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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대학 탄생의 궤적과 국가권력
김정인(춘천교육대학교)
이승만 정부의 사학 방임 정책과 사립대학의 탄생
해방 직후 폭발적으로 달아오른 교육열에 기반하여 많은 사립대학이 설립되었다. ‘너도나도 대학 설립’이라는 말이 풍미할 만큼 사립대학 설립은 일종의 붐이었다. 1947년 12월 현재 31개 대학 중 23개교가 사립대학으로 74%를 차지하고 있었다.
1950년대에도 줄곧 대학과 대학생의 수는 증가했다. 1959년 현재 대학 진학률은 35%로 미국(28%)이나 일본(9%)은 물론 유럽(4-6%)보다 월등히 높았다. 이러한 고등 교육 팽창의 중심에도 역시 사립대학이 있었다. 사립대학의 급격한 증가에는 이유가 있었다. 농지개혁이 단행되자 지주들이 자신의 토지에 혹은 토지를 기부하는 방식으로 대학을 설립하는 데 나섰다. 또한 문교당국은 일정한 건물과 토지만 있으면 대학 설립을 허가했다. 이러한 풍토에는 심각한 부작용이 뒤따랐다. 1952년 고려대 총장에 오른 유진오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한국전쟁기부터 학생 등록금을 벌이 삼고자 많은 대학이 설립되었다. 이로 인해 대학은 영리사업화하고 학생 정원은 이권화했다. 그리고 대학 다닌 일도 없는 사람에게 학사증을 팔아먹는 일이 성행했다. 문교부는 부실 여부를 가리지 않고 공평무사의 원리를 들이대며 대학 정원 정책을 실시하여 오히려 부실 재단을 보호 육성하고 말았다. 당시 대학 중에는 수백 장, 수천 장의 학사증을 팔아먹는 대학, 전임교원 한명도 없이 시간강사로만 강의시간을 채우는 대학, 수십 명 정원에 수백 명 학생을 입학시키는 학과 등 부도덕한 학교들이 허다했다.
이처럼 해방 후 대부분 사립대학의 탄생 과정에서 자율과 자치의 학문 공동체라는 대학 고유의 가치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지주들이 농지개혁을 회피하고자 대학을 설립하고 학생 등록금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운영하면서 각종 불법과 편법과 비리를 저지르는데 정부는 그저 지켜만 보는 ‘현실’이 당시 언론에 오르내리던 대학의 자화상이었다.
1) 농지개혁과 사립대학의 설립
당시 문교 행정가였던 유억겸에 따르면, ‘해방이 되자 우후죽순과 같이 대학설립 기성회를 각 시, 도에서 조직하여 그 설립인가서가 문교부에 쇄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교육을 위한 학교의 설립 유지가 아니라 학교 자체의 설립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립대학의 설립 붐이 일어난 데에는 농지개혁이 미친 영향이 컸다.
당시 농지개혁 단행이 기정사실화되어가면서 지주들은 재산을 지키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주로는 소작지를 사전에 방매하는 방법을 구사했다. 그런데, 차츰 소작지 방매가 어려워지고 정치권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학교 소유 전답 및 문교재단의 자산인 농지는 수용하지 않는다.’는 데에 일정한 합의가 이루어지자, 대지주를 중심으로 재산보존의 수단으로 사학 설립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여기서 문교재단이란 문교부장관의 허가를 얻어 유치원, 학교, 장학회 또는 교화사업을 경영하는 재단법인을 말한다. 결국 1949년 제정된 <농지개혁법>과 함께 1951년에 재정된 <문교재단소유농지특별보상법>에 따라 지주들의 사학재단 설립은 재산 감소를 막는 효과적 대응책이 되었다. 당시 특별 보상을 받은 문교재단의 비율은 사학 재단이 64%, 사찰 및 불교재단이 13%, 향교재단이 12%, 종교재단이 6%, 기타 재단이 5%를 차지했다.
실제로 해방 직후 신설된 대학들은 설립자 혹은 지역 유지의 토지 기부를 바탕으로 설립된 경우가 많았다. 당시 신문에 등장한 토지 기부 ‘미담’을 보면 정병조와 그의 부인은 1946년 3월 시가 1천만원인 목포 땅을 감리교신학대 승격 설립 기금으로 기부했다. 국민대학은 조희재로부터 충남 천안에 있는 약30만평의 토지를 기부받았다. 또한 조희재는 시가 1억원의 토지를 기부하면서 스스로 단국대를 설립했다. 화산재단 설립자인 정봉현이 남긴 시가 1억원의 땅을 가족이 기부하면서 국학대는 정규대학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청주상과대는 설립자인 김원근․김영근 형제의 65만여평의 토지 기부를 기반으로 설립되었다.
이처럼 대다수 사립대학이 농지개혁의 영향으로 적지 않은 토지를 기부받아 재단을 설립하거나 학교 재정을 충당했다. 그런데 이들 대학의 설립자와 가족들이 대학 운영의 주체로 활약하면서 재정과 관련한 각종 분규를 야기했다. 대부분의 대학에서 설립자나 가족들이 이사장과 총장의 직책을 번갈아 맡으며 대학 운영에 직접 참여했다. 이는 사학재단들이 교육적 차원에서 자신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와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사립대학을 설립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설립자가 사학재단과 학교를 개인 재산으로 인식하면서 학교 운영을 등록금에 의존하게 만드는 고질적인 사학 병폐를 낳았다.
1949년에 제정된 <교육법>은 사립학교를 ‘교육은 본질상 국공립학교와 사립학교 사이에 차별이 없어야 하며, 또 사립학교는 국공립학교와 다를 바 없고 달라서는 안된다.’라고 하여 공교육의 대행기관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교육비는 수익자부담원칙으로 학생에게 전가하면서 교육을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사학에 주인이 있다는 인식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2) 정부와 사립대학의 갈등
이승만 정부는 교육 재정은 부족한데 교육열은 높았으므로 재단이 부실하더라도 사학을 인정하는 사실상의 사학 방조 정책을 펼쳤다. 그리하여 급조된 사립대학들은 대학 재정을 전적으로 학생들의 등록금에 의존하면서 재정 충당을 위해 학생 정원을 늘리기에 열중했다. 이에 정부는 대학 난립, 학과 증설, 학생 증원을 억제할 목적으로 1955년에 <대학설치기준령>을 공포했다. 본래 1950년 5월에 <대학설립기준령> 초안이 발표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공포되지 못했다. 그런데 전쟁 와중에 사립대학이 오히려 늘어났다. 사립대학 입학이 곧 병역 기피 수단이 되면서 여기저기서 돈벌이를 위한 사립대학이 생겨났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정식인가를 받지 않는 불법 대학들이 학생을 모집하고 부정입학사건을 일으키는 등 혼란이 끊이질 않았다. 이처럼 ‘폐점휴업 상태로 유명무실하고 거액의 입학금을 받으며 학생 신분증을 팔고 징병기피자의 소굴 역할을 하는 대학’으로 낙인찍힌 사립대학의 정비는 강력한 정치적 사회적 요구였다. 이승만 정부는 <대학설치기준령>을 공포하고 5개년에 걸친 대학 정비 계획을 발표하여 기준 미달의 대학은 통폐합하거나 학과와 학생 정원을 감축할 것임을 천명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의 대학 정비는 성공하지 못했다.
우선 학생 정원 확보에 자신의 사활이 걸린 사립대학들은 정부의 정원 정책을 따르지 않았다. 중앙대는 1955년에 문교부가 책정한 정원을 넘는 신입생 모집을 하고 분교를 없애라는 지시도 무시했다. 이화여대, 동국대 등도 초과모집을 단행하며 문교부에 맞섰다. 이 해 정부가 정한 대학 정원은 48,285명이었으나 실제 학생 수는 56,750명에 달했다.
사립대학과 이승만 정부는 등록금 책정을 놓고도 갈등했다. 만성적인 재정난에 <대학설립기준령>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립대학들은 문교부에 학생들로부터 건물 신축을 위한 공사비를 거둘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성균관대는 건물 신축 총공사비의 50%가 부족하다며 신입생에게는 1만환, 재학생에게는 3천환씩 거두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동국대도 건축시설비로 신입생으로부터 1인당 1만환, 재학생으로부터 5천환을 거두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문교부는 건물 증설이 필요한 경우에 학생 1인당 5천환 한도로 시설비를 징수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등록금 인상액을 두고도 정부와 사립대학 간의 신경전이 계속되었다. 1955년 2학기에 정부가 대학이 마음대로 올린 등록금 인상분을 학생에게 반환하라고 압박했으나 이화여대. 숙명여대, 동국대, 숭실대, 중앙대, 단국대, 연희대 등이 무시하고 거부했다. 1956년에 문교부가 등록금 상한선으로 53,400환을 제시하자 사립대학들은 7만 원대로 올려야 한다고 반발했다. 실제로 사립대학들이 정부의 인상 요구분을 넘는 등록금을 징수했으나 문교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와 사립대학 간의 갈등의 핵심에는 <대학설치기준령>의 시행 여부에 있었다. 사립대학들은 전국사립대학연합회를 결성하여 이 비상사태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이 연합회는 연세대 총장인 백낙준이 회장으로 고려대 총장인 유진오를 부회장으로 내세우며 교육의 자유, 대학의 자율을 표방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대학기업으로서의 자유를 관철하려는 의도를 갖고 출범했다.
문교부의 초기 시행 의지는 강력해 보였다. 1956년 1월 문교부는 전국 사립고등교육기관설립자 대표회의를 개최하고 먼저 시설 설비가 미달할 경우, 학생 등록금이 아닌 설립자의 재정 지출을 통해 기준에 도달하도록 하며 그것이 불가능하면 학과와 정원을 스스로 감축할 것을 요구했다. 집단적 대응에 나선 사학에 대해서는 ‘재단 운영 지침’을 제시하며 압박했다. 지침은 첫째 설립자․이사장 등에게 수당 기타 명목으로 다액의 금액을 지급하지 말 것, 둘째 법인 변경 등기 및 재산소유권 이전 등기는 반드시 법정 기일에 완료할 것, 셋째 기본 재산 처분 및 임원의 임기 만기에 따른 임원 개선과 그 인가 절차는 그 즉시로 수속을 밟도록 하여야 하며 특히 임원개선 인가는 반드시 임기 만료 전에 절차를 완료하도록 할 것, 넷째 임원과 사무직원을 겸직하지 말 것 등이었다. 또한, <대학설치기준령> 외에 사립대학의 재단법인을 조사할 법적 근거를 마련할 것임을 천명했다.
1956년 8월 16일부터는 열흘 예정으로 교사(校舍), 교지(校地), 운동장, 교원, 도서 등 5개 항목의 기준 도달 여부에 대한 심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전체 대학의 30%가 기준에 미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심사 결과로 경기여자초급대는 동국대에 통폐합되었고 국제대는 신입생 모집을 정지당했으며 국학대는 정원을 절반으로 감축해야 했다. 그 외 대부분의 사립대학이 정원 감축을 요구받았다. 결국 8만 명 정도의 전체 정원 중 6,690명이 감축되었으며 총 499학과 중 29학과를 폐지되었다.
사립대학들은 <대학설치기준령>에 한결같이 반대했다. <대학설치기준령>이 공포되는 순간부터 적용 시한의 연장을 요구했다. 이왕 설립된 대학은 초창기의 시설 불비를 탓하여 폐지시킬 필요가 없고 오히려 대학답게 육성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정부가 시설이 부족한 것을 알면서도 허가해 놓고 이제 와서 기준을 내세우며 시설 완비를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문계 대학은 5년, 자연계 대학은 6년으로 정한 시설 완비 기한을 각각 7년과 8년으로 연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립대학들은 문교부 산하의 고등교육 관련 심의회 혹은 위원회에도 적극 참여하여 대학 자치를 주장하며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대학설치기준령>을 무력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1957년에는 교육특별심의회가 대학 자치를 위해 대학의 교직원 및 학생 정원 문제는 각 대학에 일임하는 동시에 사립대학의 수업료를 비롯한 일반 경리는 문교부령으로 고정하지 말고 자유경쟁 원리에 따라 인가제로 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한 결의안을 문교부에 제출했다. 사립대학의 강한 압력에 밀린 문교부는 1958년에 등록금 일체를 각 대학에서 자율적으로 책정하도록 하고, 문교부가 대학 납부금의 최고와 최저 한도액을 제시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1958년에도 이화여대, 연세대, 고려대 등 12개 대학에서 법정 정원보다 재적 학생이 5,578명이나 초과한 사실이 드러나 문교부의 대학 정비 의지를 더욱 무색하게 만들었다. 문교부는 정원 초과 대학에 대해 학장 승인을 취소한다는 엄포를 놓으면서도 초과모집 사실 자체는 은폐함으로써 사립대학의 불법처사를 묵인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문교부는 인문계 6년, 자연계 대학 7년으로 1년씩 시설 완비 기한을 연장하는 내용의 <대학설치기준령> 일부 개정안을 마련했다.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는 사립대학에 시설 확충을 강요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부담을 과중하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립대학에 자금 조달과 건물 확장에 대한 시간적 여유를 준다는 것도 이유의 하나였다. 이에 대해 백낙준, 유진오를 비롯한 전국사립대학연합회 간부들이 참여한 대학조사위원회는 1958년 8월 대통령에게 5개년 계획을 8개년 내지 9개년 계획으로 연장하는 <대학설치기준령> 개정안을 건의했고 결국 9월 1일에 공포되었다.
이처럼 사립대학들의 집요한 압력에 <대학설치기준령>은 무력화되었고, 재단 조사를 위한 법령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1959년부터는 다시 대학 승격과 설립 신청이 이어졌다. 그리고 학생들로부터 등록금을 걷어 학교 시설을 확충하면서도 학교 설립자는 기본 재산을 한 푼도 불입하지 않고 학교 경영주가 될 수 있는 현실은 계속되었다.
2. 박정희 정부의 통제와 관리를 통한 사립대학 육성
1) 대학 운영 관리 정책
1960년대에 걸쳐 군사정부와 박정희 정부는 대학 운영에 대한 국가 관리 체제를 마련하는데 주력했다. 먼저, 군사정부는 무엇보다 대학 정비 과정에서 대학 정원 문제를 가장 비중있게 처리했다. 대학 정원 문제가 가장 고질적인 대학 비리였기 때문이다. 1950년대 내내 ‘대학생 정원은 학과 설치와 관련하여 감독관청인 문교부의 인가를 받도록 한다’는 법조문이 무색할 정도로 재정을 등록금에 의존해야 하는 사립대학의 주도로 대학생이 급격히 팽창했다. 이로 인해 대학 교육의 질 저하는 물론 고등실업자가 양산되면서 급기야 대학망국론이 등장했던 것이다. 군사정부에서 해병대 대령 출신으로 문교장관을 맡은 문희석은 대학교육이 폭리를 추구하는 허울뿐인 곳으로 전락해 쓸데없는 학사를 배출한다고 비판하며 대학 정원 감축에 앞장섰다.
문교부는 1961년에 91,920명이던 대학 정원을 40% 감축하여 1962년에는 61,164명으로 확정했다. 서울대의 경우, 학생 정원을 12,700명에서 8,460명으로 4,060명이나 감축했다. 이공계는 별 변화가 없었고 인문계가 대폭 감축되었다. 하지만, 사립대는 대학 정원 감축 정책의 주요 표적이었던 만큼 대폭 줄었다. 동아대는 1961년 정원이 3,420명에서 1962년에 1,760명으로 절반이나 축소되었다. 대학 정원 감축 정책은 사립대 적용 과정에서의 무원칙성 때문에 곧바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고려대 교수 김상협은 ‘이화여대는 군정이 유한마담을 양산하는 대학이라며 학생 수를 명맥만 유지할 정도로 줄이고, 연대는 설립자가 미국인이니 미국대학이라고 학생 정원을 줄이고 고려대는 민족대학이라며 마구 늘려주는 식’이라며 비판했다.
1960년대 중반 들어 박정희 정부는 대학 관리 체제 마련의 최대 장애물인 사립대의 고질적인 정원 외 초과 모집 관행을 뿌리뽑기 위해 강력한 조치를 잇달아 내놓았다. 1965년 1월에 문교부가 정원 초과 모집이 발각되면 총학장을 인사조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화여대에서 다수의 정원 외 신입생이 발각되면서 정부와 사학 간의 공방은 1년 내내 계속되었다. 그해 12월에 박정희 정부는 「대학학생정원령」을 공포하여 대학 정원에 대한 국가 관리의 법제화를 시도했다. 이 정원령에 따르면 위탁학생, 외국인 학생 및 교포학생을 제외하고는 대학이 정원령에 명시된 정수를 초과하여 입학을 허가할 수 없었다. 1966년에는 아예 대학 입학 선발고사에 합격한 자에 한해 미리 문교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 입학 허가서를 발급받도록 정원령을 개정했다. 그리고 정원 외 초과 입학을 형사 범죄로 취급하면서 사립대 정원 초과를 단속하기 위해 합동수사반을 편성하거나, 적발될 경우 행정처분 혹은 총학장에게 형사책임을 묻는 조치를 내놓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박정희 정부는 대학 정원 관리에 있어 사립대의 정원 외 초과 모집을 방지하려는 노력과 함께 경제 성장을 선도할 고급 인력의 수요에 주안점을 두기 시작했다. 종합적인 인력 개발 계획 안에서 이공계 증원을 중심으로 대학 정원을 관리하고자 했다. 이공계와 인문계의 비율을 종전의 7 : 3에서 6 : 4로 조정하고 1967년부터는 제2차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인 제2차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에 따라 과학기술계 인력을 전략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매년 6만 4천여 명의 과학기술 인력이 증원되어야 한다는 예상에 따라 국공립은 물론 사립을 포함하여 전반적으로 이공계 정원을 증원하는 방안이 마련되었다. 이후 대학 정원은 이공계 중심으로 꾸준히 증원되었으며, 인문계 학과의 자연계로의 전환을 통한 증원도 시도되었다.
둘째, 군사정부는 학생 선발에 대한 관리에 나서 대학별 선발고사를 폐지하고 1962년부터 대학입학자격고시를 실시한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대학입학자격고시에 합격하여 각 대학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한 후 각 대학에서 실시하는 실기검사, 신체검사, 면접의 결과를 합산한 성적으로 대학생을 선발하여 부정 입학과 무능력자의 대학 입학을 막고 적격자를 선발하여 대학 교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대학입학자격고시가 시행 과정에서 입학 자격 유무가 아니라 사실상 선발의 기능을 하게 되면서 심각한 부작용이 뒤따랐다. 고등학교와 대학의 서열화가 발생했고, 성적 우수자가 서울 소재 대학으로 집중하면서 지방대학 특히 사립대학은 미달 사태에 직면해야 했다. 가령, 동아대의 야간대학은 지원자수가 1961년의 1,069명에서 1962년에는 118명으로 대폭 감소했다. 문교부는 정부가 대학의 선발권을 박탈한 것에 불과했다며 여론이 비등해지자 1963년부터 대학입학자격고시를 자격 고시로만 활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대학입학자격고시는 결국 시행 2년 만인 1963년 4월에 폐지되었다. 1964년부터 입학시험제도는 예전대로 환원되었다.
하지만, 1960년 5월 주한미국경제협력처(USOM)에서 내놓은 고등교육 관련 개혁안에서 대학입학시험을 전국에 걸쳐 공동 출제하는 방식을 건의한 이래, 사립대의 정원 외 초과 모집의 폐단을 심각히 우려하는 지식인들은 대학입학자격고사의 실시에 찬성하고 있었다. 국가적 사회적 수요에 맞춰 입학 정원을 책정하고 이에 맞춰 시험을 치러야 부정 입학의 여지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1966년의 대학입시자격국가고사제도 도입 시도에 이어 1969년부터 는 대학입학예비고사제를 시행함으로써 입학에 대한 국가 관리 체제를 안착시킬 수 있었다.
셋째, 군사정부와 박정희 정부는 학위 수여에 대한 관리를 시도했다. 군사정부는 1961년부터 국가가 시행하는 학사자격고시에 합격해야 대학 졸업이 가능하도록 했다. 4년제 대학의 전 과정을 이수하고 국가에서 시행하는 학사자격고시에 합격한 자에게만 대학 졸업장을 주겠다는 발상이었다. 그해 12월에 첫 학사자격고시가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졸업예정자의 72%인 1만 8,346명이 응시하여 84.7%인 15,628명이 합격했다.
학사자격고시 역시 날선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획일적인 국가고시가 자율성, 비판성, 창의성, 다양성을 추구하는 대학 교육 본질에 위배된다는 근본적인 문제제기부터 객관식 문제가 학업 능력을 마비시키며 출제 기간 부족으로 문제의 질이 너무 조잡하고 획일적이라는 구체적인 비판도 쏟아졌다. 결국 문교부는 1962년부터 교양과목만 국가가 관리하여 객관식으로 출제하고 전공과목은 각 대학이 주관식과 객관식을 함께 출제하도록 했다. 하지만, 군사정부는 합격률이 97%를 상회하고 학사고시에 소모되는 인력과 경비에 비해 실효성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1963년 4월에 대학입학자격고시와 함께 폐지했다. 그리고 두 차례 학사자격고시에서 불합격한 학생 전원을 구제해 주었다. .
박정희 정부는 1965년에 「대학학생정원령」과 함께 학위등록제를 실시하여 학위에 대한 국가 관리를 시도했다. 학위등록제는 대학 또는 대학원에서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고 일정한 시험에 합격한 자에 대하여 정원의 범위 내에서 학위를 수여하는 제도였다. 학사, 석사, 박사 학위 수여 예정자 명부를 문교부에 등록하면 문교부 장관이 그 사실을 증명하는 등록증을 교부하도록 했다. 학위등록제는 대학에 대한 국가 관리 체제를 강화하는 제도인 동시에 정원 외 초과 모집으로 들어온 학생들에게 졸업장을 남발하던 부도덕한 대학 운영을 불가능하게 만들고자 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그런데, 시행 첫해인 1966년에 사립대들이 정원초과 실태를 줄이려고 입대자나 휴학자 명단을 학사등록 신청에서 제외하면서 정상적으로 입학했던 약 6,000 명이 학사등록을 하지 못하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사립대들이 정원 외 초과 모집한 학생에 대한 정부의 선처를 기대하며 학사등록증 발급 신청을 미루어 졸업식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일도 발생했다. 이에 정부는 더욱 강경한 조처로 학사등록증이 없는 학생에게는 국가고시는 물론 공기업 채용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하고 졸업 자격이 있는 자에게 대학은 졸업장을, 문교부는 학사증을 부여하는 방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처럼 군사정부를 거쳐 1960년대 말에 이르면서 국가에 의한 대학 관리 체제가 정착되어갔다.
2) 사립대학에 대한 통제와 지원
이승만 정부가 제대로 손대지 못한 대학 ‘정비’에 군사정부가 나섰다. 군사정부는 대학 정비 과정에서 전체 대학의 70%에 달하는 사립대에 대학 난립의 책임을 물었다. 먼저, 총장이 재단이사장 또는 학무이사직을 겸임하지 못하도록 지시하고 2개 사립대학 총학장을 해임했다. 한양대 김연준 총장의 경우, 학생정원 초과, 경리 부정, 정치 관여 등을 이유로 해임되었다. 사립대의 정원은 55,040명에서 35,000명으로 감축했다. 또한, 4년제 주간대학을 27개에서 25개로 줄이고 4년제 야간대학을 4개에서 8개로 늘렸다.
박정희 정부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사립학교법> 제정을 통한 통제를 기획했다. 본래 1950년대 말부터 재단이 사립학교를 건실하게 운영하고 정부가 사립학교를 지원하는 데 필요한 법적 조치로서 <사립학교법> 제정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었다. 하지만, 1963년에 제정 공포된 <사립학교법>은 사립학교의 보호와 육성보다는 통제와 규제에 강조점을 두고 있었다. 다음은 <사립학교법>에서 논란이 된 조항들이다.
- 사립학교는 감독청의 지휘, 감독을 받는다.
- 학교법인의 수익 사업에 관하여 그 종류와 계획을 일일이 신고해야 된다.
- 학교법인 임원의 정원과 구성 및 임기 등에 관하여 세밀한 제한 규정을 두고 임원의 취임에는 감독청의 승인을 요건으로 한다.
- 문교부 장관의 직권에 의하여 임시의사를 선임할 수 있도록 한다.
- 학교법인의 예산편성요령과 회계규칙, 기타 예산 또는 회계에 관한 필요 사항을 문교부 장관이 정할 뿐만 아니라 감독청이 예산안의 시정을 요구할 수 있다.
- 감독청은 학교법인이 경영하는 수익 사업의 정지를 명령할 수 있고 필요할 때에는 학교 법인에 대하여 보고서 제출을 명하고 장부 및 서류 등을 검사할 수 있으며 이에 따른 필요한 조치를 명할 수 있다.
- 사립학교의 장을 임명함에 있어 감독청의 승인을 요건으로 한다.
- 사립학교 법인의 이사장이나 사립학교 경영자에 대하여 사립학교 법 소정의 규정을 위반하였을 때 징역과 벌금 등 실형을 받을 수 있다.
<사립학교법>은 사학의 자주성을 확보하고 공공성을 앙양한다는 취지를 내세웠지만, 개정 당시부터 사학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반대에 부딪혔다. <사립학교법>은 1950년부터 시행되던 일본의 <사립학교법>을 차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1964년에 감독청이 학교법인 임원과 학교장의 승인을 취소할 있도록 개정하는 등 일본의 <사립학교법>이 정부의 감독권을 제한한 것과는 달리 감독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사립학교법>이 공포되자, 한국사학재단연합회와 대한사립중등학교장회는 물론 대한교육연합회까지 나서 법 개정을 요구했다.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교육의 자주성과 특수성을 말살하려는 반민주적 악법이라며 <사립학교법>의 폐지를 요구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립기관 책임자의 인사권을 정부가 장악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사립학교법> 시행으로 교육자가 정치권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도래하거나 학원 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논란은 정부가 <사립학교법> 제․개정의 논거로 제시한 사학의 부패가 비단 사학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쪽으로 확대되었다. ‘학원경영문제가 오늘날처럼 확대된 책임의 절반을 문교부의 조절 내지 감독 기능의 부진에 돌릴 수밖에 없다’라는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사학 비리를 방조한 정부도 일부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69년 1월에 국회 문교행정 특별감사위원회가 실시한 사학에 대한 특별감사에서 일부 사학의 부정부패가 문교부의 묵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문교부 장관이 정원 외 학생을 모집해도 좋다고 묵인하거나 정원 외 학생을 신고하도록 하여 양성화해 준 일이 있다는 것이다.
<사립학교법>은 사학에 대한 국가 통제의 발판이 되기도 했지만, 사학 내에서의 재단과 이사장의 학교 지배를 보증하는 법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립학교법>에 따르면 재단 이사의 경우 민법상 친족 관계인 자들이 여럿 포함되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이사 선임에 대한 특별한 규정이 없어 친족 집단과 함께 친분 있는 인사 몇몇을 이사로 선임하여 특정한 친족 집단이 한 학교의 이사진을 장악할 수 있었다. 여기에 <사립학교법>은 이사장에게 이사회 단독 소집의 권한을 부여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이로 인해 사립학교들은 법적으로는 비영리조직이지만 이사장의 독단에 의해서 지배되는 사기업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사립학교법>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사립대학들이 운영난으로 교원을 대량 해고하고 장학금을 축소하는 등의 사태가 발생하자, 박정희 정부는 이승만 정부와 마찬가지로 1년도 못 되어 사립대학 정비를 포기하고 말았다. 다시 1966년에 사립대학을 겨냥하여 <대학정원령>을 공포했으나 여전히 일부 사립대학은 청강생에게 등록금을 받아 재단으로 빼돌리거나 부정졸업장을 남발하는 일을 계속했다. 더욱이 1963년부터 1967년 간 사학재단의 재정 부담률은 7.1%에 불과했다. 결국 정부는 1965년부터 사립대학 등록금 한도액을 철폐하고 1969년에는 기성회비의 한도액까지 철폐하여 등록금을 자율화했다.
사립대학에 대한 불신과 이를 방치하는 문교당국의 태도가 점차 사회문제화되면서 1968년 국회가 나서 처음으로 사립대학에 대한 국정 감사에 나섰다. 한양대, 중앙대, 경희대 총장들이 국회에 증인으로 나와 정원 외 입학과 졸업, 기부금 입학 등을 시인하고 문교 당국자들의 부정 입학 청탁 사례 등을 고발했다. 사립대학 문제에 대해 문교 당국의 무능을 질책하며 국회까지 나서는 상황에 몰리자 정부는 우선 대학 정원을 재조정하는 통상적인 대응책으로 사립대학을 압박했다. 사립대학 중에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등은 우대를 받아 정원을 늘렸지만, 국정감사 대상이 된 3개 학교의 경우는 한명도 증원시켜주지 않았다.
한편, 박정희 정부는 사립대학에 대한 통제와 함께 지원정책을 병행했다. 사립대학 지원은 이공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근대화의 재원을 쥔 정부가 경제개발전략 곧 공업화를 통한 근대화 추진에 필요한 고급 기술 인력 확보를 위해 이공계에 지원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사립대학에서는 많은 시설 설비와 교수 요원 확충이 필요한 이공계에 대한 국가 지원에서 국립대학에 밀리면서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야 공대를 설치하거나 이공계 학과를 증설하는 등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서울과 지방의 사립대학을 막론하고 인문계 학과를 이공계 학과로 바꾸면서까지 이공계 중심의 증원에 적극 나섰다. 정부는 대일청구권자금, 교육차관 등을 주선하여 사립대학의 이공계 학과의 시설 확충을 지원했다. USOM을 통해 세계은행과 미국의 민간차관 2천만 달러를 20년 거치 연 3푼 이자로 빌어오면서 정부가 보증을 섰다. 대일청구권 자금의 경우는 고려대가 20만 달러, 연세대가 17만 달러, 한양대와 인하공대가 9만 달러, 조선대가 7만 달러, 동아대와 대구대가 6만 달러, 중앙대, 경희대, 성균관대, 5만 달러, 광운공대와 수도공대가 1만 5천 달러를 받았다.
1970년대에 들어 박정희 정부의 사립대학에 대한 통제와 지원은 ‘실험대학 운영’이라는 정책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1972년 교육정책심의회 고등교육분과위원회는 실험대학과 대학 특성화를 통한 개혁을 골자로 하는 고등교육개혁방안을 발표했다. 실험대학은 점진적인 접근방법에 의한 대학개혁의 선도적 시범대학이라는 의미와 여건을 갖춘 대학이 대학교육 개혁을 위해 대학운영을 실험으로 시행한다는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었다. 실험대학 운영은 1973년에 졸업에 필요한 총학점의 감축, 학과별 정원제에서 대학별․계열별 정원제로의 전환, 부전공제의 적극 활용 등 3개 항목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실험대학으로 선정된 10개 대학 중 사립대학은 서강대, 고려대, 연세대, 숭전대, 중앙대, 인하대, 이화여대, 울산공대, 성심여대 등 9개였다. 사립대학이 대거 실험대학에 참여한 이유는 그간 논란이 되었던 대학 정원 문제는 물론 연구비 등에서 정부가 배려와 지원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사립대학이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열어 놓은 것이 바로 실험대학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험대학을 핵심으로 하는 대학 정책은 대학의 자율성을 억제하고 국가 통제하에 이루어진 계획적인 정책으로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 영남대의 경우 : 대통령이 교주인 사립대학의 탄생
영남대는 1947년에 개교한 대구대와 1950년에 개교한 청구대가 통합하면서 1967년에 생겨난 사립대학이다. 『영남대학교 50년사』는 영남대가 영남이라는 지역을 바탕으로 한 민립대학으로서의 오랜 전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면서 영남대의 건립연도를 대구대가 생겨난 1947년으로 잡고 있다. 대구대와 청구대가 민립인 것 분명하다. 대구 지역의 자산가, 유지, 향교 등 지역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대구대는 1945년 11월 국립종합대학을 목표로 경북종합대학기성회가 활동을 시작한 이래 우여곡절 끝에 단과대학인 대구문리과대학을 거쳐 1947년에 개교한 사립대학이다. 청구대는 대구문리과전문학원을 발판삼아 경북포화조합이 대학 설립을 추진하여 탄생한 사립대학이다. 재정난으로 1964년에 삼성재단으로 넘겨졌다. 하지만 영남대학의 경우, 형식적으로 사립대학은 분명하나, 내용적으로 민의를 모아 건립한 민립대학의 성격을 그대로 계승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구대와 청구대가 통합되고 영남대가 탄생하는 과정을 주도한 이가 바로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자 청구대 이사로 있던 이후락이었기 때문이다.
대구대와 청구대의 통합 추진이 세간에 알려진 것은 1967년 12월 10일 자 『대구일보』를 통해서였다. “양 대학의 일부 인사들은 서울의 일류 사립대학과 같은 훌륭한 종합대학을 대구에서 만들자면 양 대학이 통합되어야만 한다는 의견에 원칙적인 찬동을 보이면서 공적 사적으로 통합 방법을 구상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구대에서는 오는 15일, 청대에서는 금월 내에 각각 이사회를 열고 문제를 진지하게 토의 확정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한 것이다. 두 대학의 합병과 영남대의 설립은 신문보도의 예상보다 빨리 추진되었다. 12월 15일 대구대와 청구대가 각각 이사회를 열어 합병약정서를 통과시키고 그날로 문교부에 인가 신청을 냈다. 문교부 역시 바로 다음날로 학교법인 영남학원의 설립을 인가했다. 영남대의 최초 법인 이사는 ‘영남 출신으로서 박정희 대통령과 가까이 있으면서 그 뜻을 깊이 이해하고 실천에 옮기는 데 노력해 온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이동녕(이사장), 이효상, 김성곤, 서정귀, 이후락, 신현확, 성상영, 백남억, 김인, 최준, 한석동, 신기석, 여상원 등 13명이 이사를 맡았다. 이 중 이동녕, 이후락, 김성곤, 서정귀, 한석동 등이 청구대 이사 출신이었다. 성상영, 여상원, 이효상은 대구대 이사 출신이었다.
1967년 12월 18일 처음 열린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결의문을 채택했다. 여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우리는 박정희씨를 우리의 법인과 학교의 최고지도자, 교주로 모시고, 그 지도를 받고 그 지도에 따를 것을 굳게 결의하는 바이다. 이 결의는 장구히 우리 법인과 영남대학의 기본정신이 될 것이며, 또 행동의 헌장임을 확인하고 이사 전원이 이에 서명날인한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주도한 대구대와 청구대의 통합, 그리고 영남대의 탄생은 최고권력자인 박정희 대통령을 ‘교주’로 받드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다소 놀라운 것은 영남 굴지의 사립대학을 만든다는 설득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영남 출신인 대통령이 영남 지역에 만들어진 토착형 사립대학의 교주가 된다는 것이 마음대로 특권을 행사하는 부당한 반민주주의적인 처사라는 인식이 지역 사회에서 높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지역색과 특권의식이 결합된 교주 박정희에 대한 인식은 이후로도 여전한 듯하다. 1996년에 나온 『영남대학교 50년사』는 영남대의 설립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학교법인 영남학원의 역사적 발족은 설립자 박정희 대통령의 교육에 대한 관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민족중흥의 새 역사창조를 다짐하는 국민교육헌장의 선포와 민족의 대학을 육성하기 위하여 민족정신이 투철한 인사들을 주축으로 새로이 발족한 학교법인 영남학원의 역사적인 출범과는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학교법인 영남학원의 출범은 설립자의 특별한 관심과 배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영남대의 탄생과 관련하여 사립대학임에도 불구하고 특권과 결탁한 관변적 요소가 게재된 기원적 하자에 대해 성찰하지 않고 여전히 ‘교주’의 존재를 당연시하는 인식과 정서에 배인 강고한 ‘지역색’ 자체가 탐구의 대상이다.
3.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학설립준칙주의와 사립대학의 팽창
사립대학의 탄생과 국가권력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에서 상세히 살펴보았으므로, 여기서는 1980년대 이후 사립대학정책의 흐름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980년대에 들어와 전두환 정부는 졸업정원제 실시를 명목으로 대학 정원을 대폭 늘리는 동시에 1981년부터 모든 대학운영 체제를 아예 실험대학 체제로 일원화시켜 버렸다. 이로 인해 국가 주도의 획일적 대학 평가가 곧 대학에 대한 재정 지원의 질과 양을 결정하는 오늘날의 대학 정책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노태우 정부에 들어와서는 교육 정책 전반에서 자본주의적 시장 논리가 전면에 등장하는 가운데 1990년에 〈사립학교법〉이 개정되었다. 대학 자율화라는 이름으로 단행된 이 개정으로 사립학교에 대한 정부의 공적 지도 감독 능력은 대폭 약화되었고 사학 재단에는 무소불위의 대학 운영 통제권이 부여되었다. 이로써 사학은 실험대학 이래 대학 평가를 통해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시스템이 정착된 가운데 대학 자율성의 확보라는 명목으로 대학 운영권을 장악하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사학이 갖고 있는 부정부패와 비리의 온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벗지는 못했다. 오히려 학교 내부의 견제 장치가 사실상 전무한 상태에서 전근대적인 족벌 경영과 전횡, 파행적인 학사운영, 학교의 사유 재산화, 공금 유용과 횡령 등을 둘러싼 사학 비리 사건들이 잇달아 터지면서 절박한 개혁 대상으로 부상했다.
김영삼 정부에 들어와서는 5․31 교육개혁의 일환으로 1996년부터 일정 여건만 갖추면 대학 설립을 허용하는 대학설립준칙주의가 도입되었다. 이는 대학의 다양화․특성화․자율화를 모토로 추진되었는데,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규제완화책이기도 했다. 종래의 대학설립인가제도의 경우, 신규 대학 설립을 위해서는 대학정원, 학과 수 등이 일정 규모 이상이 되어야 하며, 시설․설비․교원 및 재정 규모 등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을 충족해야 했다. 또한 학교 설립의 계획 단계부터 인가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세부적인 단계를 밟아야 했다. 그 밖에도 허가청인 교육부가 설립지역과 계열 그리고 설립자의 육영 의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독자적으로 설립을 결정하여 인가했다. 이처럼 대학 설립이 까다롭다 보니 신청자의 불만은 증폭되었고 그 화살은 교육부로 향했다. 이 밖에도 자신의 지역구에 대학을 설립하려는 국회의원들의 정치적 로비설도 끊이질 않았다.
김영삼 정부의 교육개혁위원회는 기존의 획일적인 학교설립 기준을 지양하고, 일정 기준을 충족하면 학교를 자유롭게 설립할 수 있도록 하는 준칙주의를 제안했다. 실제로 대학설립준칙주의의 발표 이후 사립대학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2011년 현재 대학 중 사립대학의 비율은 79.3%에 달한다. 이때부터 2000년까지 설립된 41개교 중 많은 사립대학이 교원확보율, 교지 및 교사 확보율이 법정 기준에 미치지 못했으며 해가 갈수록 그 사정은 악화되어 갔다. 여기에 사립대학들은 대학 자율화의 명분을 업고 IMF 사태 이전에는 13% 이상씩, 2000년부터는 6% 이상씩 등록금을 올려 대학 운영을 의존하는 구태를 반복했다. 족벌사학의 비리 역시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이사장이요 부인과 아들, 딸은 총장 혹은 교장을 하고 있고 이사장이 건설 회사를 경영하면서 자신 소유의 학교 시설 공사를 수의계약으로 발주하는 일들이 거침없이 일어났다. 내부 통제와 견제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족벌사학의 비리는 지금도 근절되지 않고 있다.
여기에 더 심각한 문제는 최근 들어 정부 기구가 결과적으로 비리 사학을 비호하는 일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2007년에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에 소속되어 사립학교의 임시이사 선임 및 해임, 임시이사를 선임한 학교법인의 정상화 추진 등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고자 출범한 정부 기구다. 그런데 이 위원회가 상지대를 시작으로 임시 파견 직전의 종전 이사들에게 실질적으로 대학의 소유와 경영을 되돌려 주는 일에 나서고 있다. 비리 재단의 설립자 혹은 관련자들이 퇴출되었다 하더라도 이미 죄값을 받은 처지이니 복귀를 허용해도 좋다는 게 그들의 논리다. 이는 사립대학을 공공재가 아니라 사유재산이라 보기 때문에 가능한 판단이요 행위다. 국가권력이 사학 비리에 사실상 면죄부를 주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첫댓글 두번째 사진 앞줄 왼쪽의 세번째 흰머리 노인분이 경주최부자집 14대 종손 최염 선생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