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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을 맞이하여 부모님께서 서안에 오셨다. 아버님은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오래 잡으신 후 정년 퇴직하셨고, 어머님은 평범한 가정주부이시다. 아내는 시어머니에게 아드님을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남기고 딸 아이와 함께 한국으로 나갔고, 나는 오랜만에 어머니가 해주는 맛있는 밥을 먹으면서 편하게 지내다가, 이번 기회에 부모님께 제대로 된 효도를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에 두 분을 모시고 중국전역을 돌기로 했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첫 여행지로 낙양(洛陽)의 용문석굴(龍門石窟)을 거쳐서 소림사(小林寺)와 중국 사대서원 중의 하나인 숭양서원(嵩陽書院)이 있는 숭산(嵩山)에 가기로 했다.
서안의 여름은 40도를 넘나드는 살인 더위로 유명하기에 조금이라도 더 더위를 피하고자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설레는 마음 탓인지 서안과 낙양을 이어주는 G30번 연호고속도로(连霍高速道路) 위로 불어오는 더위를 가득 먹은 바람도 싱그럽게 느껴진다.
연호고속도로는 강서성의 동쪽 끝 연운항(连云港)에서부터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신장자치구(新疆自治區)의 호얼커스(霍尔果斯)까지 연결되어 있는 길이 4,395km의 중국 최장의 고속도로이다. 만천리, 실제로 만리장성보다도 길다고 한다. 이 길을 달릴 때마다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이지만 중국이 정말 크기는 크다.
한국인이나 미국인들도 그렇지만 중국인들 역시 등수 매기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중국에는 예부터 4대 고도(서안, 낙양, 남경, 북경), 4대 서원(악록서원, 백록동서원, 숭양서원, 응천서원), 4대 미녀(서시, 초선, 왕소군, 양귀비), 4대 석굴(용문석굴, 운강석굴, 둔황석굴, 맥적산석굴), 4대 음식(광동, 사천, 북경, 상해), 4대 정원(이화원, 졸정원, 예원, 피서산장) 등의 말이 유행했는데 낙양이 바로 이 4대 고도중의 하나이다.
비록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안과 낙양에 남경과 북경을 더해서 4대 고도라고 그리고 여기에 개봉과 항주를 더해서 6대 고도라고 부르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테네, 로마,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고도(古都)로 꼽히는 서안과 구조고도(九朝古都)라고 불리는 낙양 이 두 도시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중국의 2대 고도이다.
중국을 여행하는 여행객들이 흔히 듣는 것이 500년 역사를 보려면 상해로 가고, 1,000년 역사는 북경으로, 3,000년 역사는 낙양으로, 그리고 5,000년 역사를 다 보려면 서안으로 가라는 말이다.
이렇듯 낙양은 기원전 770년에 주(周)나라의 도읍이었던 것을 시초로 하여 후한(後漢), 위(魏), 서진(西晉), 북위(北魏), 수(隨), 唐(武则天),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후양(后梁)과 후주(后周) 등의 아홉 왕조의 도읍지로 30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한다. 특히, 후한부터 당대까지 서안은 정치의 중심지로 그리고 낙양은 경제문화의 중심지로 이름을 떨쳤으며 우리에게는 위, 촉, 오 삼국지의 중심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다.
부모님과 옛날 이야기를 하며 차를 몰다 보니 어느새 낙양이 지척이다. 1500년 가까이 중국 왕조들의 도읍지였던 역사적인 도시답게 낙양에는 용문석굴(龍門石窟), 중국 최초의 불교사찰인 백마사(白馬寺), 관우가 잠들어 있는 관림(关林), 목단 꽃 축제로 유명한 목단원(牧丹園) 등 유명한 유적지가 많다. 그 중에서도 낙양을 대표하는 두 가지를 꼽으라면 하나는 불교예술의 총아 용문석굴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의 국화(國花)이자 부귀영화와 번영을 상징하는 목단 꽃(牧丹花)이다.
[중국의 국화이자 낙양의 명물인 목단 꽃]
낙양시내를 지나 남쪽으로 약 13㎞를 달리자 곱게 흐르고 있는 이하(伊河) 강변의 암벽을 따라 동서양측에 벌집 같이 조각된 거대한 석굴군이 눈에 들어왔다. 이하 강변 서측의 용문산과 동측의 향산(香山) 암벽 약1.5㎞에 걸쳐 조성된 용문석굴은 5세기 말 북위 때부터 당나라 때인 9세기까지 무려 400여년간 깎고 다듬어서 세워졌다고 한다.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467~499)가 대동(大同)에서 낙양으로 수도를 옮긴 494년경에 운강석굴(雲崗石窟)을 본떠 용문에 석굴 조성을 시작하였으며, 이 후 당대 측천무후(則天武后) 시기까지 대부분의 석굴이 만들어 졌는데 현재까지 2,345개의 석굴과 2,800개의 비문, 550개의 불탑, 그리고 10만개 이상의 불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용문석굴의 조성을 처음 시작한 효문제 탁발굉(拓拔宏)은 선비족(鮮卑族)이었지만 한족 문화를 너무 좋아해서 적극적으로 한화(漢化)를 이루었으며, 수도마저도 선비족들의 본거지인 대동에서 낙양으로 옮겼다고 한다. 지금도 낙양 북쪽에 있는 북망산(北邙山)에는 그의 묘인 장릉(长陵)이 남아 있다. 일설에 의하면 당나라 당시 북망산에는 황족과 귀족들의 묘지가 많았는데 이것이 한국에까지 전래되어 아직까지도 죽은 사람을 보고 “북망산에 갔다”고 한단다.
당나라 시인 심전기(沈佺期, 656~714)는 망산(邙山)이라는 칠언율시에서 화려한 낙양과 북망산의 쓸쓸함을 대비하여 인생의 무상함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경상도민요 <성주풀이>에 나오는 ‘높고 낮은 저 무덤’은 바로 망산의 무덤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북망산상열분영 (北邙山上列墳塋) 북망산 위에 늘어서 있는 무덤들이
만고천추대낙성 (萬古千秋 對洛城) 오랜 세월 두고 낙양성을 마주하네
성중일석가종기 (城中日夕 歌鍾起) 성중에는 낮밤으로 풍악이 울리는데
산상유문송백성 (山上惟聞 松柏聲) 산위에는 오직 솔바람 소리뿐이네.
용문석굴은 불교예술과 건축, 조각미술, 그리고 서예 등 다양한 방면의 유적들이 현재까지 살아서 생생히 숨쉬고 있는 역사적 보고로 그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 때문에 지난 2000년 유네스코에 의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우리는 입장권을 산 후 먼저 이하의 서측 용문산에 있는 석굴로 향했다. 석굴들에 새겨진 불상들은 10여m가 넘는 것에서부터 2㎝ 크기에 불과한 작은 것까지 실로 다양했다. 더구나 각각의 불상들의 섬세한 장식과 생생한 회화적 표현에는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 먼 옛날 일생 동안 까마득하게 높은 석벽에 매달려 일편단심으로 굴을 파고, 세심하기 이를 데 없는 불상들을 새긴 당시 석공들의 투혼에 1500여년의 시공을 넘어 다시 그 앞에 선 여행자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용문석굴의 2,345개의 석굴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유명한 것은 당대에 만들어진 제19동 봉선사 석굴(奉先寺 石窟)이다. 봉선사 석굴은 용문산(龍門山) 중앙의 산허리를 깍아 만든 높이 20m, 넓이 35m의 석굴로 당나라 초기인 672년 고종의 황후인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주도로건조가 시작되었고 3년 뒤인 675년에 낙성되었다고 하며, 본존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측천무후를 모델로 삼았다는 설이 있다. 비로자나불은 높이 17m의 대불로서 8각 대좌에 앉아 있으며 좌우에 나한, 보살, 역사, 신왕 등 도합 9체가 서있어 9간방(九間房)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향산사에서 바라본 용문산석굴] | [봉선사 석굴] |
봉선사 석굴을 돌아본 다음 계속해서 가장 오래된 석굴이자 예술적 가치가 높다는 고양동(古陽洞), 11개의 대형 불상이 모셔져 있는 빈양삼동(賓陽三洞), 손톱만한 크기의 불상 1만 5000개가 조각된 만불동(萬佛洞), 천장의 연꽃이 아름다운 연화동(蓮華洞) 등을 둘러 보았다.
점심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나서 이하의 다리를 건너 용문동산으로 알려진 향산(香山)으로 갔다.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찌는 듯한 더위에 많이 걸어 다니면 힘들어 하실까 봐 걱정했는데 석굴들의 매력에 취하셨는지 거뜬하게 잘 다니신다.
향산의 석굴들을 보고 내려가는 길에 향산사(香山寺)와 백거이(白居易)의 묘가 있는 백원(白圆)에 들렸다. 향산사가 유명한 것은 낙양 10대 사찰 중 풍광이 으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향산거사(香山居士)로 알려진 당나라의 삼대시인(두보, 이백, 백거이) 중의 하나인 백거이가 58세 이후 18년 동안 머물다 별세한 곳이기 때문이다. 백원에 있는 백거이의 묘비의 글씨는 청나라 황제 강희제의 친필이라고 하며, 묘 주변에는 그를 기리는 후세의 시인묵객들이 남긴 많은 비석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한국의 백씨 종친회에서 세운 비석도 보였다.
향산거사의 묘 앞에서 그가 지은 시 <화비화(花非花)>로 묵념을 드렸다.
화비화 무비무 (花非花 霧非霧) 꽃은 꽃이 아니고 안개는 안개가 아니어라
야반래 천명거 (夜半來 天明去) 깊은 밤에 왔다가 날이 새면 떠나가네
래여춘몽기다시(來如春夢幾多時) 찾아올 땐 봄날 꿈처럼 잠깐이건만
거사조운불멱처(去似朝雲不覓處) 떠나갈 땐 아침구름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네
(용문산에서 바라본 향산사) | (백원에 있는 백거이의 묘) |
더위에 지친 몸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와 부친과 함께 시원한 맥주한잔으로 더위를 식혔다. 아직 부모님이 건강하시고 이렇게 함께 여행까지 할 수 있으니 세상에 더 부러울 것이 없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어 두 분과 함께 언제 끝날지 모를 옛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꿈나라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