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을 개조한 알베르게는 시원하고 편안했다. 어젯밤 산티아고 터미널에 도착하니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어 또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는데 어떤 일본인 순례자가 나를 알베르게까지 데려다 주었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면 누구든 꼭 나타나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걸 확인시켜주신다. 살짝 돌아만 누워도 매트리스가 프레임 밖으로 삐져나가는 간이침대였지만 이층 침대가 아닌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감사하면서 푹 잤다.
알베르게에서 바라본 산티아고 시내
어젯밤 사놓은 빵과 요구르트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숙소에서 만난 한국 청년 진우씨와 함께 성당으로 향했다. 일본인 화가 한 사람이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에서부터 아시아와 유럽을 가로질러 산티아고까지 걸어온 길을 지도로 그려 이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볼 수 없었다. 벽돌 사이로 이끼와 들풀이 자라난 성당 위층에서 한참 산티아고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도시는 활기차고 사람들은 여유로웠다. 성당 앞에선 오늘 도착한 사람들이 들뜬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환호를 하고, 서로 축하의 포옹을 나눈다. 햇살이 눈부셔 나는 반쯤 실눈을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모든 것이 오래된 영화에서 본 장면처럼 아득하다.
산티아고 성당 회랑. 바닥은 성인들의 무덤인 듯하다.
산티아고 성당의 순례자 미사엔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미사 내내 또 까닭모를 눈물을 흘렸다. 감동이 가득한 미사가 끝나고 영성체 시간이 되자 순례자들이 성체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신부님 몇 분이 차례로 줄선 순례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나눠주고 계시는데 어느 순간 사람들이 가림막을 넘어 새치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밀치고 파고드는 사이, 줄은 순식간에 무너져 아수라장이 되었다. 순례랍시고 이 먼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영성체 조금 먼저 받겠다고 법석인 모습을 보노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 인간들은 어째서 이리도 불완전한 것일까!
그 순간 내 눈에 신부님 한 분이 비쳐들었다. 신부님은 헝클어진 줄 사이로 저마다 손을 뻗으며 아우성치는 순례자들에게 말없이, 골고루 성체를 나눠주고 계셨다. 줄을 서라고 말씀하시는 법도, 꾸짖거나 타이르는 법도 없이 그저 당신이 하실 일, '그리스도의 몸'을 순례자들 손바닥에 경건하게 놓아주시는 일, 그 일을 하실 뿐이었다. 그 신부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방금 전까지 느꼈던 혼돈은 간 데 없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이상한 평화가 느껴졌다. 어쩌면 모든 게 완전한 이 길에서 제일 불완전한 것은 사람이고 어쩌면 그 때문에 사람이 제일 아름다운지도 모른다고, 이 불완전한 사람을 통해서만 그분의 뜻이 온전하게 드러나는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사실은 사람이야말로 신이 창조한 피조물 중에 제일 완전한지도 모른다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미사가 끝나고 진우씨와 방송작가 일을 한다는 지은씨를 만나서 함께 '까사마놀라Casa Manola'에 갔다. 이 식당은 값도 싸고 맛도 좋을 뿐더러 양이 푸짐하기로 소문나 순례자들에게 아주 인기있는 식당이다. 지난 월요일에 이곳에 도착했다는 지은씨는 파울로 코엘료Paulo Cohelo를 직접 만났다고 했다. 산티아고 근처에 '파울로 코엘료의 길'이 생겼다는데 그 행사 참석차 파울로 코엘료가 직접 산티아고에 왔다는 거다. 지은씨는 코엘료 아저씨와 함께 찍은 사진과 크레덴시알에 받은 사인을 보여주었다. 길에서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다정했고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는 아저씨, '연금술사'같은 매혹적인 책으로 내게 이 길을 알려준 아저씨를 언젠가 직접 한 번 만나봤으면...
수고한 발에게도 산티아고 성당과 함께 사진찍는 영광을 드렸다.
오후 내 나는 성당이 바라보이는 광장에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회랑에 기대 잠이 든 순례자들도 있고 나처럼 해바라기를 하는 순례자도 많았다. 며칠 전, 꿈 속에서 나는 어려운 질문을 들고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 질문에 답해주지 않고 그냥 떠나셨다. "너 혼자 할 수 있다"하시며.
이 길에서 나는 무엇이 달라진걸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생각'이 없어져 주저하고 머뭇대는 일이 줄었다는 것? 또, 전보다 두려움이 덜해졌다는 것도 변화라면 변화다. 나는 이제 혼자가 된다거나 헤어지는 것을 전처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 다시 만난다는 것, 어떤 이별도 끝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끝이란 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내 기적은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보름달이 뜬 묵시아 바닷가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그 순간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내가 길이 끝난 곳이 아니라 길이 시작되는 곳에 와있다는 사실, 바로 그거였다.
다시 그림자를 밟고, 나는 길 위에 선다.
첫댓글 주님의 평화가 그림자와 함께 님의 발가락과 함께 하심을.....샬롬^^
지금도 시작! 다만 우리 손을 잡고......
아주~새롭지만 익숙한 아름다운 시작을 ~~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