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계절
이 재 선
jae2812@hanmail.net
말이 많으면 하수
개구즉착(開口卽錯)-입을 열면 이미 그르친다. 즉, 진리(道)는 말로써 표현되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진리뿐만 아니라 마음도 말로써는 다 표현할 수 없다. 단어의 궁핍을 수시로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구체화된 텔레파시로써) 이심전심할 수 없으므로 더 큰 허물을 막기 위해서 말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강단에서, 토론에서 침묵할 수 없다. 열변을 토하고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다. 천 냥 빚도 말 한마디로써 갚을 수 있다. 협상을 잘 해서 공동체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 사랑한다는 말은 장난으로 하더라도 무심할 수 없고 또한 아무리 많이 들어도 지겹지 않다. 권태가 없는 유일한 말이라고나 할까. 꿔다 놓은 보리자루보다는 즐겁게 재잘거리며 낙천적으로 살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양면적이다. ‘침묵은 금이고 웅변은 은이다.’라는 말은 얼마나 많은 검증을 거쳐 명언이 되었을까. 말은 허망한 것이다. 수다 뒤의 허탈을 어이하리. 말을 많이 하다보면 거기에 도취되어 자기주장이 강하게 되고 목소리가 높아져 스스로 하수가 되어간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라는 말도 괜한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말도 그러하거늘 남을 헐뜯는 말이나 이간질시키는 말에서야……. 사람은 모름지기 세 뿌리를 조심하라 하였고 특히나 세 치도 안 되는 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해칠 수 있는지 덕담이 아니면 말을 말라고 했다. 덕담도 남발하면 아니 한만 못하니 말을 하려면 침묵보다 나은 말을 하라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자기의사를 표시하지 못해 불이익을 당해선 안 되고 말 한마디로 사람을 살릴 수 있는데 침묵할 수는 없지만 일상적으론 침묵이 더 크게 보인다.
옛날 중국에 어느 재상은 3대(지금 같은 핵가족이 아니므로 5, 6촌까지 수십 명)가 한 울타리에 살면서도 화목하게 지내는지라 황제가 불러 그 비결을 물으니 ‘부청부언(不聽不言)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애들 싸움이 어른싸움 된다고 그 큰집에 어찌 아무런 다툼이 없으리오만 아내의 불평불만, 시기를 남편이 듣고 더 이상 말을 옮기지 않으므로 다툼의 고리를 끊는다는 것이다. 대저 모든 화근은 말을 옮기는 데서 시초하지 않았던가. 능력이 조금 모자라거든 입이라도 무겁게 가져라. 그러면 아무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다. 어떤 위협적인 말도 침묵하는 눈빛을 누를 수는 없다. 주위엔 탁월한 능력이 있으면서도 입이 가벼워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과 열심히 수행은 하는데 너무 박식해서 입으로 다 까먹어 버리는 안타까운 사람이 있다.
수행에서 묵언(黙言)은 필수적인 단계다. 허망한 말에 집착을 버리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하고픈 말을, 알고 있는 사실을 떠벌리지 않기란 쉽지 않다. 어렵기에 자기 수행의 이력에 힘이 붙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정(市井)에서 무조건 침묵하는 것은 비능률이며 지혜롭지도 않다. 인도에서 침묵의 성자라 불리는 어떤 이는 수십 년간 묵언하면서 제자를 위한 설교 때만 조그마한 휴대용 칠판을 사용해서 필담을 한다고 한다. 나는 웃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어찌 묵언이랴. 입을 통해 말하지 않았다고 묵언이라면 벙어리는 평생 묵언했으므로 모두 성자가 되었는가?! 물론 묵언이 최종 목표는 아니다. 수행의 과정이다. 확철대오(確徹大悟)를 한 후에는 남을 위해, 그들의 잠자는 영혼을 깨우기 위해 진리를 설파해야 한다. 그의 근기(根機)에 맞게 말로써, 행동으로써, 침묵으로써 그의 영성을 일깨워야 한다.
인간의 본능 중엔 수다가 있어서 남의 비밀을 지켜주기가 쉽지 않다. 전에 같이 근무했던 동료가 털어놓은 엄청난 비밀은 파렴치한 범죄행위에 다름 아니어서 귀를 씻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필 왜 나한테 얘기하는 거야. 내가 입이 무겁다는 것을 무조건 믿는다고?’ 신고하면 그는 직장을 잃고 나와는 원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와의 신의와 내 도덕성과의 갈등으로 속만 끊였었다. 그는 나한테 비밀의 한 자락 들쳐보이며 수다와 배설의 욕구를 충족했을지 모르지만 듣는 나는 딜레마에 빠져 원치 않는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치 않았는지 그는 2년 전에 초라하게 죽었다. 나의 딜레마도 끝이 나고 그의 전화번호도 지웠다. 아무튼 남의 비밀은 안 듣는 것이 좋다. 지켜줘야 하는 수고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다. 취중에도 말을 아낄 수 있다면 독한 사람이지만 나무랄 수는 없다. 보통의 인간은 과묵함으로써 허물을 최소화할 수 있다. 글도 말의 다른 모습일진대 이글 또한 허물이 많다.
지금이 바로 그 때
모든 것에는 알맞은 때가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때를 놓치고 재수를 하면 그만큼 더 힘이 든다. 재수생은 자칭 성인이므로 유혹을 이겨야 하는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삼수를 하면 알고 있는 것 까먹지 않는데(현상 유지하는데) 드는 노력이 또한 아깝다. 몇 년 전에 건강을 위해 요로법(소변을 이용한 건강법)을 실행하였는데 아내의 반대가 심하여 33일 만에 그만 두었다. 건강유지 및 질병의 예방차원에서 해본 것인데 아무래도 아파서 절실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
헌혈이나 사후각막기증 서약이 너무 소극적이었던 것 같아 골수 기증을 하기 위해 혈액원에 문의했더니 40살 이상은 곤란하다고 했다. 설명인즉슨 지금 골수정보를 채취해도 조건이 맞는 수혜자를 찾기까지 평균 10년이 걸린다고 봤을 때 공여자의 나이가 너무 많아진다는 것이다. 달동네 사람들의 애환을 조금이라도 공감하기 위해 난곡동에 셋방살이 몇 개월이라도 하려고 찾았을 때 달동네는 이미 없었다. 알맞은 때를 놓친 것이다.
수행도 혈기왕성할 때 하는 것이 효과가 좋다. 나이가 들어서도 안 하는 것 보다야 낫겠지만 자세를 잡는 데도 힘이 드니 깨달음을 얻기는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처자식을 핑계로 수행과 참회를 자꾸 미루면 숙생(누적된 여러 전생)에 쌓아온 죄를 언제 다 멸하리. 춘원의 작품 ‘내 죄’에서처럼 입으로 지은 죄는 태산과 같거니와 마음으로 지은 죄는 끝 간 데가 없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미운 놈 혼내주고 예쁜 놈 안아주니 양심의 지옥은 죄인이 넘쳐날 것이다.
머리 속은 맑을수록 좋다. 추억도 탁함이다. 마음 공부하는 데는 감명 깊은 책도 방해가 된다. 평상심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열심히 수집하는 것도 좋아 보이진 않는다. 라이터가 보편화되기 전 밑천 안 들고 방문한 곳을 기념하기 좋은 성냥갑 수집이 한동안 유행했었다. 열심히 모으지만 나중엔 처치 곤란일 뿐이다. 껍질을 펴서 병풍으로 만든 것도 보았지만 고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비싸고 귀한 것도 같은 이치다. 애착 없이 수집할 수 있는가? 희소가치가 있는 것들은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했다는 긍정평가도 있지만 본인으로선 집착강화에 다름 아니다. 삶의 단순화를 외쳤던 법정스님처럼 꼭 필요한 것 몇 가지만 가지고 살고 싶다. 장식하는 것이 싫다. 평생에 한두 번 사용할까 말까한 것을 보관하는 수고는 스스로의 책임이다. 생각해보면 집안에 있는 것 중 반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이사 때마다 고생한다. 언제 무엇을 어느 정도까지 버려야하는지가 숙제다.
사람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종족보전의 강한 본능을 갖고 있지만 또한 인간이기에 본능을 무시하기도 한다. 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일까. 지금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이고 무엇을 성취했는가. 안중근 의사나 퇴계 선생, 이순신 장군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일은 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 유전자의 보전만이 지상의 목표인가. 나의 흔적이 핏줄을 통해서만 남아있는 것은 나를 더욱더 비참하게 하는 것 같다.
사람이 하루하루 산다는 것/어쩌면 최후의 날에 잠시/회고해 볼 추억거리를 열심히/만들고 있는 작업인지도 몰라/그렇더라도 살긴 살아야지/희로애락의 뒤안길에서/희비의 쌍곡선을 그리며/조그만 일에도 흥분하는/다혈질의 인간으로 말이야 (졸작 전문)
헐떡거리며 살아가다가 가끔 죽음을 생각해보면 의심할 바 없는 그 사실이 두렵기도 하다. 초연할 수는 있어도 초월할 수는 없으니까. 애정을 가졌던 모든 사람과 사물을 그대로 두고 떠나야 한다. 건장하고 빛나던 젊음도 주름에 물러나고 기력 또한 쇠잔해져 쓸쓸히 노후를 맞을 것이다. 거기다가 지독한 불효자식 만나면 더 빨리 떠나고 싶어질 지도 모른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싫고 또한 인간이 싫어서. 그렇더라도 내일의 종말 때문에 오늘의 사과나무를 포기할 수는 없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어딘가. 덧없는 육체는 끊임없이 편한 것만 좇아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니 졸린다. 잠이 영원한 안식이 아닐진대 잘수록 느는 잠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수행자로서 가장 시급히 극복해야 할 것은 잠과 음식이다. 많이 먹으면 피가 탁해지고 몸이 둔해질 뿐 아니라 곧 혼침(昏沈)에 떨어져 정도(正道)에서 멀어진다. 본능은 에고(ego)와 탐착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변명으로 적당치 않다. 그동안 무엇을 했나. 초발심(初發心) 때엔 각오가 대단하더니 이십 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많은 것이 퇴보한 느낌이다. 계행(戒行)의 그릇이 튼튼해야 선정(禪定)의 물을 담을 수 있고 선정의 물이 고요해야 지혜의 달이 뜰 수가 있는 것이거늘…….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다. 지금이 중대국면이다.
즉시현금 갱무시절(卽是現今 更無時節)-바로 지금이지 다시 시절은 없다.
첫댓글 자신의 수행..언제 이런 수필도 쓰시고..참 멋지세요...
꼼꼼히 새겨가며.. 읽고 공부 많이 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 마음에 와 닫는 훌륭한 글..
이재선부회장님
눈요기거리도 없는 이런 갑갑한 글을 올리면 어예니껴. 아무튼 항상 관심가져 주시는 배여사와 서지리님에게 감사합니다.
정말 훌륭한 글을 대했습니다. 혼자 읽기에 아가운 생각이 들어 저희 카페에 스크렙 해 갑니다.
오늘은 이 한편의 수필로 마음을 정리해 봐야겠습니다.
생각이 깊은 글을 창작하신 정경 이재선님, 그리고 글 올려주신 배영숙 여사님 감사합니다.
역시! 쵝오! 정경님을 뿌리 깊은 나무에 한표 동개 디립니다.
과분한 덕담에 감사드립니다. 매일매일 좋은 날 되소서.
뿌리 깊은 나무의 자손답게 기개가 느껴지는 글이지요?
이선생, 쓴 글을 모아 언제 출판기념회 준비할까.
글이 최소한 35편은 되어야 한 권을 묶을 수 있는데 이제 10여편이니 요원하네. 익평도 글 쓴것 제법 되니 부부가 합쳐서 한 권 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