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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레르몽 공의회 (Council of Clermont)
프랑스 중부의 도시 클레르몽에서는 1095년 11월 19에서 28일까지 대규모의 공의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때 참가한 중요한 성직자의 숫자만 3000명에 달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이 공의회가 지금까지 기억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 교황에 연설에 의해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한 십자군 운동의 시발점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클레르몽 공의회의 모습 - 실제로는 15세기의 그림이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11월 27일에는 교황이 직접 군중앞에 나서서 매우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이 끝날 때 쯤 군중들은 감격해서 "하나님 가게 해 주옵서소" "신의 뜻이시다" 를 외치며 너도 나도 앞으로 출진허가를 받고자 했다. 이어 각지의 군주들에게 사절을 파견하고 십자군은 옷에 십자군의 표지를 붙일 것과 십자군에 참가하면 죄를 사해주고, 참가자의 재산은 3년간 교회가 평화롭게 관리해주기로 하는 등이 결의 되었다. 그러면 이날 도대체 교황은 뭐라고 했을까?
이점에 있어서 믿을 수 없게도 그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적어도 6개의 연대기들이 존재하지만 실제 교황이 한 말을 그대로 적은 것이 아니라 공의회 이후에 쓰여진 것이고, 나름대로 관점에서 분석한 것이기 때문에 다소 신빙성에 의혹이 있다. 다만 이 기록들 가운데서 실제 이 장소에 있었던 게 확실한 연대기 작가인 풀처 (Fulcher of Chartress) 의 기록은 참고해 볼만 하다.
그 기록에 의하면 교황은 "아랍인과 투르크 인들에 의해 많은 이들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고.... 많은 교회와 제국의 땅이 파괴되었습니다." 라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기독교도들에게 "여러분의 형제와 친지들과 싸우기 전에 야만족들과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조그만 보수를 받고 용병이 되기 보다는 영원한 보상을 받고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의 육신과 영혼을 갉아먹는 대신 명예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한마디로 불과 얼마전까지 이단이라고 파문했던 동방의 크리스토교 형제를 도와 이교도들과 싸우자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기록의 문제는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지 탈환은 ? 일단 다른 연대기 작가의 기록에는 교황이 이교도에게 모욕당한 성지를 탈환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실 뒤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생각할 때 이러한 요구가 들어가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대기 기록의 문제는 서로간에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우르바노 2세가 십자군을 위한 매우 감동적인 연설을 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십자군의 주요 목표는 알렉시우스 1세의 생각과는 다른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이었다. 교황은 이 십자군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에게 죄를 사면해 주기로 했다. 이것은 사후의 신의 징벌을 매우 무서워 했던 중세시대에는 상당히 큰 보상 중 하나였다.
십자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엄숙한 맹세를 한 이후에야 십자군이 될 수 있었다. 만약 그 맹세를 깨는 날에는 파문을 비롯한 온갖 제재를 받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십자군에 참가하는 것만으로 모든 참회의 여정을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종교가 지배했던 중세 시대에는 여기에 참가하려는 사람의 숫자가 상당했다. 십자군에 참가한 사람은 옷에 십자가의 표식을 붙여 그 사실을 표시했다.
(십자군은 이렇게 옷에 십자가를 붙여 십자군임을 표시했다. 이 사람은 1차 십자군의 주요 지휘관인 고프드르와 드 부용이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한편 우르바노 2세는 감동적인 연설과 죄를 사면해주는 은전만으로는 서유럽의 주요 군주들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각 군주에게 연락을 취해서 이들 중 일부를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쉽게 움직일 수 없는 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군대를 모으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뿐더러 더 중요하게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의 영지를 빼앗기면 곤란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예방 조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전 준비가 전혀 필요없는 가난한 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군주들과 기사들 보다 더 빨리 십자군의 이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특히 중세 당시 흔했던 떠돌이 전도사들은 이 십자군의 이상을 퍼트리는데 누구보다도 더 빨랐다.
2. 은자 피에르 (Peter the Hermit)
이 은자 피에르란 인물은 적어도 서유럽에 십자군 열풍이 불기 시작한 1095년 이전에는 정확한 기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당대의 비잔티움의 공주이자 연대기 작가인 안나 콤네나 공주에 의하면 이 인물은 이전에 예루살렘으로 순례 여행을 갔으나 셀주크 투르크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매우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면 이런 개인 적인 경험이 민중 십자군이란 역사의 희비극의 원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예루살렘에 갔다는 기록도 있다)
1095년 11월의 클레르몽 공의회에 그가 있었는지의 여부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그가 클레르몽 공의회 이후 서유럽에 불어닥친 십자군 열풍에 혜성처럼 나타난 스타인 것 만은 분명하다. 특히 프랑스에서 그는 일약 민중의 영웅이었다.
(예루살렘을 가는 길을 십자군에게 가르켜주는 은자 피에르, 이 사실과 다른 기록화는 13세기의 창작이다. 은자 피에르는 그림에서와 같이 당나귀를 타고 나녔다고 한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그는 정말 빨리도 거대한 민중을 끌어모았다. 앞서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당시 서유럽에는 가난한 농민들과 유랑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하고 별 교육도 받은 적 없는 어리숙한 이들을 끌어모으는 것은 간단했다. 특히 이들은 떠돌이 수도승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천국이 보장되는 것 처럼 이야기 했기 때문에 이들의 십자군인 민중 십자군에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는 천상의 예루살렘과 지상의 예루살렘을 혼동하여 여기에만 가면 천국이 기다리는 줄 알았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민중 십자군 (People's Crusade) 는 군중 십자군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일단 여기서는 민중 십자군이라고 번역하겠다. 이들을 이끈 것은 천국을 보장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가자' 는 떠돌이 수도승들이었다. 이들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이들이 모두 은자 피에르의 지도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 민중 십자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인물은 은자 피에르였다.
(은자 피에르를 그린 19세기의 삽화 This file has been released into the public domain by the copyright holder, its copyright has expired, or it is ineligible for copyright. This applies worldwide. )
당시 고통받던 사람들은 은자 피에르를 마치 신의 사자로 여겼다. 심지어 그를 성인의 반열로 생각하기 까지 했는데, 그의 옷깃을 잡기만 해도 병이 낮는다고 믿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의 주위로 주로는 가난한 민중들이 구름처럼 모였지만 훗날 그를 따라 민중 십자군에 참가한 인물들 가운데는 소수의 귀족과 기사들도 있기는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은자 피에르가 민중 십자군을 조직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진다. 앞서 그는 예루살렘에 가려다가 좌절되었다는 기록을 이야기 했지만 다른 기록에는 그가 이전에 예루살렘에 도달했으며 성묘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십자군을 이끌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십자군 운동 후 몇 세대 후인 티레의 윌리엄 (William of Tyre) 의 기록이다. 당대의 기록을 보더라도 그는 그리스도로 부터 편지 내지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 것 같은데, 그래서 피에르의 추종자들은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아니라 은자 피에르가 십자군의 창시자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지금과는 달리 당대에 은자 피에르는 서유럽에서는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중세시대에는 그가 십자군 운동의 창시자로 생각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후 그가 민중 십자군에서 했던 행동을 종합해볼 때, 그리고 민중 십자군 자체의 행동을 종합해 볼 때 이와 같은 평가는 무리가 있다고 하겠다. 왜 그런지는 앞으로 설명할 것이다.
3. 민중 십자군의 출발
이 민중 십자군은 앞서 설명한 은자 피에르 같은 떠돌이 수도승들에 고무된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의 집합체였다. 현실 사회에서 고통 받는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는 천국을 묘사하는 떠돌이 수도승들의 열정적인 연설에 쉽게 넘어갔다. 이들은 가난한 농민들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농민 십자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1096년 4월에 되자 프랑스에서 플란더스를 거쳐 독일의 퀼른에 도달한 은자 피에르는 그를 따르는 민중 십자군이 4만명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십자군으로 부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전투 병력이 아니었다. 여자와 아이들, 노인들을 대거 포함하고 있었고, 비록 소수의 기사들도 동참하긴 했지만 제대로 무장된 병력은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을 이끄는 것은 전투 경력이 전혀 없는 은자 피에르였다. 그러니 이들은 군대라도 부르기에도 문제가 있는 집단이었다. 부랑민들의 모임이라는게 좀 더 사실에 가까웠다.
(민중 십자군을 묘사한 그림 - 이들이 공격당하는 그림이다 :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하지만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였으니 성지를 향해서 가기는 해야 했다. 이들은 동쪽을 항해서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교황이 십자군의 출발 시점을 1096년 8월 15일로 잡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통제가 어려운 많은 군중들이 모여 있었고, 이들을 먹일 식량 또한 부족했으며,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이들의 종교적 열정 때문에 그때까지 기다리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들은 4개월 빨리 출발했다.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이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들을 대수롭지않게 여겼거나 혹은 불편하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들은 교회의 지시도 받지 않았고, 교황도 이들을 자신의 통제아래 두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실제 십자군과는 달리 이들에게는 아무도 파견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현실주의자인 교황은 잘 조직된 군대를 희망했지, 부랑자들의 모임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잘 조직된 군대가 모일려면 시간이 필요했고, 우르바노 2세는 이 시간 동안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아무튼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은 몇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서 출발했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성묘 교회였다.
이들의 목표인 성묘 교회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에 대해서는 다소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이 유서 깊은 교회는 예루살렘에 위치해 있는데 당시는 물론 지금도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 중의 하나이다. 사실 필자보다는 신앙심 깊은 교인들께서 더 잘 아실지 모르겠지만 이 교회는 그 중요성에 있어 중세의 다른 교회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묘 교회 입구 :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 David Shankbone)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신 골고다 언덕으로 생각되는 곳에 위치해있다. 교회 내부에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예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곳이라고 생각되는 장소가 포함되어 있다. 아래에 있는 교회의 단면도를 참조하자.
(성묘 교회의 단면도 :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 Yupi666 (talk), originally as Image:Goglgotha.svg at en.wikipedia )
(성묘 교회내의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 : CCL 에 따라 복사 : (Tomb of Jesus in 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Taken with Nikon D100, Jerusalem 03/2005 by Wayne McLean (jgritz) {{cc-by-2.0})
이 중요한 교회는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 있으며, 336년 건립된 유서깊은 교회이다. 이 교회는 2차례 파괴되었다가 다시 세워진 역사가 있으며 2번째 파괴는 1009년 칼리프 알 하킴 빈 아므르 알라 에 의한 것이었다. 사실 이슬람 제국내의 기독교도와 무슬림은 큰 충돌 없이 지내오긴 했지만 예외적인 경우는 있었다. 이 성묘교회의 파괴가 바로 그런 예외였다.
하지만 결국 파괴된지 얼마 안되어 이슬람 세력과 비잔티움 제국간의 협약이 맺어져 재건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될 당시에는 어느 정도 복원된 상태였고, 그래서 민중 십자군들이 이를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일설에 의하면 은자 피에르가 여기서 십자군의 계시를 그리스도로 부터 받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사실 이런 중요한 교회가 이슬람 세력권에서 재건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성지에서 기독교가 탄압을 받고 있지 않다는 중요한 반증이기도 했다. 성묘 교회가 파괴 될 때면 모르지만 십자군 원정때는 재건이 이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