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과 노무현이 열어 제친 진보의 큰 길!
1.요즘 드라마 ‘추적자’가 연일 화제다. 우리 사회의 단면을 아주 생생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스토리는 생략하고 내가 보는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뼈대만 추려보자. 이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우리 사회의 최고 권력자는 한오그룹 서회장이다. 그는 대법관, 검찰총장,심지어 총리까지도 전화 한통으로 사실상 쥐락펴락한다. 그의 힘은 금력에서 나온다. 심지어 대선에도 수천억대의 정치자금을 동원 직접 개입한다. 심지어 최고의 지지율로 청와대 입성을 눈앞에 둔 사위 강동윤도 진정으로 꿈꾸는 자리는 서회장의 그 막강한 한오 그룹의 오너가 되는 것이다. 대통령이란 헌법상 최고 직위도 그 목표를 위한 징검다리 일 뿐이다. 서회장 역시 이런 사위의 야심을 경계하며 자기의 혈육인 아들 서영욱에게 온전히 자기의 지위를 승계하려 모든 노력을 다한다.
그렇다 이 드라마는 이 사회 최고의 권력이 재벌, 즉 독점자본가에 수중에 있음을 그래서 국가기구마저 사실상 이 독점자본의 이익에 철저히 복무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2.이런 우리 사회를 사회구조론자들은 사회구성체란 개념을 통해 ‘국가독점자본주의’라 규정했다. 세계체제자본주의 구조하에서 각국 자본간의 세력구조와 이익조절 시스템이 드러난다면 보다 완결된 자본주의 세계상이 드러나겠지만(이 지점이 과거 사구체논쟁당시에 ‘신식민지’또는 ‘종속성’의 문제이며 이는 미국과 남한사이의 단순한 지배-종속을 넘어 초국적 금융자본과 국내 자본과의 관계문제로 확장된다.) 그런대로 여전히 ‘사회구성체론’은 한 국가시스템의 총체적 이해에 유용한 도구이다.
사회구성체론의 이론적 뿌리는 마르크스의 토대-상부구조이론이다. 그에 따르면 한 사회는 경제적 생산양식을 토대로 하는 하부구조가 그 정치적 상부구조인 국가권력의 성격을 규정하여 국가는 경제적 생산양식을 결정하는 생산관계(자본주의라면 생산수단인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의 노동에 대한 지배관계)를 수호하는 역할에 충실하게 된다. 즉 국가는 생산수단 사적소유 보장이라는 신탁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억압적 폭력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이 국가는 ‘조직 노동자의 군대’로 타도해야 할 대상이다.
이러한 국가에 대한 소박한 이해는 20세기의 시민 민주주의 확대와 진보당들의 의회진출 나아가서 집권의 경험들이 쌓이면서 사회구조론자들에 의해 다음과 같이 재정립된다. 정치적 상부구조로서 국가는 경제적 토대로부터 비록 최종심급에서는 규정되지만 그렇지 않은 차원에서는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다.
이 명제의 의미를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국가기구 그 최고 기구로서 통치권의 성격은 어떤 정치세력이 집권하느냐에 따라서 하부구조 즉 경제적 생산양식-이는 부의 생산,교환,소비 또는 분배방식 시스템 전체를 좌우한다.-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최종심급의 차원-나는 이 단계를 앞선 글 ‘자본주의 시스템의 이행’이란 글에서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화 단계’라고 표현했다. 즉 사회변혁의 핵심적 단계를 말한다.-에 도달해서는 막연한 개혁조치로는 넘어설 수 없는 경제적 토대로 부터의 반발 규정력이 압도적으로 밀려들 것이지만 말이다. 즉 쉽게 말해서 국가 권력을 누가 어떤 정치세력이 장악하느냐의 문제는 한 사회(구성체)의 근본적 변혁의 과정에 심대한 영향을 준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 사회구성체 이론으로 우리는 국가라는 상부구조가 단지 억압적 경찰기구나 관료적 사법,행정기구만이 아니라 법,종교,교육,이데올로기,문화 영역등 여러 하위 시스템을 포괄하고 있으며 이 상부구조의 여러 하위 시스템의 작동원리-하부구조인 경제구조를 지탱,유지하려는 기능에 충실한-를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20세기 이후 지배세력의 주된 관심은 폭압적 통치방식에서 세련된 지배방식에 쏠려왔다.
이전처럼 군화발로 짓밟고 직접적인 물리력으로 탄압하는 방식에 앞서 대중의 허위의식을 조장하여 체제에 순응하게 하는 통치술로 현대 정치의 헤게모니 투쟁의 중요한 고리이다. 학교,군대.교회,각종 매스미디어에 의해 전파되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주입과 정보 조작과 이를 통한 여론 왜곡이 그 주된 내용이다. 이 상부구조에서 기능하는 이데올로기의 주된 기능은 위와 같은 여론조작을 통해 경제적 토대의 모순에 의해 촉발되는 근본적, 사회변혁적 주제가 직접적으로 사회의 공론장에 출현하지 못하게 막는 작용을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해 공론장 그 자체를 파괴한다.
3.이 글에선 그 중에서 우리 남한 사회에 압도적 위력을 떨쳐온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반공-반북주의’와 분열 지배원리의 토종산인 ‘영호남 대립을 축으로 하는 지역주의’에 대해 집중하려한다.
‘반공주의’는 6.25전쟁 종료 후 한국의 지배세력의 이익에 배타적으로 기여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아왔다. 일제의 치안유지법에서, 반공법, 국가보안법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사회 개혁적 요구는 빨갱이의 이름으로 매도되고 그 어떤 진보적 운동도 반공의 칼부림에 스러져 갔다.
‘지역주의’로 말할 것 같으면 한국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던 박정희 집권기간 그 중에서도 대미 종속적 수출경제체제가 서울-영남을 축으로 차별적 산업화를 진행하던 유신시대 이후 ‘호남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시작되어 이후 30년간 영남출신의 자본가 정권 체제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수행해왔다. 이 과정에서 ‘저곡가 정책’으로 고통을 받았던 다수의 농민들이 도시의 저임금노동자로 도시빈민으로 혹독한 고통의 대물림을 해왔다. 그 중에서 최대의 곡창지대의 다수 인구를 구성하던 호남인들이 다수였음은 지역주의의 최대 피해자가 호남민중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자본주의의 경제토대의 핵심적 모순(자본을 소유한 자들이 다수 노동자를 지배하여 이익을 취하고 배를 불리는)에서 발생하는 사회갈등은 늘 그 본질적 문제의 사회적 공론화의 해결과정에서 반공주의와 지역주의(우리가 남이가 묻지마 투표등)의 벽에 가로막혀 제대로 된 해결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좌절해왔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보아 이 허위의 이데올로기의 근본적 물적 토대를 극복하지 못하고선 어떤 의미의 진정한 사회변혁도 난망함을 보여준다.
4.그런데 마침내 우리의 진정한 대통령 김대중과 노무현이 바로 이 거짓된 반공주의와 지역주의와 맞서 싸워 마침내 그 돌파구를 열었다. 김대중의 집권은 바로 반공주의와 호남 차별적 지역주의를 최초로 극복하고 진정한 사회발전의 토대를 구축했다는 의의가 있다. 바로 남북간 대결을 종식하고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가져올 615선언을 선포한 제1차 남북정상회담 개최였다. 이로서 남북의 8천만 한민족은 실시간 중계방송으로 서로의 속살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던 정례적 이산가족상봉과 금강산관광 개성공단과 각종 스포츠 문화교류로 질긴 적대감정을 쓸어내며 평화통일의 대장정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지역주의 극복의 문제는 DJP연대의 논리였던 ‘지역등권론’의 한계에서 드러났듯이 김대중 집권 5년 내내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지역차별에서 비롯된 지역감정의 문제는 지역주의의 폐해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일부 정치인이나 진보진영, 노동운동에 빨간딱지를 들씌워 고립시키는 반면 지역주의는 수혜자나 피해자가 모두 교활한 지배세력의 농간에 희생되고 그 파급범위가 거의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한 지역의 식민화로 국민국가 건설에 치명적이라는 점에서 그 해악은 반공주의의 그것을 넘어선다.
이 지역주의 30년 광풍을 잠재울 시대적 사명은 김대중 집권당의 세력도 미미한 비주류 정치인 노무현이었다. 그는 정치인생 전부를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서 헌신했다. 숱한 좌절과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오뚜기처럼 일어서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된다.
전국적 정당으로서 열린 우리당을 창당하고 지역패권정당을 극복하려는 그의 시도는 일단 실패했지만 그가 전국토균형발전전략에 따라 지방화시대를 선포하고 추진한 신행정수도이전,공기업지방이전과 기업혁신 도시건설의 추진은 많은 논란과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이래 30년간 괴물이 된 지역주의의 물적토대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로써 미국의 하위체계에 포섭된 한국의 수도권-영남을 잇는 산업 축은 서해안과 중부권 중심의 새로운 발전 축과 DJ의 남북경제공동체의 축과 맞물려 위기의 세계경제시대에 한민족의 21세기 새로운 번영의 가능성을 열고 있는 것이다.
5.드라마 추적자가 어떤 결말을 내리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는 인물은 이 국가독점자본주의 시스템에 부역하는 주인과 머슴들이 아니다. 이 체제가 자기들에 부여하는 부정의한 기능을 거부하고 이 허위와 위선의 거짓된 체제에 맞서 싸우는 한 개인들이다. 딸의 억울한 죽음의 누명을 벗기려고 목숨을 건 주인공 백홍석과 그를 돕는 형사와 건달, 함정에 빠진 아버지에 수갑을 채운 치욕을 간직한 검사와 믿었던 가족들이 살인범이자 온갖 부조리의 진원임을 알고 이에 맞서는 여기자..
이렇게 온갖 허위와 기만이 난무하는 세기말의 한국사회에서 양심적 실천가로서 온갖 역경을 딛고 최고 권좌에 오른 후에도 이 사회구성체의 발전을 위해 싸우고 또 싸운 두 거인이 2008년 연이어 세상을 떠나셨다.
희대의 악귀 아퀴히로가 그 두 분의 실존의 자리는 빼앗았으나.. 그 두 분이 열어 제친 진정한 사회진보의 길은 더욱 그 폭을 넓히고 있다. 바로 진정한 사회변혁의 걸림돌이던 반공반북주의와 지역주의라는 괴물의 뿌리를 뽑아냈기에... 비록 아직 나 죽지 않았어! 하고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지만 두 괴물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이제 우리사회는 근본개혁의 지름길로 성큼 내달릴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 반공주의와 지역주의란 낡은 관문을 지나왔기에 그러하다.. 누가 어떻게 최종의 관문을 돌파하여 나아갈 건가?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한국사회가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겁니까...?
그러면 군사 정치 외교 주권도 없는 국가독점 자본주의도 있나요...?
쥐맹바기가 일급군사정보를 쪽바리들에게 받치는것도 독점자본 논리인가요...?
곧 지난번에 말씀드린대로 제 견해를 본글로 올려보겠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
류경님 진짭니까?
난 처음 듣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