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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웠던 집안 형편으로 포기할 뻔했던 음악의 길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작곡가 이수인(1939 ~ )은 6.25가 발발한 해인 1950년 여름 마산 회원국민학교(초등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은 아버지를 따라 마산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가야금 연주를 좋아하던 아버지는 안타깝게도 당신이 늘 바라시던 마산생활을 2년도 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수인은 그후 마산에서 마산중학교와 마산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는 학교에서 전교생이 모인 강당에서 <가고파> <내 마음은 호수여> 등을 불러 노래를 잘 부르는 학생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수인은 대학 진학을 앞두고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깊은 고민에 빠졌다.
스스로 돈을 벌어 대학에 다니거나 아니면 직업을 찾아 사회로 나가야 하는 두 가지 길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수인은 5남4녀 중 일곱째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집안의 경제적 상황이 매우 곤궁했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인생이 낭만도 아니고 음악도 아니라고 상심하며 홀로 밤이 깊도록 무학산 중턱에서 항구를 내려다 보곤 했다. 때마다 가야금을 연주하시던 아버님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그러던 중 '내 가슴속에 음악을 하지 않는 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고 그날 밤으로 책가방과 옷가지를 챙겨들고 서울행 기차를 탔다.
어머님은 몇 푼의 노자를 손에 쥐어 주시며 “배고프면 그냥 내려오너라”고만 하셨다. 서울에 사는 친구 집에 기거하며 이런저런 궁리 끝에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에 입학원서를 냈다. 그리고 수석으로 입학해 전 학기 전액을 면제 받는 장학생으로 평소에 흠모해 오던 김동진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다.
선생님은 여러 가지 작곡일로 바쁘셨다. 그 중에서도 특히 충무로에서 제작되고 있는 영화음악을
거의 도맡아하고 계실 때여서 나는 입학 초부터 잠만 따로 잤지 거의 날마다 선생님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일을 도왔다
이수인은 대학을 졸업한 직후 마산 성지여자 중·고등학교 음악선생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이듬해 마산 제일여자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마산 제일여고는 교사가 1백여 명에 이르는 큰 학교였다.
교사 중에는 후일 서울대 교수가 된 여류 시인 유안진, 문학평론가 조병무, 소설가 김지연, 시인 김재호 같은 분이 있었다. 평소 좋아하던 가람 이병기 선생의 시 ‘별’에 곡을 붙인 것은 이 시절이었다.
“하루는 밤이 늦도록 음악실에서 혼자 피아노를 치고 운동장을 걸어 나오는데 달이 없어서인지 그날따라 유난히 별이 밝았다. 초등학교 시절 지리산 그림자와 함께 보았던 그 별떨기들이 그곳에 있었다. 운동장 가운데서 한참 동안 별구경을 하다가 문득 애송하던 가람 이병기 선생님의 시가 떠 올랐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마루 하늘은 구름에 벗어나고~~ ” 나는 그 길로 음악실로 달려가 피아노에 손을 얹었다. 내 입에서 어느새 가람 선생님의 <별>이 노래가 되어 나오고 있었다. 단숨에 악보가 그려졌다. 내 가슴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다시 손볼 필요가 없이 노래가 만들어졌다.
이수인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곡 중의 하나인 별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후 이수인은 한 선배의 중매로 음악을 사랑하던 김복임을 만나 결혼 했다.
아들이 태어나 “생명의 신비로움에 경탄하고 있을 때”(본인 표현) 서울 중앙방송국(KBS 전신)에서 어린이 합창단 지휘자로 와 달라는 요청이 왔다.
갓 백일을 넘긴 아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 온 내외는 서강 굴다리 아래 방 한칸 부엌 하나인 셋방을 얻어 서울 살림을 시작했다. 1968년 10월이다. 당시 서울 중앙방송국은 남산에 있었는데 서강 굴다리에서 남산까지 늘 걸어다녔다.
고향의 노래
남산의 중앙방송국에서 합창단 연습을 끝내고 남산 자락에 자리한 대폿집 구석에서 소주 한 잔 걸치는 낭만이 일품이던 어느 가을, 집에 와 보니 마산 제일여고 교사 시절 단짝이던 친구이자 시인이던 김재호 선생으로부터 엽서가 와 있었다.
서울이라고 떠나면 모두가 고향을 잊느냐는 작은 눈 흘김과 함께 노래하던 음악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썼노라고 시를 한 편 보내왔다.
국화꽃 져버린 겨울 뜨락에 창 열면 하얗게 무서리 내리고 나래 푸른 기러기는 북녘을 날아간다 아 이제는 한적한 빈 들에 서 보라 고향 길 눈 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달 가고 해 가면 별은 멀어도 산골짝 깊은 곳 초가마을에 봄이 오면 가지마다 꽃 잔치 흥겨우리 아 이제는 손 모아 눈을 감으라 고향집 싸리울엔 함박눈이 쌓이네
나는 친구의 엽서를 손에 들고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친구의 우정과 고향의 숨결이 온 몸에 전율처럼 느껴졌다.
사랑스런 친구의 우정을 생각하며 단숨에 쓴 <고향의 노래>는 그 후 테너 엄정행의 목소리로 레코드를 타고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앞의 글은 이수인이 ‘2000년 12월 성산동에서’쓴 것이라고 책 속에 적혀있다. 이수인은 그 후 2002년 1월 <고향의 노래>에 대해 다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몸살 나는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을 때의 기쁨은 마치 바라고 바라던 귀한 아이를 얻은 어머니의 기쁨에 비길 만한데. 이는 오직 창작의 기쁨을 맛본 자만이 누리는 특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 행복한 순간이 언제내고 묻는다면 단연 독서나 명상을 통해 얻은 좋은 글과 악상으로 새로운 곡을 탄생시켰을 때라고 말하고 싶다.
그중에서도 1960년대 말 <고향의 노래>를 작곡하고 받은 마음의 위안과 행복감을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당시 나는 꿈같이 지낸 고향에서의 교직생활을 접고 서울로 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는데, ‘도회지 부적응증’과 함께 향수병이 날로 심해져 외롭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 벗으로 친하게 지내던 김재호 시인이 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엽서에 “국화꽃 져버린 겨울 뜨락에 ~”로 시작되는 그리운 고향 소식을 적어 보내 주었다.
나는 곧 피아노 앞에 앉았고 그래서 태어난 곡이 바로 <고향의 노래>였던 것이다. 작곡가도 당연히 작품을 완성하고 났을 때 만족감과 행복감이 더 큰 작품이 있을 터, 발표 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유명 가곡의 반열에 오른 <고향의 노래>의 경우가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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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인 김재호 선생님, 제가 아는 분 같아요. 교사하셨고, 나중에는 출판사에서 편집장을 하셨지요. 제 수필집, 푼수가 그리운 시대를 출간할 수 있도록 해주신 분인데...이 분 같아요. 출판사 그만두고 소식이 없네요. 약주를 너무 좋아하셔서~ 좋네요. 한 편의 시가 노래로 탄생하니 더 듣기 좋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