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목정은 단석산 줄기인 도매산 중턱에 있는 해발 350m 정도 고지대에 위치한 깊은 산골짜기다. 진목정 성지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허인백(許仁伯, 1822~1868, 야고보), 이양등(李陽登, ?~1868, 베드로), 김종륜(金宗倫, 1819~1868, 루카)이 순교하기 전 숨어 살던 동굴이 있는 곳이며, 그들이 처형된 후 육신이 땅에 묻혀서 진토가 된 곳이기도 하다.

옛부터 참나무가 많았을 뿐 아니라 참나무 정자가 있어서 진목정(眞木亭)이라고 칭했다. 단석산 동편 정상에 넓은 분지는 옛날 신라 화랑들이 심신을 단련했던 도장이었다. 이곳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옛날 사기굴의 가마터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마을을 이루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1592년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였다고도 한다.

1866년 대원군의 병인년 대박해를 피해 온 김해 출신 허인백 야보고와 서울 출신 이양등 베드로, 충청도 공주 출신 김종륜 루카 등은 언양 간월산 죽림리(공소)에 모여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곳 산내면 단석산 범굴로 숨어들었다. 순교자들이 호랑이 굴을 빌려서 생활할 때 바위 굴 산 중턱에 있는 큰 바위에서 밤중에 호랑이가 이따금 울어 대 근처 다른 짐승들이 순교자들이 머무는 굴에 침입하지 못하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와는 달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는 이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다가 체포된 곳을 죽령 교우촌으로 본다. 바위굴에 숨어 살던 허인백 등은 결국 감영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 감영에서 두 달 정도 감옥 생활을 하면서 몇 번의 심문과 고문을 당하였지만 당당하게 버텼다.

대원군 박해의 특징은 천주교 신자들을 배교시키는 것이 아니라 선참후계(先斬後啓)의 명령에 따라 지방관들이 자의로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신자들을 마구잡이로 처형한 후 보고마저 생략하여 무수한 무명 순교자(無名殉敎者)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그해 7월 하순 울산 병영으로 이송돼 그곳 장대벌에서 차례로 순교하였다.
그때 울산 동천 강둑에 묻어 두었던 허인백, 이양등, 김종륜의 시신은 허인백의 부인 박조이(朴召史)의 노력으로 진목정 공소 뒤편 도매산 중턱에 모셨다. 1932년 5월 28일 순교자들의 유골을 감천리 교구 묘지로 이장하였다가 1973년 다시 대구 신천동 복자 성당으로 옮겼으며 지금 이곳에는 가묘만 남아 있다.
■ 순교자
◆ 이양등 베드로 ( ? ∼1868년) <하느님의 종 125위>
이양등 베드로는 경상도 울산의 죽령 교우촌(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회장이었다. 본래 성품이 선량하였던 그는 꿀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였다. 그 후 그는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죽령 교우촌으로 이주해 온 허인백(야고보)과 김종륜(루가)을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2년 뒤인 1868년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베드로는 그곳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그는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어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 나가 허인백, 김종륜과 함께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순교 당시에 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아내 박조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 김종륜 루가(1819∼1868년) <하느님의 종 125위>
김종륜 루가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충청도 공주에서 천주교에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본관은 경주요, 족보 이름은 ‘경희’(敬熙)이다. 루가는 평소에 특히 화목함을 강조하였고, 어느 누구와도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였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부모를 모시고 경상도 상주 멍에목(현 경북 문경군 동로면 명전리)으로 피신하였다. 다시 언양 간월(현 경북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을 거쳐 울산 죽령(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죽령 교우촌에서 그는 이양등(베드로) 회장과 허인백(야고보)을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1868년에는 그는 그곳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그는 경주 진영에서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어 루가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어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 나가 이양등 회장과 허인백과 함께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순교 당시에 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아내 박조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 허인백 야고보(1822∼1868년) <하느님의 종 125위>
허인백 야고보는 1822년 경상도 김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언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다가 25세 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으며, 이후로는 아주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여 교우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아내 박조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정결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남매처럼 살았으며, 고신극기와 애긍에 힘써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많이 도와 주었다.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난 뒤 그는 체포되어 무수히 매를 맞고 언양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옥에 갇혀 50여 일을 지낸 뒤 경주로 이송되었으며, 8개월간 옥에 갇혀 지내다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그는 울산의 죽령(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산중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양등 회장과 김종륜을 만나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고, 나무 그릇을 만들어 팔아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는 묵상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자주 순교 원의를 드러내곤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2년 뒤인 1868년에 죽령 교우촌에서 체포되어 경주로 끌려가게 되었다. 경주 진영에서 문초 후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 나가 이양등 회장과 김종륜과 함께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순교 당시에 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아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