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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 (룻기)를 통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20160821)
본문 : 롯기 전절
오늘도 행복한 주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예배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오늘도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룻기입니다. 룻기의 내용은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룻기를 우리가 다시금 되짚어 보아야 하는데는 놀라운 사실이 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사실을 잘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잘 알고 있는데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창설하시며, 사람을 만드시고, 그곳을 다스리고 지키게 하셨지만, 그 역활을 사람은 담당하지를 못했습니다. 그건 나라의 구성요소중 3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중, 오직 국민에 해당하는 사람만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에 의해, 사람이 자신들의 뜻에 의해,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만을 섬기는 백성을 삼으시기를 원하셨던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안될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이미 아셨습니다. 그렇게에 성경 곳곳에 자신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야 할것과, 자신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지셔야 할것, 그리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재림을 통해, 온전한 새하늘과 새땅을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룻기가 있습니다. 이방여인 룻이 있는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 오셔야 하는건, 순수혈통 즉, 정통성있는 이스라엘 족속의 계보를 통해 이땅에 오셨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법인, 이방여인을 순수혈통에 넣으셔서, 혼합 혈통으로 이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룻기는 반드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하나님의 큰 뜻이 있으심을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이런 의문도 가질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느냐 하는것입니다. 어짜피 섞으실거면, 굳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실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 언약을 지키지 못할줄을 뻔히 아시면서, 어떻게 언약을 하실수 있으시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해야할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하신 명령을 노아를 통해서도 그대로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바로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4:22에서도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하나님의 선택이며, 그 선택에 의한, 구별에 대한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을 통해, 자신의 창조의 완성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오직 아담의 자손으로 그 열매를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구별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방 여인인 롯을 통해, 이스라엘의 명맥을 이어가게 하십니다. 왜 입니까? 그것을 우리는 신학적으로 "구원의 보편성" 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한 민족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전 인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룻기를 통해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룻기는 한 개인의 가정사가 아닌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역사'로 귀결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먼저 롯기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며 나아가겠습니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엘리멜렉과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은 베들레헴을 떠납니다. 그 이유는 가나안 땅에 극심한 가뭄이 찾아와서 모압지역으로 이주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모압 땅에서 죽습니다. 첫째 아들 말론은 모압 여인 룻과, 또한 둘째 아들 기룐은 모압 여인 오르바와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약 10년이 지난후에, 나오미의 두 아들들은 자녀가 없이 죽게 됩니다. 이제 나오미는 베들레헴을 함께 떠나온 가족 가운데서 혼자 살아남아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멈추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따라서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하게 되고, 두 며느리들은 모압땅에 남을것을 권유하지만, 둘째 며느리 오르바만 모압 땅에 남게됩니다.
첫째 며느리 룻은 한사코 나오미를 따라옵니다(1: 6~22). 베들레햄으로 돌아온 다음에 룻은 밭으로 이삭을 주우러 나아가게 되는데, 마침 그 밭은 룻의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가까운 친척이었던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2:1~23). 나오미는 보아스가 법적인 친족 구속자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나오미는 자기 며느리 룻에게 과감한 제안을 하게되고, 시어머니의 제안에 따라서 룻은 밤중에 타작마당으로 가게됩니다. 그리고 룻은 낟가리 곁에 누워 있는 보아스에게 살그머니 다가가서, 보아스의 발치에 슬며시 눕게됩니다. 그러자 그런 사실을 모르는 보아스는 자다가 깨어서, 룻을 발견하게 되고, 룻은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사람이라는 점을 언급하며, 대담하게 자기와 결혼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3:1~18). 따라서 보아스는 자신보다 더 가까운 친척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기업을 무를 것인지를 묻게되고, 그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기를 거부하자, 보아스는 나오미의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모든 재산을 무르고, 룻과 결혼한다(4:1~12)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보아스와 룻 사이에 한 아들이 태어나게되는데, 그의 이름은 오뱃이며, 이 오뱃이 바로 다윗 왕의 할아버지(4:13~22)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기업무름"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출처: ESV스터디바이블)
사실 이 개념은 사랑(자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룻기의 이야기에서 핵심을 차지합니다(2:20). ‘기업을 무르다’(히. ‘가알’), ‘기업을 무를 자’(히. ‘고엘’) 및 ‘기업 무름’ (히. ‘게울라’)이라는 단어들은 룻기에서 스물세 번이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룻기는 (모세 율법이 요구하지 않는) 두 가지 법적인 사항들을, 기업을 무르는 한 가지 관습 안에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곧 가장 가까운 친척이 재산을 다시 사는 것이며, 또한 이미 죽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척의 미망인과 결혼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가까운 친척이 죽은 사람의 땅을 다시 사는 것은 그 땅이 친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소유로 영원히 넘어가지 않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참조, 레25:23~25). 또한 계대 결혼- 영어로는 ‘levirate marriage’로 표기되며, 라틴어 ‘레비르’(남편의 형제)에서 유래가 되는데, 이것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형제가 죽은 형제의 과부와 결혼해서, 후손을 잇게 하는 제도를 말합니다(신 25:5~6. 참조,마 22:24).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건, 룻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룻이 다윗의 조상이 되어지기는 하지만, 그럴수 있었던것은 순전히 보아스로 인함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보아스로 이스라엘의 혈통을 이어가게 하시기 위한 매개체로써, 롯의 역활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방인의 수가 충만하기까지(롬11:25) 이스라엘이 강팍하게 되었던 것 처럼 말입니다.
룻기를 통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던져보면 이렇게 됩니다. 룻기의 주인공이 누구냐?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룻기의 주인공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방 여인 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보아스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단연 나오미 입니까? 조금더 넓혀 이스라엘 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사사기도 룻기도, 창세기도, 모든 성경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런데 룻의 이름을 빌렸다고 룻이 주인공이 되어지고, 사무엘서라고 이름 붙여졌다고 사무엘이 주인공이 되어진다면, 성경은 이미 성경이 아닌게 되어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을 항상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것을 창세기를 시작하면서 누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써내려 가시는, 우리를 위한 성경이 아닌, 하나님 자신을 위한 성경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룻기를 통한, 하나님의 새로운 시각을 읽을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더이상 선민사상에 빠져있는 이스라엘의 훈련에만 치중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시기는 하시지만, 이스라엘 이외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말해 그들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에, 하나님은 편애하는 하나님이 아니심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룻을 끼워 넣으십니다. 이것은 유대인들 에게는 도저히 있을수 없는 일 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 곳곳에서는 이미, 이방인들에게도 이스라엘과 함께 있을수 있도록 허락되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낼수 없었던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또하나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게 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즉, 하나님의 변치않는 창조의 진행 과정속에서 완성되어지고 있는, 각각의 단계, 즉 점진적인 창조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단계들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룻의 후손에서 예수님이 탄생하게 하시면서까지 말입니다. 물론 그 끝은 창조의 완성인, 새하늘과 새땅이고 말입니다.
결 론
이제 결론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룻기의 줄거리가 불행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룻기의 줄거리가 문학 작품에서 널리 사용되는 전형적인 유(U)자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됩니다. 곧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은 점점 더 비극적이며 어려운 심연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죽고, 죽고, 또 죽고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장애 요인들이 하나하나 제거되어 가면서, 사건들은 점차적으로 행복한 결말을 향해서 전개되어 가는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룻기를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삶만을 위해 존재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삶을 위해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세상의 짦은 삶이 우리의 목표일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우리를 밀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와 마찮가지로, 창조의 완성인 새하늘 새땅에서 영원한 행복을 향해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몰아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롬4:9~12; 갈3:7~9,14). 그리스도에 의해서 다윗의 왕위는 이제 영원히 세워졌던것 처럼(마28:18~20; 롬1:5,15:8~12), 이제 이방인인 우리들 역시 영원히 세워질 근거가 마련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들 가운데 구속 받은 백성들은 모두 하나님의 가족의 구성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이방인과 나그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엡2:11~12).
어느날 이발사와 목사가 나란히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발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이 세상이 외 이렇게 악하고 가난하냐고 기독교의 모순을 늘어 놓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머리가 길어 지저분한 모습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목사가 왜 이발사가 있는데, 저 사람은 머리가 길도록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발사는 물론, 그가 내게 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으니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교파간의 알력 때문에 심한 분쟁에 말려들어 고민을 하던 한 목사님이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꿈에 천국에 갔는데 뜻밖에도 무간에 커다른 통이 하나 있었고, 천국 문으로 통과하는 사람마다 그 통에 자기 교파 명찰을 전부 떼어 넣고 있었다고 합니다. 천국에서는 장로교인, 감리교인, 무슨 교인 하는 이름 가진 자는 없고,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있을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떠십니까? 하나님의 뜻이 분별되어지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찾기 힘들다고 하지만, 너무나도 선명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곁에 계시며, 오직 하나님께 나아오는자,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자신의 백성을 삼아 주시겠다는, 분명한 음성을 들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고달프냐고, 왜 이렇게 힘이드냐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은 곤란합니다. 우리는 이 짧은 인생을 살고 말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삶이 다소 힘들면 어떻습니까? 조금 늦게 가면 어떻습니까? 조금 천천히 간다고, 조금은 낮아져 있다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의 흐름속에서 영원할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부러워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럴수 없는것이 우리의 인생이며, 우리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한계는 없어졌습니다. 오늘 룻기에서 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신 하나님의 전적이 은혜로, 우리 역시 초월하게 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건 한숨 쉬는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건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삼아주시고, 이처럼 이방인을 구원에 이르도록 해 주셨으니, 이제 우리 함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두 팔들고 다 일어나 감사와 찬양을 드리십시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함께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