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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피니주의 전도 | 청교도 전도 | |
구원과정 |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결정된다 | 하나님의 성품에 의해서 결정된다 |
강조점 |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을 강조 |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이루시고자 선택하신 일을 강조 |
구원의 주제 | 영생을 얻는 것 | 하나님의 영광 |
구원의 주체 | 사람 | 하나님 |
사람의 선택의 능력여부 |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정도의 능력이 사람에게 있음 |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음 |
성령의 역할 | 사람을 설득하는 데 있음 | 진리를 적용시키는 데 있음 |
설교자의 역할 |
청중의 의지와 싸워서 결단을 촉구하는 데 있음 |
진리를 드러내어 양심에 전하는 데 있음 |
복음에 대한 이해 |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 | 구주를 제시하는 것 |
복음의 강조점 |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데 있음 |
사람들을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취하여 가는 데 있음 |
중심을 이루는 특징 | 영생을 제시하는 데 있음 |
화목을 제시하는 데 있으며, 영생은 화목의 하나의 결과일 뿐임 |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 | 사람임 | 하나님이심 |
복음을 받아들일 능력 여부 | 사람에게 복음을 받아들일 능력이 있음 |
하나님께서 준비시켜야만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됨 |
결단의 시기 | 전도자가 결단의 시간을 고정시켜 놓음 | 하나님께서 응답의 시기를 결정하심 |
언제 하나님을 선택하는가 |
사람은 어느 때라도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음 |
하나님께서 그의 정하신 때에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선택하게 하심 |
확신의 주체 | 사람에게 부과된 사역임 | 성령께서 행하시는 사역임 |
확신에 관하여 | 사람이 선언함 | 하나님과 그의 말씀으로 확증됨 |
확신의 근거 | 성경의 약속들 |
성경의 약속들, 성령의 내적인 역사하심, 회심자의 성품과 행실 |
관계 | 믿음과 확신이 서로 관계가 있음 | 믿음, 확신, 순종이 서로 관계가 있음 |
복음이 보장해 주는 것 | 복음은 칭의를 보장해 줌 | 복음은 칭의와 성화를 보장해 줌 |
복음이란 | 사람이 얻는 무엇임 |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행하시는 무엇임 |
복음에 대한 이해 | 복음은 단순함 | 복음은 단순하나, 얄팍하지 않음 |
복음에 대한 이해 |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사람에 관한 것이고, 사람을 위한 것임 |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요, 하나님께 관한 것이요, 하나님을 위한 것임 |
복음이 다루는 것 | 사람의 법적인 문제(죄)를 다룸 |
사람의 법적인 문제(죄)와 사람의 도덕적인 문제(마음)을 다룸 |
그리스도 |
사람이 행한 그릇된 행실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주이심 |
사람의 그릇된 행실은 물론, 사람의 그릇된 본성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주이심 |
그리스도의 직분과 혜택 | 분리시키는 경우가 많음 | 언제나 하나로 합쳐져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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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대개 '믿음'의 '본질'에 대한 명백한 관점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saving faith)에 대하여서도 좀 더 깊은 관찰이 필요합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믿음은 그 믿음 속에 '행함의 능력이나 생명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그 믿음 안에 일종의 '생명력'을 갖습니다. '산 믿음'이란, '생명력이 있는 믿음'이란 뜻이겠지요.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겨자씨만한 믿음'의 위대함은 바로 '생명력'에 있습니다. 그 믿음이 참믿음이라면 '생명력'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런면에서 '행함이 없으면'
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곧 행함의 생명력이 없으면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지요. 이것을 야고보선생이 말한 줄로 압니다. 이것은 결코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로되, 그렇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도 행함(의 생명력)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여기서 '행함'과 '행함의 생명력'을 저는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열매도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아주 작은 때부터 아주 무르익은 때까지 차이가 있습니다. 아주 작은 열매라고 하더라도 큰 열매와 비교해서 열매가 없다고 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교표를 제시해 주셨는데
잘 비교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번역어투가 약간 어색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믿음은 그 믿음 속에 '행함의 능력이나 생명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아주 핵심적인 말씀 고맙습니다...
믿음을 단순히 지적동의,즉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매우 중요하지만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확신만 있으면 무조건 천국간다라는 생각도 매우 잘못된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다 구원 못받는것이 아닙니다. 회개나 행함이 전혀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여 절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일 뿐입니다.......이 세상에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란 없습니다...
holykoy님, 바로미님, 발지님 답변 감사합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샬롬~
저는 성령의 내적 보증을 중시합니다. 가령 행함 또는 행함의 능력을 말하지만 그것은 정말 계량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대체 어느 만큼의 행함 또는 그 능력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표시가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종일 수고하고도 부족하다고 여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잠간 수고하고도 족한 줄로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행위가 겨자씨만한 믿음의 행동이며 무엇이 생명이 없는 외식이겠습니까? 자칫 공론에 그치거나 아니면 결의론적인 계량적 행위주의와 다를 바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결국 구원의 확신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 거기에서 확립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답답하게 여겨져도 확신은 신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청교도적인 아니 칼빈주의적인 아니 개혁주의적인 입장을 신뢰합니다. 구원과 그 확신은 하나님이 주시고 성령이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 영이 참여하는 기쁨이며 우리 삶이 즐거이 받아들이는 행복이라고 믿습니다. 무엇보다 평안과 자유, 기쁨이 그 현저한 결과이며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망과 헌신이 그 동적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안팎으로 우리는 믿을만한 증거들을 누려야한다고 봅니다. 안타깝게도 단지 심리사회적으로 확신을 담보하려고 할 때 신앙의 길은 더욱 지치고 불안한 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