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수산 / 작가, 세종대 인문과학대 교수 ]
글을 맺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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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수산 세종대 교수 | 사할린의 어제와 오늘, 그 비극의 역사직항로가 열려 매일 비행기가 뜨는 사할린은 서울에서 3시간 거리다. 러시아 연해주 동쪽, 일본 홋카이도 북쪽에 위치한 러시아연방 사할린(러시아어 Сахалин)은 일본에서는 카라후토(樺太)라고 부르는 세계에서 19번째로 큰 섬이다. 면적은 87,100㎢으로 남한보다 조금 적다. 100여개 이민족이 뒤섞여 살아가는 인구 약 67만의 땅, 주민의 80%가 러시아인이고 한인은 5.4%로 두 번째로 많다. 수도는 유주노사할린스크다.
1799년, 일본의 에도 막부가 사할린 섬 남부의 통치를 시작했으나 1853년 러시아 제국이 영유를 선언한다. 이후 러일 양국의 ‘협동 관할지’를 거쳐 사할린이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된 것은 1875년부터였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로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섬 남부가 일본의 통치아래 들어가고 1918년에 일본군은 사할린 섬 북부 전역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사할린과 한국인의 슬픔과 치욕의 역사가 시작된 원점이다.
일본에 의해 ‘모집’ ‘관알선’ ‘징용’ 등의 이름으로 사할린으로 끌려간 한인의 수는 1941년 5만, 1942년 11만, 1943년에는 12만 명에 이르렀다. 탄광, 벌목장 등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며 고통 속에 살아야 했던 한인들에게 1945년 8월 15일은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비극의 시작이었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배로 사할린을 비롯한 4개 섬이 러시아로 귀속되었다. 2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연합국 점령 지구에서는 주민에 대한 자국으로의 귀환이 이루어졌지만, 소련 점령 지구에서의 귀환은 이보다 훨씬 늦어진다. 1946년 12월에야 체결된 ‘소련지구송환 미소협정’에 따라 총 292,590명의 일본인이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귀환하였다.
일본에 의해 사할린으로 끌려와 가혹한 강제노역에 처해졌던 한인들은 자신들도 일본인들과 함께 송환될 것으로 알았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일본은 더 이상 한인들이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귀환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이렇게 사할린에 남게 된 한인은 4만3천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당연히 일본인과 함께 송환될 것으로 안 한인들은 사할린 남단에 위치한 코르사코프 항구로 몰려들었다. 수많은 조선인들은 조국으로 데려다 줄 귀국선을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끝내 배는 오지 않았다. 사할린 북방 소수민족인 아이누족 일인들은 물론 중국인도 자국으로 돌아갔지만 한인들만은 끝내 그 대상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이 때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 이전인 미군정 시기로 이들을 보호할 외교적 보호권이 없던 상황이었다. 또한 남한에서의 질서유지를 이유로 미군정 당국은 재외한인의 귀환에 소극적임은 물론 식량과 주택 사정을 들어 귀환계획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어서 1956년 10월 19일, 일본과 소련이 국교회복에 합의한 ‘일소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 아내에 대한 귀환이 이루어진다. 1957년 8월부터 59년 9월까지 7차에 걸쳐, 766명의 일본인 아내와 1,541명의 한인 남편 및 자식들이 일본으로 귀환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으로도, 조국인 한국으로도 돌아가지 못하고 끝내 사할린에 남게 된 한인 가운데 더러는 러시아 대륙으로 이주하거나 북한행을 택하기도 했다.
1952년 이후 소련 당국은 한인들의 소련 국적 취득을 공식적으로 허가하였으나, 사할린에 남아야 했던 한인들은 대부분은 소련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은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소련 영역내 거주하는 자로서 소련 국적을 스스로 입증하지 못하는 자는 무국적자로 간주한다.”는 소련 국적법에 따라 무국적 상태가 된 한인들은 취업은 물론 마음대로 여행조차 할 수 없이 이동과 거주의 자유를 제한당한 채 살아야 했다. 이들 가운데, 특히 고향에 아내와 자식을 둔 사람들은 결혼을 거부한 채 몇 명씩 모여 집단생활을 하며 살았다. 이들을 현지에서는 ‘홀아비’로 불렀다.
일제에 의해 사할린으로 끌려간 후, 혹독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해방을 맞았으나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한 채 그 땅에 버려져야 했던 강제징용자들. 통토의 땅 사할린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몸으로 살아야 했던 그들도 세월과 함께 하나둘 고난의 생애를 마감하고... 한국으로의 ‘영주귀국’ 사업이 진행되는 속에 후손들은 러시아인으로 동화를 거듭하며 사할린의 오늘을 살아간다.
모스크바의 대학에 유학하고 유주노사할린스크시 제1부시장과 사할린주 건설국장을 지낸 한인 2세 김홍지(한인연합회) 회장이 보여주듯 한인들은 높은 교육열로 사할린 사회 곳곳에 진출해 있다. 그러나 러시아인으로 동화를 거듭해 갈 한인 2세, 3세에 대한 한국의 문화적지원은 미약하기만하다. 2005년 일본이 6억 엔을 지원하여 건립한 ‘사할린 한인문화센터’조차 문화공간으로서 기여하기보다는 식당 등 수익사업이 우선시되는 실정으로, 사할린은 한국문화의 불모지에 가깝다.
현재 사할린에는 3만여 명의 한인동포가 살고 있다. 사할린 이산가족협회의 2010년 자료에 따르면, 1945년 8월 이전 출생자로 현재 남사할린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은 631명이다.이들 사할린 동포들의 호소는 네 가지로 ①희망자에 대한 한국으로의 영주귀국, ②사할린현지 정착 지원, ③강제동원 피해 보상 및 이중징용 피해자의 생사확인과 피해보상, ④강제노역 당시의 저축금 등에 대한 일본정부의 배상으로 요약된다.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면, 사할린 한인들의 호소는 두 가지로 집약된다. 한국으로 영주 귀국하여 안산 ‘고향마을’ 수준의 시설에 주거를 희망하는 사람들과 이미 사할린에 정착한 자녀들과 헤어져야 하는 점을 이유로 영주귀국을 포기하고 한국이나 일본정부로부터 매월 일정한 액수의 보상금 또는 생활 보조비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2000년 영주귀국이 시작된 이래 2010년 3월까지 국내 19개 지역으로 3,762명의 사할린한인들이 영주 귀국했다. 이들은 전국의 20개 아파트에서 1,566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일본은 한인 영주귀국사업에 이제까지 약 700억 원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일 양국적십자사를 주체로 하는 이 사업―사할린 동포의 영주귀국, 일시 모국방문, 영주귀국자 역방문 등-은 전적으로 일본정부의 재정지원에 의존해 왔다. 지난 6월에 있었던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의 사할린동포 지원 관련 법안 공청회 자료집에 따르면, 2011년도 일본의 지원예산은 21억6천1백만 원이다.
이 현실이 보여주듯이 사할린 한인동포의 지원에 우리가 소극적인 데는 사할린 동포의 영주귀국이 국적 이탈로 인한 러시아와의 외교마찰 가능성이 있다거나 다른 나라 동포와의 형평성 문제를 운운하는 한국 관계자들의 발상도 문제해결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제는 이렇게 일본이 견인하는 방법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역사가 말해 주는 사할린 문제의 진정성에 더 깊이 다가서서 그들의 문제를 대변하고, 사할린 동포지원에 대해 우리정부가 주도하는 체제로 전환하는 일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