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가난한 들판에도 꽃은 핀다-베토벤 (중)
베토벤을 모델로 한 소설 ‘장 크리스토프’를 쓴 로맹 롤랑은 “만약 하나님이 인류에게 범한 죄가 있다면 그것은 베토벤의 귀를 앗아간 것”이라고 했다. 롤랑과 당사자인 베토벤에게는 참 미안한 이야기지만 필자는 생각을 달리한다. “나는 보기 위해서 눈을 감는다.” 화가 고갱이 이같이 말했던가. 그게 무슨 말인가 싶다가도 두 번 생각해 보면 이해하게 되는 그 말, 비록 세상 소리 듣는 것에는 어두운 베토벤이지만 그렇기에 내면의 소리에 더 귀 기울일 수 있었다. 그는 옆집 사람이 두드리는 노크 소리는 듣지 못하지만, 운명은 어떻게 노크하는지 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운명 교향곡은 그렇게 탄생하지 않았던가.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교향곡 9번> 초연이 안나 훌츠의 도움으로 성황리에 끝나고 이윽고 현악4중주 <대푸가>(Grosse Fuge)를 발표한다. 네 대의 현악기가 사정없이 활을 내지르며 긁는 소리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실망하여 공연 중 자리를 떠난다. 심지어 대주교는 떠나면서 혹평까지 한다. “귀가 이토록 나빠진 줄은 몰랐어.”
Beethoven - Symphony No. 9 (Proms 2012)
Beethoven - String Quartet No.16 in F Major, Op.135
00:35 - I. Allegretto
07:46 - II. Vivace
11:41 - III. Lento assai, cantante e tranquillo
19:37 - IV. Grave, ma non troppo tratto - Allegro
하겐 4중주단(Hagen Quartet)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 사람은 안나 훌츠 혼자였다. 그러나 그녀도 대주교와 같은 심정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베토벤은 이야기한다. “추하지만 아름답지. 미에 대한 도전이야. 추함과 본능으로 음악을 인도하지. 이 안의 창자가 신께 가는 길이야. (배를 잡으며) 신은 여기 살아. 머리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야. 신을 느끼는 건 이 창자 속이야. 천국을 향해 창자가 휘감겨 있는 거야.”
직설적이고 다소 천박한 언어 선택은 거리에 주정뱅이나 할 법한 그런 것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곱씹어보면 이 안에는 분명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미학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처한 주변이 아름답지 않은데 대변하는 예술이 어찌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부조리와 차별로 가득한 세상에서도 ‘아름다워야 예술’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베토벤은 보기 좋게 깨부순다. 미화, 주변을 아름답게 해석하는 것은 일종의 왜곡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있는 그대로’를 보려 했던 베토벤이야말로 당시 세상에 필요한 소리를 들었으며, <대푸가>는 번민에 이은 통찰에서 나온 것이다.
“신을 느끼는 건 이 창자 속이야.” 신체에서 제일 깊숙이 자리 잡은 창자 속은 어지럽고 어두운 베토벤의 실상을 은유한다. 말구유 안에서 태어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그 길 또한 진달래꽃 고이 뿌려진 꽃길보다 냄새 나는 창자 속이었다. 그 창자 속에서 베토벤의 예술적 혼이 나왔으며 예수의 다시 없을 아가페 사랑도 그 속에서 나왔다. 우리가 흔히 쓰는 ‘애달프다’라는 말에서 ‘애’는 실제로 창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 말은 창자가 닳을 만큼의 아픔을 뜻하는데 애달팠던 베토벤의 간증이 <대푸가>인 셈이다.
바야흐로 가을 국화가 만발한 요즘이다. 찬 서리를 맞아야만 품고 있던 향내를 드러낸다고 하는 가을 국화처럼 들리지 않는 아픔 그 창자 같은 현실 속에서 아픔을 경험한 베토벤, 그의 아픔은 아름이 되어 진한 향기로서 우리에게 남아있다. (다음 회에 계속) / 이예진(공연기획가)
출처 / 주간매일[클래식] 가난한 들판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