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샤
정원숙
붉은 사과의 밤
달빛은 붉고
눈발도 붉어
눈은 길을 만들고
남북으로 휘돌고
나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사상이 부끄럽고
오래도록 침묵했던 나타샤는
가난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나타샤는
치마폭 가득 사과를 따가지고
마가리로 향하네.
눈 속에 눈이 처박히는 밤이네.
사과 속에 꽃잎이 절명하는 밤이네.
옹이진 습곡을 다스리는 백지의 시간들
꽃잎은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는 마가리를 생각하고
마가리는 끝끝내 당도할 나타샤를 기다리네.
나는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연고도 없지만
적벽의 절벽을 외롭고 높게 오르지만
사과는 붉게 익어가고
익어가는 눈송이는 생각이 깊어지고
눈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귀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백지가 백지를 수식하는
완벽한 환유의 시간이네.
꽃잎이 사라질 때까지
입이 사라질 때까지
쉴새없이 눈발은 익어가고
나타샤의 붉은 볼은 얼어가고
마가리는 나타샤를 기다리네.
눈은 눈 속으로 자꾸 처박히고
눈발은 사과 속으로 자꾸 절명하고
검은 눈동자의 나타샤는 실명失明을 하고
사과는 나타샤의 실명을 밤에게 설명하네.
모든 설명은 구차한 변명,
변명은 낮에나 어울리는 거라고
밤은 익어가며 생각하네.
나타샤가 당도할 마가리를 생각하네.
하얀 족두리 쓴 마가리를 생각하는
나타샤를 생각하네.
꽃잎이 지고
달빛이 지고
침묵할수록 가까워지는
나타샤의 호흡소리
간절할수록 지워지는
나타샤의 발자국
영어(囹圄)의 시간들이 음각되네.
―웹진『시인광장』(2013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