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이전 피난 교우들이 모여 살던 교우촌
병인박해 이전 피난 교우들이 모여 살던 교우촌이다. 수분리에 천주교 신자가 살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박해 이전 이춘경이라는 교우가 살면서부터였다.병인박해 때는 진다리에 6, 7호 40여 명, 막골에 5, 6호 30여 명, 운학동에 10여 호가 살았으며, 1840∼1850년대에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가 공소를 치렀다고 한다.
수분리 주위에는 공소가 많았고, 그중 수분리 교세가 가장 컸다. 수분리에 공소 건물이 세워진 것은 1913∼1914년경이었다. 당시 함양 본당의 이상화(李尙華, 1876~1957, 바르톨로메오) 신부와 진안 어은동 김양홍(金洋洪, 1874~1945, 스테파노) 신부는 두 본당의 인접 지역인 무주, 남원, 임실 등지의 공소를 방문하기 위해 서로 왕래하는 중간 지점인 장수에 역처럼 쉬어 가는 쉼터를 마련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수분리에 강당과 침실을 짓게 되었다. 그러나 건물 관리가 부실하여 허물어질 지경이었다.
당시 함양 본당에서 수분리 공소를 담당하고 있었고, 수분리에서 함양 본당까지는 70리 거리였다. 그래서 1920년 당시 함양 본당의 주재용(朱在用, 1894~1974, 바오로) 신부는 진안 백운면 두원리 주암동에 있는 김한서 니고나오 회장에게 수분리 공소를 맡겼을뿐 아니라 인근 공소들을 지도해 주도록 권하여 김한서는 1920년 10월 5일 수분리로 이사하였다.
김한서 회장은 수분리로 이사한 후 박재은 스테파노와 합심하여 수분리 공소 재건에 나섰다. 김한서는 가난하여 자신의 정력과 열심을 제공하기로 하고, 박재은은 물질적인 봉헌을 하기로 나섰다. 그리하여 1921년 먼저 공소 건물 개수 공사를 착수하였다. 당시 기와 공장은 함양에 있었다. 함양에서 수분리까지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그 사이에는 큰 산이 중첩하고, 내를 몇 번 건너야 하였기 때문에 사람이 등짐으로 기와를 나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우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기쁜 마음으로 기와를 운반하여 성당 지붕을 개수하고 성당 내·외부 벽을 고치고, 성당 사랑과 창고, 식당을 짓고, 정원을 정비하였다. 한편 영신회(靈神會, 신심회)와 친목회 등을 조직하여 교우들의 신심을 북돋우고 화목과 일치를 다졌다. 이리하여 본당 설립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수분 공소는 1926년 본당으로 격상, 1926년 5월 29일에 서품된 김필곤(金泌坤, 1898~1928, 바르나바) 신부가 초대 수분리 본당 신부로 부임하였다. 2대 수분리 본당에 부임한 석종관(石鍾寬, 1899~1974, 바오로) 신부는 문맹 퇴치 운동에 나서서 소화 학원을 세우고 가난으로 학교에 갈 수 없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교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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