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다운 기도
젊은 사제 돈 보스코가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을 위해 토리노 시 외곽에서 시작한
오라토리오의 발자취를 쫒아가며 얼마나 튼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오라토리오가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큰 갈등과 고통, 수모가 뒤따랐는지 모릅니다.
야생마 같은 뒷골목 아이들 수백 명이 함께 모여 떠들어대니
가는 곳 마다 쫓겨나기 일쑤였습니다.
어떤 때는 병원 마당에서 어떤 때는 풀밭에서 모였습니다.
어떤 때는 본당 마당을 어떤 때는 공동묘지를 떠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돈 보스코는 피나르디씨가 임대해준 헛간에
꿈에 그리던 오라토리오를 정착시킵니다.
아이들과 함께 이삿짐을 싸서 이고 지고 나르면서 돈 보스코의 눈에서는
눈물이 쉼 없이 흘렀습니다.
9살 때 꿈에(이리떼가 양떼로 변하는 꿈)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비전에
드디어 한발 다가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성모님께서는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보여주시고,
완성시켜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저 하시는 말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떠도는 오라토리오가 계속되던 어느 주일 저녁이었습니다.
상습 피로와 갖은 스트레스로 인해 돈 보스코는 몸과 마음, 정신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 챙기느라 자신의 건강은 돌볼 겨를도 없었습니다.
풀밭에는 돈 보스코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이
남의 속사정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고 재미있게 뛰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돈 보스코는 내일 당장 이 풀밭 오라토리오를 떠나야했습니다.
그리고 이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할지 기약도 없었습니다.
아이들과 잠시 떨어져 나온 돈 보스코는 홀로 들판을 걸었습니다.
자신만 바라보는 수많은 아이들,
그러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 당국자들,
교회 장상들, 친구들...
아직 젊은 사제였던 돈 보스코였습니다.
앞길은 캄캄하고, 당장 아무런 대책도 없고,
돈 보스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씻어내며 하늘을 우러러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나의 주님! 왜 제게 빨리 이 아이들을 위한 좋은 장소를 제공해주시지 않으십니까?
주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주십시오!”
곰곰이 생각해보니 돈 보스코의 기도는 참으로 기도다운 기도였습니다.
그가 바친 기도는 자신을 위해 바친 기도가 아니라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내 집의 건설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집의 건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적당히 바치는 미지근한 기도가 아니라 온 힘을 다해 바친 기도,
삶 전체를 바친 기도였습니다.
때로 우리가 드리는 기도 가운데 많은 경우 기도라고 할 수 없는 기도가 있습니다.
어떤 기도는 너무나 자기중심적입니다.
너무 유치하고 기복적입니다. 또 어떤 기도는 너무나 파괴적이고 폭력적입니다.
그래서 어떤 기도는 기도라기보다는 하느님을 힘들게 하는 억지요 강요입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이 우리가 바치는 기도에 대한 식별작업입니다.
지금 내가 바치는 이 기도가 정말 제대로 바치는 기도인가?
내 기도 지향에 문제는 없는가?
내 기도방식은 지금 성장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청할 것입니까?
오늘 복음말씀처럼 하느님께서 어김없이 들어주실 청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성령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 한가운데 성령께서 현존하시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영적으로 변화되기를,
고통을 기쁘게 견뎌낼 용기를 주시기를,
불의하고 부당한 현실과 기꺼이 직면할 당당함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선익도 중요하지만 공동선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더 이상 비극이 없는, 더 이상의 무자비한 폭력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더 이상 굶주리지 않는,
더 이상 피눈물 흘리지 않는 정의로운 세상,
공평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는 하느님께서 그 자리에서 즉시 들어주실 제대로 된 청원기도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