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시대 김대건 신부의 동생 김난식과 조카 김현채가 숨어 살던 피난처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친동생 김난식(金蘭植, 1827~1873, 프란치스코)과 7촌 조카 김현채(金顯采, 1825~1888, 토마스)가 묻힌 전북 정읍시 산내면 종성 3구 가리점의 먹구니[墨洞]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대 교인들의 피난처였다.
박해 시대에 회문산 자락에 대단위 신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 대원군의 병인박해 때까지 충청도와 경기도에서 많은 신자들이 전라도로 피난 와서 살았는데 그중의 한 곳이 회문산 자락이었다. 당시 신자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1876년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후 1882년 조선 천주교회 교세 통계에 의하면 회문산 인근에 115곳의 공소가 있었다고 한다. 교회사를 보면 깊고 험한 회문산 자락에서 병들고,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은 신자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김난식 프란치스코는 1827년 정해박해 때 가족이 피난을 다니던 중에 태어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김난식은 형 김대건이 중국 마카오로 신학 공부를 위해 떠나고 그가 불과 12 살의 나이였던 1839년, 아버지 김제준(金濟俊, 보명 濟麟, 1796~1839, 이냐시오)이 순교함으로써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함께 어렵게 가사를 돌봐야 했다.
그리고 형인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사제품을 받고 고향에 돌아 왔지만 불과 1년만에 순교를 당하자,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함께 집도 없이 길거리에서 걸인 행세로 신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지내야 했다. 그는 안동 김씨와 혼인하여 살다 일찍 사별하였으며 1864년 어머니 우르술라가 세상을 떠나자, 시신을 형 김 신부의 무덤이 있는 미리내에 묻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조카인 김현채 토마스와 함께 전라도 정읍 회문산 자락 깊은 골짜기에 있는, 지금은 없어진 마을 먹구니로 와서 박해를 피했다. 그는 여기서 토종벌을 치며 생계를 유지했고, 처와 자녀도 없이 수도자처럼 신앙생활을 하다 1873년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대건 신부의 큰집 7촌 조카인 김현채 토마스는 김난식보다 2살 위였다. 그는 정해박해와 기해박해를 피해 부모와 함께 떠돌아다니다 아버지를 여의고, 1865년에는 어머니마저 잃게 되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40이었다. 이듬해인 1866년 병인년 박해가 시작되자 전라북도 부안군 불무동에 머물다가 먹구니로 피난 온 김난식과 함께 살았다. 그는 이곳에서 10살 아래인 강 막달레나와 혼인했는데, 이들이 서로 동정을 지키며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김난식의 동정 부부 생활
호남교회사연구소의 김진소 신부는 이곳의 두 묘를 김난식 부부의 묘라고 하였다. 또 그들은 동정을 지키기 위하여 잠잘 때면 물동이를 방 가운데 놓고 따로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부인은 불평이었다고 한다. 그는 고행생활로 일생을 보냈는데 평소 노끈으로 짠 속옥을 입고 지냈고 망의 굵은 매듭이 살 속에 박혀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의 양자 김 도마(?)와 염습할 때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으로 그 고복은 함께 넣어 장사 지냈다고 한다.
김난식이 쉰 살쯤 그 산골에 우연히 열한 살의 소년 거지가 들어와서 양자로 키웠는데 그가 김 도마이다. 김 도마는 남매를 두어 아들 만선은 변변치 않게 독신으로 살다 죽었고, 딸은 윤종석(요한)에게 출가 하였었다고 한다. 먹구니 신자들은 신앙이 자유로워지자 농사터를 찾아 문수동, 평내, 능교리 등으로 옮겨 살았다.
▒ 김대건 신부의 후손
김대건 신부의 동생 김난식 프란치스코도 1846년 병오박해 때 형인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후 어머니 고 우르술라를 모시고 경기도 용인 골배 마을에서 어렵게 살다가 모친이 1864년에 죽고 또한 부인 안동 김씨가 죽은 후 1866년 병인박해를 만나서 이미 큰집 형제들이 살고 있는 전라도 정읍 산내면 먹구니로 가서 혼자 살다가 1873년에 자녀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김택현의 아들 삼 형제 중 둘째 김제린의 아들인 김대건 신부는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하고 동생 김난식 프란치스코는 자손이 없이 1873년에 죽었으므로 그의 직계 자손은 완전히 자손이 끊어졌다. 그러므로 김대건 신부의 직계 후손들은 아무도 없고 다만 김대건 신부의 사촌 형제인 즉 작은 삼촌 제철의 아들들인 사 형제(의식, 근식, 선식, 진식) 후손들만이 있다.
▒ 회문산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금창리에 있는 높이 830m의 산이다. 순창군과 임실군을 가르고 있다. 봉우리와 골짜기가 많아 첩첩산중을 이루고 있는데다 서쪽을 제외한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예로부터 천혜의 요새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
소설 《남부군》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으며 동학 혁명과 한말 의병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고, 빨치산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이곳에 자리 잡고 700여 빨치산들이 오랫동안 저항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빨치산의 훈련장이었던 곳에 체력 단련장이 들어서 옛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김대건 신부의 동생과 조카의 묘가 안치된 천주교 사적지이며 증산교와 청학동 도연으로 불리고 있는 갱정유도(更定儒道)의 발상지가 이 산의 금강암이다. 예로부터 이 산에는 다섯 선인이 바둑을 두는 형상인 오선위기(五仙圍基)의 명당터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옛날 백룡이라는 산적 두목이 무리들을 이끌고 이곳에 웅거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산봉우리에는 그들이 살았던 굴이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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