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김원중 스테파노 등 많은 순교자가 갇혔던 진천 관아와 옥터
진천 관아와 옥터는 병인박해 때 배티 교우촌의 순교자들이 거쳐 간 신앙의 증거터다. 하느님의 종 김원중 스테파노,장 토마스, 오반지 바오로, 순교자 송 베네딕토와 그의 아들 베드로, 베드로의 딸과 며느리 이 안나, 안나의 아이 등 수많은 순교자가 갇혔던 곳이다.
교회사의 기록에 진천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난 것은 1813년경이다. 이때 충남의 홍주 덕머리 출신인 원 베드로 형제가 박해를 피해 진천 ‘질마로’로 피신했다는 기록이 있다.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교회 역사에 기록된 진천 출신 순교자 29명과 배티 일대에 산재해 있는 무명 순교자 묘 26기 등 55명의 순교자를 탄생시키고 일시적으로 와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박해가 그친 1870년 무렵부터 다시 이곳에 모여 복음의 새 터전을 닦아 나갔다.
현 진천군청 종합 민원실 자리는 하느님의 종 김원중( ?~1866, 스테파노)이 공주로 압송되기 전에 갇혔던 진천 관아터가 있던 곳이며, 진천 경찰서 자리는 하느님의 종 오반지 바오로가 한 젊은이와 함께 체포되어 청주 병영으로 이송되어 죽임을 당하기 전 투옥된 진천 관아 옥터다.
진천 관아 옥터는 병인박해 때 배티 교우촌의 순교자들이 거쳐 간 신앙의 증거터이다. 충청도 진천 반지 마을(현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의 오반지(吳盤池, 1813~1866, 바오로)도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진천의 지장골(현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로 이주하여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살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청주 병영 포졸들에게 지장골에서 체포되어 배 바오로와 함께 진천 옥에 투옥되었다가 청주로 이송되었다.
순교자 송 베네딕도(179 8~18 67)와 그의 아 들 송 베드로(1821~1867), 베드로의 딸과 며느리 이 안나(1841~1867), 안나의 아이 등 5명도 배티로 몰려온 한양 포졸들에 의해 체포되어 진천 관아로 압송되었다. 이들 가족은 한양으로 압송된 후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당시 베네딕도의 나이는 70세였다.
또 한 명의 순교자 장 토마스(1815~1866)는 1866년에 순교한 성 장주기(張周基, 일명 낙소, 1803~1866, 요셉)의 육촌 형제로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돕다가 진천 배티에 정착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 그와 가족들은 모두 체포되어 진천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토마스는 청주 장대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 순교자
◆ 순교자 송 베네딕도(1798-1867년) <하느님의 종 125위>
송 베네딕도는 충청도 충주 서촌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쳐 가정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온 가족이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이후 베네딕도는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아들 가족과 함께 진천 배티 교우촌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교우촌 신자들과 어울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던 한양 포졸들이 배티로 들이닥쳤다.
배티로 몰려온 포졸들은 그곳에 거주하던 송 베네딕도를 비롯하여 아들 가족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런 다음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서 가두었다가 다시 한양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이들은 가장 나이가 많은 베네딕도와 그의 아들 베드로, 베드로의 처녀 딸, 베드로의 며느리 이 안나,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이었다. 이들 가족은 한양으로 압송된 후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당시 베네딕도의 나이는 70세였다.
◆ 순교자 송 베드로(1821-1867년) <하느님의 종 125위>
송 베드로는 충청도 충주 서촌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우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장성한 뒤에는 부친 베네딕도를 모시면서 성 가정을 꾸려나가는 데 열중하였다.
이후 베드로는 좀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부친 베네딕도와 함께 가족들을 데리고 진천 배티 교우촌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교우촌 신자들과 어울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던 한양 포졸들이 배티로 들이닥쳤다.
배티로 몰려온 포졸들은 그곳에 거주하던 송 베드로의 가족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이들 가족은 한양으로 압송된 후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당시 베드로의 나이는 47세였다.
◆ 순교자 오반지 바오로(1813-1866년) <하느님의 종 125위>
오반지 바오로는 충청도 진천의 반지(현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던 집안 출신으로, 비교적 풍요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장성할 때까지 공부와는 담을 쌓았으며, 혼인한 뒤에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날려 버리고 말았다.
바오로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은 40세가 훨씬 지난 1857∼1858년 무렵이었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진천의 지장골(현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로 이주하였다. 바오로의 열심은 이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청주 병영에서 그를 체포하기 위해 지장골로 들이닥쳤다. 이내 그는 한 젊은이와 함께 체포되어 진천에 투옥되었다가 청주로 이송되었다. 청주 병영으로 압송된 후 모진 형벌과 문초 가운데서도 관장의 유혹에 오반지는 조금도 넘어가지 않았으나 그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함께 갇혀있던 함께 체포된 젊은이, 그리고 새로 체포되어 온 배 바오로는 배교하였다.
청주 남문 밖으로 끌려 나가 사형 집행 전 그의 옆에 있던 사형 집행인이 그에게 달려들어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1866년 2월 11일(양력 3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백일 청천에 무지개가 떠서 그의 시체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았다”고 한다. 이후 그의 시신은 아들과 신자들 몇 명에 의해 지장골로 옮겨져 그 인근에 안장되었다.
◆ 순교자 이 안나(1841-1867년) <하느님의 종 125위>
이 안나는 인천 재궁골의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자 충청도 충주 서촌에 살던 교우 송 베드로의 아들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남편과 함께 시조부 송 베네딕도와 시부모를 모시면서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이후 송씨 집안이 좀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진천 배티 교우촌으로 이주하게 되자, 그녀도 남편을 따라 그곳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녀는 교우촌 신자들과 어울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던 한양 포졸들이 배티로 들이닥쳤다. 배티로 몰려온 포졸들은 그곳에 거주하던 이 안나와 그녀의 시댁 식구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이들 가족은 한양으로 압송된 후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당시 안나의 나이는 27세였다.
◆ 순교자 장 토마스(1815-1866년) <하느님의 종 125위>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재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난 장 토마스는 1866년에 순교한 성 장주기(요셉)의 6촌 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이후 그들은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요셉 성인은 충청도 배론(현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에 정착하였고, 토마스는 진천 배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시작된 후, 장 토마스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명령만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청주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와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내 진천 관아로 압송된 토마스는 관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얼마 안 되어 토마스는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있은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이 선고되고, 포졸들은 그를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청주시 남문로 2가)로 끌고 나갔다. 바로 그때 토마스는 대자 되는 사람이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에게 말하기를 “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당시 토마스의 나이는 51세였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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