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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정의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등의 시들에 대한 평설/ 차창룡, 정효구, 송재학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1 (외 4편)
진이정
무엇이 착함이고 무엇이 악함인가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려
나는 천수경을 외었다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해주소서
훈제 통닭의 일생이여
나는 영원히 사람이다 바퀴벌레조차도
자신을 사람으로 의식한다
누가 손가락질하랴
나는 어질지 않았다
나는 꿈을 밀수하러 부둣가를 서성거린다
낡은 비유만이 내게 허용되어 있어라; 바람 없는 바다의 돛배처럼
바다도 없이, 바다도 없이, 나는 항해한다
아버지, 알고 보니 제가 주였나이다. 나의 십자가는 정전되었다
심심산골의 푸른 구름을 부러워하지 않으리
망망한 저 바다의 물, 나는 그 맛을 아네
그 맛의 이름은 적멸이다; 나는 적멸로 궁궐을 짓고 아예 들어앉는다
나는 지옥을 믿어: 쾌락과 나라는 존재를 믿듯이
저 저 미륵전이 내 의식의 그림자라니
그럼 나는 의식을 버리리라; 미륵전이 갈 곳, 알지 못해도
아버지, 저는 당신의 가스와 기름과 향로로 만들어졌나이다
하느님은 딴따라다
남사당 가락을 듣자마자 가출해 버린 소녀의 후손?
할아버지는, 그 소녀를 영영 이해하지 못한다
할아버지도 그 소녀 의식의 그림자이다
그림자와 의식은 동일하니?
그럼 나는 뭐니? 나는 아귀의 마음을 이해해
배가 고파
한강이 푸른 사파이어 같다는 자는
이 거대한 배고픔을 이해 못해
나는 하도 급해 불을 마셨다; 다행히 비유적으로 뜨거웠다
나도 네게 비유로만 말하리라
달은 노래한다; 구름에 나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상형을, 나는 고슴도치 시절에 만난 적이 있다
시간 있으세요, 장미 한 송이의 욕정이랍니다
내 예쁜 가시를 보아주셔요
고드름의 일생은 내 적성에 맞아
아버지, 제가 주였나이다; 제 십자가 때문에 열대 우림이 잘리고 있어요
나는 운수를 믿는다 바다 없이 항해할 때처럼
눈물도 없이 나는 운다 울었다
너무 팔아먹을 것이 없었으므로
거꾸로 선 꿈의 세상에서, 가끔 나는 바로 선다
깜빡 꿈이란 걸 잊은 채 말이다
허나 고런 때래야,
겨우 시가 되는 것이다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2
미안해, 나는 성욕을 딱 잃고 말았다
왜 사람들은 날 걱정할까
순두부처럼 살고 싶었다
말도 안 돼
지금부턴 너를 독점하리라
랍비가 있는 풍경이 날 웃게 했다
공동번역 성서를 읽고 있는 평양의 인민들,
나는 수령이란 낱말을 찾아 레위기를 헤맨다
누가 내 몸 안에서 섹스를 하나 봐
헐떡이는 소리, 세살 이후부터 끊이지 않고 있다
나를 사랑하는 헬리콥터 조종사가 머리 위에서 붕붕거린다
그는 흑인이다
편견이 곧 나다; 나를 버리기란…
그를 쫓아주세요 외국 군대에 언제까지 의지해야 하나
미국이 잘 되는 이유는 리더스다이제스트에 다 들어 있다
나는 불타고 있는데, 아무 데도 맞불은 보이지 않아
미끼라도 물고 싶어
결혼식장이 어물전 같아
비리지 않은 여자를 만나고 싶다
기고 싶다, 비비고 싶다, 까고 싶다
내 인생은 재즈라기보단 헤비메탈이다
내 서정의 목은 늘 쉬어 있다
흥행을 위해 나는 빤스를 벗는다
내 인생은 기울고; 해도 기울고
절망 아니면 희망이겠지; 변해 가는 건 변해 가라지
사랑의 불, 인연의 재, 그리고 권태만이 남으리라
너는 보는 즉시 추억으로 화했다
표정만방지곡을 듣고 싶은 밤
집 밖을 나가지 않아야, 천하를 알게 되리라
우주는 교미중이다; 호모인 주제에 말야
내 풀무 허파, 불난 내 몸 부채질하네
빗방울과 땅바닥이 사무치듯
나의 눈물 지도는 은하계에 퍼져 있다
우주의 시초가 인다 한들,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이런 느낌 너무 흔해
야야야, 나는 노래하는 랩 생쥐, 말콤 엑스의 제자라네
아버지, 나는 어머니를 의심했답니다, 날 핥아 주세요
네게 불성이 있다니,
그럼 나는 불성을 포기하리라
신라도 망하고 소련도 망하고, 화랑 관창은 살맛 날 리 없어라
나는 토하는 것이 두려워, 기침을 참는다
내 인생은 너무 모호했노라
모호함이 모여 가래가 되었나 봐
시인의 기침은 너무 상투적이야; 시인은 정작 구토를 걱정할 터이다
구토, 희망, 나는 합장으로 인사하리라, 나무 프리지아 보살마하살
목단향으로 나를 태워다오
몽정의 나날이야, 꿈의 정액이여; 어디 마땅한 질을 찾아가거라
비단 같은, 비로도 같은, 총구멍 같은, 융단 같은, 너의 질
둔중한 성기로 매를 맞고 싶다
마음 내킬 때마다의 선행으로 구원되리라 믿진 않는다
그게 내 유일한 장점이다
그래 자살도 못하는 것이다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5
나는 빛과 피가 섞인 칸타타를 작곡했노라
차마 현실에게 물고문을 하진 못하겠어
난 성실하게 꿈을 꾸어왔지
우린 꿈과 같이 있기만 해도 스캔들이 났던 거야
혀도 코도 눈도 귀도 몸도 뜻도 없는 천국을 위하여
난 감각기관을 심청이처럼 봉양해 왔다
아버지, 난 모성애를 비판해 왔어요
내 단골 유곽은 화락천에 있다; 외상장부를 가져와 다오
비에 젖은 나뭇잎, 낙엽이 되기 전에 겉늙었노라
여름밤에 인생을 토해 버렸다, 나는 뭔가를 맛보긴 한 것이다
하하, 색소폰의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난 모든 종류의 우상화에 반대하노라, 제석천의 우상화조차
오, 너의 유방을 밤새 주물렀더니 피로하네
내 친구들은 모두 서대문 형무소에 있다
나만이 명월관에 죽치고 있어
또 죽을 꾀를 내누나
사소한 이유로 사선을 넘어간 여자들처럼
내 청춘은 사라졌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삼바춤을 추며 쿠데타를 모의하고 싶다
남도의 바람을 마시며, 그녀를 생각했노라
나는 경전에 찌들어 있어
도시 게릴라전을 익히느라, 이십대를 보냈다
내가 수호해야 할 도시는 날 건달로 방치했다
한참을 나는 숨죽이고 있었다, 모든 게 현실이었다
민족반역자들이 출세한다, 나는 화장실에서 씩 웃었다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어, 나는 추한 삶조차 마다하지 않는다
내가 숨 쉴 곳은 어디냐
나는 더 이상 젊은 시인이 아니로다
오랜만에 가로수에 몸을 기대고, 밥이 꺼지기를 기다렸다
가로수의 피부가 너무나 낯익어,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로수는 내게 물었다; 왜 이제야 돌아왔느냐고
나는 몸이 다 망가졌기 때문에 돌아왔다고 했다
가로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밥이 꺼졌다
내 인생도 꺼져 있었다
걔네들 이상해, 굶기 전까지 우유와 고기만 먹어왔다는 거야
나의 자비심은 이제 한계를 보인다
아버지, 저 아직 살아 있나이다
콥트 기독교도의 수도원에서 한철을 나고 싶어라
화석, 옛사랑의 화석, 내 발길에 채이네
가슴이 아파, 화석의 가슴에 마음을 비볐네
용감하게 돌진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토너먼트가 아니었다
차라리 고려 왕조가 계속 되었더라면
나는 무신이 되었을 터이다
나, 걸어가리라, 허망을 딛고, 낯선 인연 따라서
백과사전도 없이, 나는 지식인 노릇을 한다
나를 가르친 건 휘중당의 담쟁이덩굴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참기만 해 왔어
그게 인생이란다; 개 같은
나의 무지와 무기력에 혐오를 느끼는 분들께.
나 변하지 않으렵니다
아트만의 나날들
약 냄새,
돈은 슬퍼라,
어린 육체보다 더 슬픈 십원짜리 지폐,
황혼, 두견, 소양강 처녀보다 더 슬픈
내 어릴 적의 십원짜리 지폐,
미국 중앙정보부가 노나주었던 십원짜리 지폐,
어느덧 나의 사회과학적 상상력은 그 사내의 선의를 믿지 못하네
코끝에선 약냄새가 났고,
미친 듯이 돈을 뿌리는 백인 병사의 곁을 지나
적산가옥 앞길을 지나
포대기에 업힌 나는 어디론가 실려가고 있었다
외삼촌의 술주정이 약냄새에 섞여 날 어지럽게 한다
박카스를 한 병 마시곤 다시 잠든 외삼촌
그는 영원히 잠들어 있다
그의 아트만은 사라지고 없다 한다
그러니 거룩한 브라만의 존재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내가 그리워하는 건
박카스에 취한, 구체적인, 생생한 그의 아트만이다
난 그런 현실감에 목마른 것이다
자동차 바큇살을 호이루라고 부르던 시절,
'빵꾸 나오시' 집에서 나는 살았다
일용할 봉지쌀과 함께 퇴근하던 외삼춘의 구체성은
저 머나면 브라만 속으로 사라졌다 한다
그러니 내가 브라만을 좋아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봉지쌀의 아트만이 사라졌듯이, 내 유년시절의 아트만들도
이젠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기분을 슬프다고 하는 것일까
이 범아일여의 천지에서 아니 슬픈 것이 무엇이던가
오십환짜리 백동전처럼 남루한 슬픔이지만,
슬픔의 화폐개혁은 아직도 기약 없어라
슬픔의 지폐에서 길어올린 육십년대 꼬마의 쾌락들,
땡이와 연필 함대, 크라운 산도, 코롬방 아이스케키……
고 코묻은 아트만들,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다, 라는 말씀조차
내겐 더 이상 위안이 되지 않는다
브라만을 믿지 않듯, 지금 나는
온갖 종류의 아트만을 신뢰하지 않는다
죽으면, 그렇다……
그냥 없어지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거의 삼십 감자가 흘렀다
그리고 나는 중년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제 난 구체성의 신, 일상성의 보살만을 믿기로 한 것이다
덧없음의 지우개 앞에, 난 흑판처럼 선뜻 맨살을 내밀 뿐이다
아트만이 무너진 마당에
인생이 꿈이란 건, 그 얼마나 뻔한 비유인가
이제부터 나의 우파니샤드는
거꾸로 선 현실이다
하지만 못내 구체적인, 빵꾸 나오시 가게의 흙바닥에 굴러다니던
호이루와 몽키스패너들의 그 완강함이다
나, 아트만 없이 숨쉬고 있다
브라만에 구걸하지 않으리라
난 이제서야 그 옛날의 십원짜리 지폐를 꺼내든다
그 슬픈 돈을 내고 구체적인 박카스 한 병 사먹으리라
슬픔의 드링크에 취해, 내내 위안 받으리라
나라는 물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라는 각성이
둔한 내 뒷골을 쑤셔야만 하리라
하하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니
그럼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단 말인가!
엘 살롱 드 멕시코
엘 살롱 드 멕시코
라디오의 선율을 따라 유년의 기지촌, 그 철조망을 넘는다
그리운 캠프 페이지, 이태원처럼 보광동처럼 후암동처럼 그리운 그리운
그립다라는 움직씨를 지장경에서 발견하곤 난 울었다
먼지 쌓인 경전에도 그리움이 살아 꿈틀댔던 것이다
전생의 지장보살도 어머니가 그리웠던 것이다
어머니가 그리워 보살이 되었던 것일까
그리워한 만큼만 성스러워질 수 있다는 비유일까
엘 살롱 드 멕시코가 그립다
난 왜 그리움 따위에만 허기를 느끼는 것일까
이태원을 무작정 배회하고 싶다
그나마 내 고향집 근처를 닮은 곳이기에
아마 난 뉴욕에서도 기지촌의 네온사인을 그릴 것이리라
후암동의 불빛이 보고파 눈물지었다는 맨해튼의 어느 교포 소녀처럼
기껏 그리움 하나 때문에 윤회하고 있단 말인가
내생에도 난 또 국민학교에 입학해야 하리라
가슴에 매단 망각의 손수건으론 연신 업보의 콧물 닦으며
체력장과 사춘기 그리고 지루한 사랑의 열병을
인생이라는 중고시장에서 마치 새것처럼 앓아야만 하리라
악, 난데없이 내 맘 속에서 인류애가 솟구친다
이 순간 내 욕정은, 그리움으로 잘 위장된 내 욕정은 온데간데 없다
이게 제정신인가
아님 무슨 인류애라는 신종 귀신이 날 덧씌운 것인가
그날 살롱 멕시코, 어둡고 초라한 이국의 병사들 틈에서
딸라 한닢 없던 외삼촌만이 명랑하게 딸랑거렸다
샌드위치와 위스키를 시키고 나서
용케 합석시킨 지아이의 붉은 뺨에 뽀뽀하던 외삼촌,
그립다, 어수룩한 그 백인 병사마저
엘 살롱 드 멕시코
이젠 자꾸만 들어가고 싶은
그래 캠프 페이지 위병초소의 산타클로스와 함께
딱딱한 미제 사탕을 입에 물고 예배당을 두리번거리던 나, 나
성조기는 사라져도 그 단맛만은 영원하리라
나의 엘 살롱 드 멕시코를 적시는
외삼촌의 스트레이트 위스키처럼, 여태 숙취로 남은 그 취기처럼,
그 옛날의 그리움에 어느새 난 샌드위치되어 있다
내 해탈한 뒤라도 그 그리움만은 영겁토록 윤회하리라
엘 살롱 드 멕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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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정 (1959~1993) | 강원 춘천에서 태어났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삶의 궤적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본명이 박수남이라는 것, 그리고 어린 시절 큰집에 양자로 가서 살았다는 것 정도이다. 춘천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뒤 서울로 올라와 유학을 하면서 대성고를 졸업하고 경희대 영어교육과에 입학한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굿패 모임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 시절 만난 유하를 비롯해 김성수, 안판석 등과 함게 '관극회'라는 모임을 결성하고 영화, 연극, 미술 등에 관한 평론을 하기도 하였다.
19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하게 되지만 그의 시 자체는 민중문학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의 시가 지닌 철학성은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있지만 일반적인 불교적 경향의 시가 지닌 선적인 특성을 무시하고 사바세계의 혼돈스러움과 해탈의 욕망을 요설적이면서도 명징하게 드러낸다. 1989년 유하, 박인택, 함민복 등의 시인들과 ‘21세기 전망’ 동인을 결성하면서 합평과 작품 활동에 몰입한다. 그러나 군 제대 후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됨에 따라 주변 사람들과의 접촉이 드물어졌고 결국 첫 시집의 출간을 앞둔 1993년 11월 지병인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죽은 다음 해인 1994년 유고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가 출간되었다.
—시집『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세계사, 1994)의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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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5」감상
오늘은 죽은 시인을 말하고 싶다. 요설의 상상력이라는 용어를 진이정의 약력에 덧붙이고 싶다. 죽음 앞의 담담함을 먼저 생각나게 하는 이 시가, 진이정이 스스로 죽음의 기미에 몸을 맡기고 쓴 후일담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여기에는 스스로를 “나는 떠도는 자이므로, 피사 사탑의 기울기에 인생을 걸 것이다”로 인식한 사람의 자의식이 있다.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연작들은 모두 비꼼과 뒤틀림이라는 언어의 병렬로 이루어져 있다. 한 평론가가 진이정의 시에 대해 지적한 “시적 화자는 자신의 진술을 고결하게 포장하려는 태도를 배제한다”에 진이정의 시학이 있다. 진이정의 요설은 논리의 담론이 아니다. 논리 체계는 아니지만 그 담론의 분석은 이미지의 연결로 가능하다. 그 요설은 별개의 불온한 이미지들의 충돌이다. 그 별개의 이미지야말로 진이정이 바라보는 현상계이다. 밤하늘의 별들 하나하나가 밤하늘이 아니라 흐린 별들의 집합이 밤하늘의 이미지인 것처럼 그의 시의 행간은 필연적으로, 그러나 서로 중력 없이 그렇게 떠 있다. 진이정 시의 이해를 위해 요설의 의미를 되짚을 필요가 있다. 요설의 밑그림은 비틀림이다. 문학의 역사에 요설이 등장한 것은 진지함이 무거워지거나 진지함이 가짜인 시공간일 경우일 때이다. 비틀림과 비꼬임 모두 진지함을 견디지 못한, 아니 진지함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는, 부정의 정신에서 드러난다.
_송재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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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정, 허무로부터 벗어나는 길 / 정효구
허무에 발목 잡혀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웬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구나 허무에 발목 잡혀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허둥대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허무를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다가온 그 허무의 늪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데 그 허무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어느 순간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위장일 뿐, 허무는 우리의 몸과 삶 근저에 자리잡고 언제든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허무와의 긴 싸움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고, 수시로 앞서 말한 바처럼 ‘허무의 늪’을 어떻게 건널 수 있을 것인가, 골몰하게 된다.
일단 허무의 늪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이 마련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구원에 도달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많은 종교들이 구원을 말해도 유한한 인간조건 앞에서 구원을 온전히 체험하며 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않는가.
진이정의 시와 생애를 보면서 허무의 문제를 꺼낸 것은 그의 시와 생애의 근저에 이 허무와의 지난한 대결상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대결 속에서 진이정은 허무를 이긴 것일까, 아니면 허무에 예속돼버린 것일까. 어찌보면 진이정은 허무를 이긴 자같이 보이고, 또 다르게 보면 허무에 패배한 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시를 잘 읽어가다 보면 진이정은 죽음으로써 허무를 자발적으로 극복한 사람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죽음으로써 허무를 자발적으로 극복하다니……. 그러나 이 역설을 깊이 이해할 때 진이정의 죽음은 허무에 짓눌린 수동적인 죽음이 아니라 허무를 휘어잡은 자의 능동적인 죽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진이정은 죽음으로써 우주와 적극적인 합일을 이루기 이전에는 허무의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사람이다. 다시 말하자면 죽음으로써 우주의 거대하고 무한한 흐름에 몸을 싣기 이전에는 삶의 첫 부분에도, 마지막 부분에도 허무가 담겨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처럼 죽음으로써만이 허무를 극복할 수 있다면 인생은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 그러나 진이정은 인생을 잔인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은 분명 어느 면 잔인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주적 사유를 동원한다면 인생이 잔인하다는 생각을 넘어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이정은 일찍 인생의 허무를 넘어서 우주의 거대하고 무한한 흐름 속으로 몸을 실었다. 그런 점에서 진이정은 허무의 늪 앞에서 너무 긴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현명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말하기를 ‘내 인생은 소위 보람 있다는 일로 낭비되었다’(「거꾸로 선 자의 꿈을 위하여 3」)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죽음을 통한 우주와의 합일에 의하여 낭비로 얼룩진 삶을 일찍 거두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나는 현명한(?) 것이었다고 말한 것이다.
허무, 그것과의 만남, 그리고 그것의 극복을 위한 적극적인 도전 속에 진이정의 죽음이 놓여 있다. 이런 그의 죽음은 허무에 발목 잡힌 우리들의 삶을 자유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러나 나는 글을 끝내며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허무가 죽는 날까지 우리를 괴롭힌다 하여도, 우주적 사유를 적극적으로 하기엔 우리의 생명욕이 너무나도 강력하다고….
_정효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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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적 상상력 속에서 불끈거리는 자유 / 차창룡
—진이정 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유고시집이란 단 한 권도 없다. 이 말은 "세상의 시집은 모두 다 유고시집이지요"라는 장정일의 발언에 자극되어 발현된 것이지만, 그의 말에 대한 반박은 아니다. 이 두 가지 발언은 나름대로의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후자가 우리의 운명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그리하여 우리의 시는 결국 죽음에 임박한 상태에서 쓰여지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인식에 의한 발언이라면, 전자는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삶과 죽음이 분명 존재하지만 이미 그 바깥에 혹은 그 깊은 속에 어떤 커다란 틀이나 법칙이 마련돼 있어서, 그 틀이나 법칙 안에서 볼 때는 인간의 탄생과 죽음이 결국 진정한 탄생이나 죽음이 아니라는 인식에 의한 것이다.
진이정 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는 유고시집이 아니다. 그의 시는 유하가 말한 대로 '윤회적 상상력'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에서 그의 윤회적 상상력이 가장 알기 쉽게 나타난 시는 동생의 선물을 사면서 느꼈던 상념을 이야기한 「생일」이다. 동생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선물을 마련하면서 하는 이야기라기에는 너무 심상치 않은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시는 "나고 죽음이란 정녕 도넛판처럼 돌고 도는 것"이어서 우리들의 "무수한 윤회는 가지가지 전생의 생일만 삼각산만큼이나 쌓아 놓았"다고 말하며, 그러므로 동생의 생일은 자신의 수많은 생일 중의 하나일 수도 있어서 "곧 너의 생일은 나의 생일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모든 생일의 생일인 '영혼의 생일'은 언제인가 하고 의문을 던진다. 물론 대답은 없다. 대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영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의심스러워진다. 영혼의 생일이란 "아버지 음낭으로 기어들어"간 날은 아닐 것이며, 전생의 죽음이 消盡된 날(불교식으로 이해하면 죽은 지 49일 되는 날)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원래 존재하지 않"(38쪽)았다고 했는데, 영혼이란 육체와는 엄밀하게 다른 존재여서 원초적인 생일이 있다는 것일까? 진이정의 순환론적 역사관에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와 같은 의문들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생일」이라는 시가 진이정의 시간관, 역사관, 나아가 우주관을 보여주고 있다면,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연작은 그 세계관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 연작시에는 그의 의식 속의 수많은 전생이 등장하며, 가끔씩 내생을 넘나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의식(혹은 무의식일지도 모르지만) 속의 전생에 그는 남사당 가락을 듣고 가출한 소녀였으며, 고슴도치였으며 바퀴벌레였으며, 주지스님 몰래 황룡사 구층탑에 올라가는 동자승이었으며, 원효대사가 그것으로 물을 마셨다는 해골바가지였으며, 명월관에 죽치고 앉은 인텔리였으며……,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무수한 객체들이 또한 전생의 그에 다름 아니다. 그 전생을 넘나들며 오늘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그는 가끔씩 바로 선다. 오늘의 의미를 생각하면 이 세계는 '거꾸로 선 꿈의 세상'이기도 하고 거꾸로 선 꿈을 갈망하게 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러면 그 '거꾸로 선 꿈의 세상'이란 무엇을 일컫는 것일까? 물음표가 찍힌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우리는 '수없이' 물음표를 찍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 '수없이'이다. '수많은'과 '수없는'이라는 단어를 비교해 보라. 거기에 진이정 시의 열쇠가 있다. 수가 없다니, 그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많기에 셀 수 없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수가 셀 수 없이 많은 것—예를 들어 공기나 먼지와 같은 경우—은 하나도 없는 것과도 같다. 그 수많은/수없는 반복으로부터의 탈출이 거꾸로 선 꿈의 세상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거꾸로 선 꿈의 세상과 그렇지 않은 세상의 차이는 사실 '수많은'과 '수없는'의 차이와 같다.
그럼 도대체 '거꾸로 선 꿈'은 거꾸로 서 있는 꿈인가, 거꾸로 서기 위한 꿈인가? 그것도 역시 '수많은'과 '수없는'의 차이와 같은 것, 그 꿈은 이미 거꾸로 서 있기도 하며 거꾸로 서기를 꿈꾸기도 한다. 거꾸로 선 꿈의 세상이 "차마 현실에게 물고문을 하진 못"(「거꾸로~ 5」)해서 어쩔 수 없이 굴복해야 하는 현실세계라면 시인의 꿈은 이미 거꾸로 서 있는 것이며, 현실세계가 "소위 보람 있다는 일로 낭비"(「거꾸로~ 3」)되어 더 이상 팔아먹을 것이 없는 세상이므로 시인이 차라리 거꾸로 서겠다고 한다면 시인의 꿈은 거꾸로 서기 위한 꿈이 될 것이다. 전자의 측면을 강조하면 '꿈'이란 죽음이 되고 '거꾸로 선 꿈'은 죽음이 거꾸로 선 세상, 즉 삶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가끔 나는 바로 선다"는 말과 "허나 고런 때래야 겨우 시가 되는 것이다"(「거꾸로~ 1」)라는 고백을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 물론 틀린 것은 아니다. 후자의 인식에 따르면 '거꾸로 선 꿈'을 단순히 '자살'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역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이정의 세계관에서 자살은 정말로 자살행위다. 왜냐하면 그는 자살이 자신의 생애를 끝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가 "짧은 생각 동안에, 나는 열 번도 더 태어났어"(「거꾸로~ 7」)라고 고백하듯이, 인생이란 "순환하는 환상들"(70쪽)이므로, 그는 차라리 자신의 영혼에게 "어디 마땅한 질을 찾아가거라"(「거꾸로~ 2」)라고 명령하고 호소한다. 왜냐하면 "마음 내킬 때마다의 선행으로 구원되리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 내킬 때마다의 선행으로는 도저히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시인이기에, 그는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면서 "그게 내 유일한 장점이다/그래 자살도 못하는 것이다"라고 진술한다. 이와 같은 진술은, 마음 내킬 때마다의 선행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아는 시인이 자살이나 죽음의 세계를 통해 해탈할 수 없음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을 확신하게 한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윤회하게 만들고, 거꾸로 선 꿈의 세상에 살게 하며, 거꾸로 선 꿈의 세상을 갈망하게 만드는가? 그것을 시인은 수많은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우선은 '관혼상제의 그물'을 들 수 있다. 우리의 삶이란, 삶과 죽음의 질서는, "관혼상제의 그물만 피할 수 있다면, 결코 죽지 않"(85쪽)는다고 말한다. 관혼상제의 그물은 거꾸로 선 꿈의 연작시들에선 '바이러스'이며 '애욕의 싸움'이며 '냄새'이고 '이름'이다. 그것들 외에도 수많은 낱말들이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그것들은 서로 동의어가 아니면서 동의어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바이러스가 서식하므로/하느님은 영원한 해커"(69쪽)가 되어 인간을 죽이고 살리는 것이며, 애욕의 싸움에서 백전노장이 되면 우리는 은퇴해야 하는 것(88쪽)이며, 인생이란 냄새에 취하고 냄새를 추구하다 냄새처럼 사라지고 냄새로 돌아오는 것(94쪽)이며, 그리하여 우리는 온갖 이름의 외피에 둘러싸여 그 이름에 예배드리고 우리도 또한 이름이 되는 것(94쪽)이다. 그 이름이 거꾸로 선 꿈을 벗어나면, 아니 거꾸로 선 꿈이라는 이름을 벗어나면, '추억'(「추억 거지」「옛집 앞 전봇대」「흩어진 나날들」)이 되고 '그리움'(「엘 살롱 드 멕시코」)이 되고 '꿈'(「애수의 소야곡」)이 되고 '안개'(「등대지기」)가 되고 '희망'(「나의 희망엔 차도가 없다」)이 되고 '생각'(「생각에 대하여」)이 되고 '유행가'(「제목 없는 유행가」「사람, 노릇, 하기란, 너무나, 힘들어」)가 되고 '눈물'(「환상, 굿, 이야기」「눈물의 일생」)이 되고 '밤' 혹은 '밥'(「밤 그리고 또 무엇이」)이 된다. 이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것이 진이정에게는 '사랑'이다.
그의 사랑은 일종의 시인의 병과 같은 것으로서 사랑이라는 말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시어의 변주로도 나타난다. 그는 사랑을 절대로 찬양하지 않으며 증오하지도 않는다. 사랑을 찬양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윤회의 수레바퀴 속으로 자꾸만 밀어 넣기 때문이며, 사랑을 증오하지 않는 이유는 시인의 병인 사랑이 사라지면 시인도 사라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들은 한편으로 그의 인생의 지고한 목표를 시로 정할 것이냐, 해탈로 정할 것이냐 하는 갈림길에서의 방황을 노래한 것들이다. 그 방황 속에서 결국 선택하는 것은 「시인」이란 시에서도 나타나듯이 시의 길이다. 「시인」에서의 사랑은 '토씨 하나'이며 '시인이 먹는 밥'이자 시인의 '병'이다. 병에 걸린 시인은 지금 사랑에 걸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그 병이나 사랑에서 탈출하면 시인도 사라질 것이라고 예감하고 있다. 그 사랑과 병과 밥이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에 가면 더욱 다양한 의미로 확산된다. 시간 꽃 별 <이때> 잎 눈 솜털 연기 나비 등의 낱말로 대변되는 그것들은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거나 흐르고 있는 것들로, 그대라고 부르기도 하고 당신이라고 혹은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하는 '나의 슬픈 반짝임'이 된다.
그대나 당신이나 어머니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들이 움직이거나 흐르는 것임에 반해 고여 있는 '나'는 그 움직임에 반사되는 슬픈 반짝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시의 한 부분에서는 "멀고 먼 장강의 흐름 속에서 무수히 반짝이는 나의 파도들이여 거품 같은 이름도 흐르고 흐를지면 언젠가 당신에게로 다가갈 좋은 날 있을 것인가요"라고 이야기함으로써 마치 사랑을 갈망하는 듯이 보인다. 물론 사랑을 갈망한다. 그러나 그는 "무량겁 후에 한 줄기 미소로밖엔 기억되지 않을 그대와 나의 시간"을 이미 알고 있기에 사랑을 노래하는 이 시가 오히려 사랑을 경계하기 위해 씌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지상에 대한 신의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 인간으로 태어난 예수가 그토록 강조했던 '사랑'을 경계하다니? 우리는 「사람, 노릇, 하기란, 너무나, 힘들어」라는 시의 부제로 "자, 이 사람이다"라는 요한복음 19장 5절의 한 구절을 인용한 이유를 궁금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여기서 사람 노릇이라는 것은 신이 인간의 노릇을 하는 것과 인간이 인간답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는 신의 아들로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가 죽음을 당한다. 신도 인간 노릇하기가 이토록 쉽지 않은데, 인간이 인간 노릇한다는 것은 오죽 어렵겠는가.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전생의 바람에 하늘거리는 현생의 불꽃일 뿐일까"? 그렇다면 "짐승과 인간의 간격은 부질없는 것이나 아닌지"? 그래서 그는 다른 시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진다. "누구라도 문을 열어/이제 확실히 말해다오/내가 사는 이곳은/사랑의 북극인가 남극인가/나는 감정의 펭귄인가 에스키모인가"(「새벽 세 시의 냉장고」)?
이 수많은/수없는 물음표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진이정의 시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 물음들은 폐기되어야 한다. 윤회적 상상력이 뿜어내는 향기의 절정인 그의 시 「아트만의 나날들」은 이 수많은 물음들의 답에 대한 실마리를, 실마리만을 제공해준다. '영혼의 생일'이란 그것의 상위개념인 '아트만'까지 믿지 않겠다는 선언에 의해 아무 의미도 없어진다. 이와 같은 "온갖 종류의 아트만을" 버리고 "구체성의 신, 일상성의 보살만을 믿"겠다거나 "나라는 물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는 그의 진술을 절망의 언어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통해 시인의 자유를 본다. 시인은 자신의 話頭로서 그토록 자신을 억압했던 아트만이나 브라만이나 범아일여(梵我一如)가 결국 실체가 없는 것임을 깨닫고,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그것들의 이름임을 알고 그것들로부터의 자유를 꿈꾸고 있으며, 그 자유에 대한 추구에서도 자유롭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부자유스런 온갖 언설들에서 탈출하는 것이 진이정의 시를 이해한 결과가 될 것이므로, 거꾸로 선 꿈의 세상이 이미 거꾸로 서 있는 것인가, 거꾸로 서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도 거두어야 한다. 거꾸로 선 꿈이란 '거꾸로 선 꿈'이란 이름이나 언어일 뿐이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그러나 김수영의 말대로 시인의 헛소리는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우다 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김수영, 「詩여, 침을 뱉어라」)를 우리는 진이정의 수많은 역설적인 비유 속에서 발견한다. 그가 말하는 '거꾸로 선 꿈'이란 달리 말해 자유의 비유이다. 그는 김수영의,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시론을 가장 철저하게 밀고 나간 시인이다. 그는 온몸으로 아득한 추억을 더듬었으며, 온몸으로 아득한 추억 너머의 허망한 나라를 거닐었으며, 오늘은 냉장고에 자신의 온몸을 저장하였다가, 새벽 세시면 저장한 온몸을 꺼내먹는, 그리하여 '온몸'의 극단인 죽음까지도 밀고 나간 시인이다.
진이정의 자유는 그러나 해탈이 아니다. 해탈을 꿈꾸기에는 그는 인간의 병인 '사랑'의 중환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슬픔의 드링크에 취해, 내내 위안 받"아야 할 사람이어서 "죽고 싶어도 못 죽는"(「아트만의 나날들」)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의 자유는 온갖 이름으로부터의 자유이나, 윤회하는 자유이자 해탈하지 못하는 자유이며, 궁극적으로는 시인의 자유이다. 그의 자유가 윤회하는 자유이기 때문에 그의 시들은 마치 절망과 탄식의 언어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시인의 자유이기 때문에 그 절망과 탄식 속에는 자유에의 절규와 그것의 불끈거리는 근육이 숨 쉬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토씨 하나'나 '시인이 먹는 밥'이나 '시인의 병'도 결국 시인의 자유가 아니고 무엇이랴.
시인이여,
토씨 하나
찾아 천지를 돈다
시인이 먹는 밥, 비웃지 마라
병이 나으면
시인도 사라지리라
—「시인」전문
_차창룡 (시인)
첫댓글 늘 많은 공부를 하고 갑니다. 꾸벅. 또한 죄송합니다. 들락거리기만 하는 거 같아서.... 몰래 들어와 많은 자료들, 시들 훔쳐 보고 가는 것 같아서.... 강인한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