었을 겁니다. 미국 학생들은 “저게 방언이라는 겁니까?” 하고 원장님께 물었답니다. 그러자 “나는 잘 모르겠다. 방언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영어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제게 찾아 온 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것, 이것이 자각훈련의 제일 첫번째 단계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장점을 찾아내는 것보다는 자기의 결함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모든 동기를 다시 한번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제가 신학교에 다니면서,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체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목회 중에서도 이런 사건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잡는 회개 운동이 우리생활 속에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 후 일주일 동안 금식훈련에 들어갔습니다. 미국 학생들은 무척 어려워합니다. 금식훈련 중에도 그저 먹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십자가를 보면서 명상을 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그 뜻을 생각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삼 일 동안 무척 고통스러웠습니다. 두통이 나고 배가 고파서 위장에 통증이 왔지만 닷새, 엿새를 지나자 고통이 사라지고 평안해졌습니다. 일주일을 넘기게 되니 마음에 평화가 왔습니다. 집중이 잘 되고 명상하며 말씀을 읽는 것이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고 싶고 이해하고 싶고 친구가 하는 말을 될 수 있는대로 지지해 주며 깊은 차원의 대화를 원하게 됩니다. 그것이 영성훈련의 기초적인 훈련입니다. 그런 차원에 들어가서 목회를 다시 한번 검토해보며 읽는 성서의 말씀은 아주 새롭게 다가옵니다. 저는 거기서 주기도문을 정리하였습니다. 일주일 동안 주기도문을 명상하였습니다. 주기도문에 제일 먼저 나오는 말이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기도문을 예배의 마감 순서로 알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마치면 예배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우리 기독교인의 살 가치를 말해 줍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사는 것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똑똑히 부르는 것이 기독교인의 첫째 사명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똑똑히 알아야 똑똑히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겠습니까? 나이로 따져 보면 이십 대 청년은 아닐 것 같고 백 살이 넘어선 눈꼽이 꾀죄죄하고 기억이 상실된 망각증의 할아버지 또한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하면 오십 대를 넘어서신 분으로 약간은 벗겨진 머리에 수염을 날리시는 분일 것 같지 않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옷을 입으셨다면 흰 옷을 입으셨을 것입니다. 요즈음의 ‘크리스챤 디올’이니 ‘체스맨’같은 것을 입으셨을리는 없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청바지를 입으셨다고 상상하는 분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동차를 타시지 않고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다니실 분으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권능과 능력의 이미지를 위해서 지팡이도 하나 가지셨을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산신령의 모습입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산신령 개념의 도입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샤머니즘에서 말하는 물귀신은 물에서만 세력을 펴는 귀신으로 땅에 올라오면 꼼짝을 못합니다. 마당신은 울타리 안에서는 힘깨나 쓰지만 울타리를 벗어나면 꼼짝 못합니다 측간 각시라는 귀신은 화장실 안에서만 힘씁니다. 삼신할머니는 안방에서 애기 날 때 힘 씁니다. 그러한 개념 앞에서 기본적인 신앙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똑바로 알고 하나님을 찾아야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도 모르고 그저 주술적으로 하나님을 부르니까 하나님에 대한 의미,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자각이 안되어 신앙의 성숙이 지연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알고 불러야 합니다
저는 주기도문 외울 때 지금까지 쉽게 넘어가지 않고 늘 맘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목에 가시처럼 양심의 거리낌으로 남는 대목 가운데 하나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 중간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가용을 갖기 원하며 넓은 집을 갖고 싶어하고 정원과 별장도, 골프 회원도 되고 싶고 술 마시고 싶고 장난하고 싶은 시대입니다. 우리 문화도 서구 향락주의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국토 전체가 ‘하나님이 주신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 아니라 투기의 대상입니다. 특별히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전 국토의 40%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서울에 있는 교회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외쳐야 합니다. 교인들 가운데 땅 투기하는 사람들을 목회자의 양심으로 질책해야 합니다.
1980년대 중반, 85년부터 우리 한국 교회의 성장 추세가 점점 둔감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성장은 되지만 속도가 점점 느려집니다. 신구교나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는 종교 대체물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욕망이 자가용 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주일날도 놀러가고 싶고 해외 여행도 하고 싶어합니다.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걷는 마지막 길은 술 먹고 마약에 손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 나라도 마약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한국 사람들의 영성, 즉 삶의 가치를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기독교의 사명입니다. 샤머니즘? 이것은 기복적입니다. 유교? 지극히 현실적인 것입니다.
기독교 인간관으로 지향
저는 목사님들께 강의 제목을 드리면서 기독교의 영성에 대한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통전(通典)적으로 연구해야 합니다. 또한 기독교의 영성을 이해하려면 기독교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성서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표본은 사도 바울의 인간이해 입니다.
기독교 인간관은 삼각형 구조이고 희랍사람들의 인간관은 이원론으로 해석하여 인간을 영과 육체로 나눕니다. 영과 육체는 늘 싸우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인간은 신체라는 감옥 속에 영혼을 가둬 놓고 삽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육체의 감옥 속에 살기 때문에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으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면서 육체는 땅으로 떨어지고 영은 하늘나라를 향해서 높이높이 날아갑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을 때는 멋있게 죽었습니다. 독배를 들고 제자들에게 설교하며, “내가 아무개한테 병아리 한 마리를 빌려 먹고 못 갚았는데 갚아 달라. 나에게 자꾸 도망가라고 하는데 도망가지 않겠다. 악법도 법이니까 죽겠다”라고 말하면서 독배를 마시고 죽었습니다. 그도 죽음을 영과 육이 갈라지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영혼이 해방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인간이해는 그렇지 않습니다. 영과 혼, 그리고 육으로 나눕니다. 혼이라는 것은 이성, 곧 정신입니다.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성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것도 이성에 속합니다. 몸은 음식을 먹고 건강해야 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몸과 혼, 두 개만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영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을 가지고 자기의 육체와 정신을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은 인격의 주도권을 가진 지도자가 되어 육체로 하여금 높은 차원을 향해 올라가게 해야 합니다. 육체란 경제적인 생활, 경제문화입니다. 혼은 정신문화입니다. 그런데 영이 이 둘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육체를 이기기 위한 종교적인 훈련이 많았습니다. 육체를 억압하는 것을 금욕주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또 인간의 이성을 억압했던 중세기사상에 대해 옳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억압하면 열광주의자가 됩니다. 합리적인 것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반대로 인간의 영을 없애버리는 유물사관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물질주의가 나옵니다. 기독교는 물질주의도, 금욕주의도, 열광주의도 아닙니다. 인간의 영이 육체와 정신을 아름답게 조화시켜 높은 차원 즉, 하나님의 영과 대면하고 만나는 삶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기독교 영성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인간의 혼에 해당하는 것은 유교의 영성입니다. 그것은 이성, 윤리, 질서 등을 말합니다 인간의 감정에 해당하는 것은 샤머니즘입니다. 이 두 개가 한국인들의 기질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 둘을 개발하고 그리스도로 조화를 시켜, 높은 차원으로 인도하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가장 친숙한 관계를 맺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해야 하는 이 시대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우리는 이 사명을 위한 목회를 해야 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인간의 머리에 관한 연구가 활발합니다. 애슈 부룩이라고 하는 미국의 신학자는 인간의 두뇌와 신앙을 연구하며 평생을 지냈습니다. 인간의 뇌는 좌뇌와 우뇌로 되어 있습니다. 좌뇌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며 이성적인 생각을 합니다. 말을 하고 추리하고 계산하는 것이 좌뇌의 기능입니다. 우뇌는 모든 것을 전체로 보고 느끼고 통찰합니다. 만약 교통사고가 나서 오른쪽 뇌를 다치면 사람의 감정이 없어져 버리고, 왼쪽 뇌를 다치면 기억을 잃거나 말을 하지 못합니다. 이 두 개가 조화되어 있을 때 건전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의사 한 분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지방질과 단백질을 먹지 말고, 고구마나 감자를 먹어야 좋다고 방송하니까 고구마, 감자가 동이 났습니다 고기를 파는 사람들은 많은 손해를 보았습니다. 이 얼마나 감정적인 사람들입니까? 체질에 따라서 고기가 필요한 사람, 야채가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지방질을 조금도 먹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도사들은 채소만 먹고도 살 수 있습니다. 자기 체질에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반응하지 않고 무조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이것이 곧 샤머니즘의 영성입니다 여기 오는 도중에 저는 신앙촌을 보면서 새로운 생각을 했습니다. 신앙촌 운동이 한참 격렬했을 때 상당히 많은 교계의 지도자들이 신앙촌을 찬양했습니다 박태선을 ‘이 시대의 예언자’ 라고 칭송했으며, “신앙촌운동을 하는 박태선씨는 정말 감람나무다”라고 떠받들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질을 암시해 줍니다. 기독교 복음이 한국사회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일에 아직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저는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베토벤의 “운명”과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서양음악을 한 사람들은 앉아 들을 수 있지만 한국의 일반 대중은 그저 “한오백년”을 들어야 좋습니다. 꽹과리 치고 북치는 사물놀이를 보면 속에서 감흥이 일어납니다. 밥 먹고 김치 먹으며 오천 년 동안 살아 온 것이 우리의 체질입니다. 나쁘고 좋고를 떠나서 우리 체질입니다. 우리 보고 빵만 먹고 한 달을 살라고 하면 굉장히 힘들어합니다. 밥과 김치는 평생을 먹으며 살아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양사람에게 밥, 김치 먹고 한 달만 살라고 하면 못 삽니다 이것이 체질입니다. 또 우리 한국의 가정에서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막론하고 아들을 선호하는 습성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부성적인 권위를 내세웁니다. 이러한 체질조차 복음의 확산과 한국인들의 심성을 변화시키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서양의 예배처럼 엄숙하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예배는 흥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한(恨)을 어떻게 풀어냅니까? 한을 풀어내는 방법은 사람의 가슴 속에다 흥을 불어넣는 겁니다. 신바람나게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몰랐는데 복음을 받아들여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함 받고,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속한 일원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산다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끝내주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아주 좋아하는 가수가 멋있는 노래를 부르면 “끝내 준다! 끝내주내 !”라고 표현합니다. ‘끝내준다’라는 말은 시작의 반대입니다. 시작한 것을 문닫는 것을 끝내 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좋다’는 뜻을 함축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엔 좋은 음악을 듣고 기쁘고 즐거우면 “죽여주느만!”(웃음)이라고 합니다. 제가 그 말이 한참 유행할 때 청소년들에게 설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은 ‘ 끝내주는 분’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사건을 들면서 “끝내주었지”하고 말했고 아픈 사람에게도 “끝내주시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아서 뽕나무에 올라갔으니 끝내주었지 않느냐고 설교를 했습니다. 제자들도 고기 잡아서 부자가 되려고 하다가 사람 낚는 끝내주는 어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또 ‘죽여주는군!’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위해 죽어 주셨습니다. (웃음)
한국인의 심성에 흥을 돋구고 신바람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가능성입니다. 신나면 조국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칩니다. 신나면 시간외 노동을 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그런데 한이 있으면 그렇게 못합니다. 화가 나면 즐겁게 일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오천 년 동안 억눌려온 모든 한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이며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시는 분이라 사실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홍하는 시간은 신나는 시간입니다. 신이 났을 때 나라를 지킵니다. 많은 애국자들이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칩니다. 그러므로 한국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가능성에다 성령의 불을 폭발시켜야 복음의 의미를 사회적으로 확산시켜 나갈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을 유교식으로 하려는 습관에 빠져있는데. 이것이 지난 오천 년 동안 우리가 살아온 표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토양입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것을 창출해야 합니다. 토양은 그대로 두고 흙을 갈아서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나쁜 땅을 옥토로 만들어 돌짝밭을 제거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국적인 영성을 촉발해 주고 한국인을 현실주의적이고 지극히 기복적인 삶의 구조로부터 높은 복음을 향해서 나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한국적인 목회의 전략입니다. 동시에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기질과 가능성을 복음으로 조명해서 촉발해 주어 새로운 인간형성, 새로운 인격형성,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21세기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