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사슴
채호기
새벽 숲에서 검은 사슴과 마주쳤을 때
검은 사슴은 몸을 정면으로 돌려
몇 그루 나무의 검은 수피를 지나,
떨리는 가지와 잎을 지나,
똑바로 인간의 눈을 응시했다.
그 짧은 시간
꾹 다문 입 위 촉촉한 검은 코와 콧김.
유선형의 얼굴 양쪽에 큰 나뭇잎처럼 펼쳐져
잎맥이 도드라진 실핏줄 선명한 두 귀. 이마 위
활활 타오르는 불의 기세를 꺾어다 붙인 빛나는 두 뿔.
무엇보다 바닥모를 깊은 수심의 검은 눈동자가
인간의 두 발을 꼼짝 못하게 멈춤 속에 붙잡아 두었다.
주위의 모든 나무들이 그를 옹립하며 수직으로 서 있었다.
검거나 회색인 나무줄기에 번져가는 녹색 잎들의 부드러움이
그의 마음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렌즈가 나뭇가지들을 헤집을 때
쓰러져 있던 한 나무가 일어서듯
갑자기 또 다른 사슴이 일어섰고
둘은 화들짝 산 아래로 사라졌다.
(해칠까 무서워 도망간 거라고?
그건 인간의 터무니없는 상상)
검은 사슴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
새벽의 영역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겠다.
저녁에 다시 인간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걸
허락하겠다.
—《포엠포엠》2014년 여름호
생기 있게, 하지만 너무 빠르지 않게
술책으로 늘어선 가구들, 느닷없는 이미지 삽입.
네가 알고 지내야 할 여자가 있지.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에서 풍기는 강한 향기에
스스로 사로잡혀 있는 여자.
정절과 고귀함과 부드러움의 자세.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가 그치기 전에
미소 짓는 여자를 풀어헤치고 싶은 내장의 충동.
당신 속에 어떤 구체적인 것이 있나요?
개의 주둥이처럼 뻔뻔하게 아무것이나
건드리는 탐색하는 듯한 말투.
남자관계는?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안다는 걸 과시하는
깔보는 듯한 불쾌한 시선에도
다소 과장된 주의 깊고 온화한 예절은
남편에게서 배운 것이겠지.
그들은 서로의 눈을 깊이 바라보았다. 언젠가 본 적 있지?
검은 눈이 계단 위로 어지럽게 날렸다.
희미한 흥분이 차가운 대리석에 스며들었다.
비록 현관에서 한 발짝도 들이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남자가 그녀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온 흙 묻은 발자국을 그녀는 몰랐다. 언젠가 본 적 있지?
익숙한 정신병원의 현관이 떠올랐다.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의 말이 부인의 환상 속에 어떤 격정을 일으켰는지
모르겠다. 술책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새벽이 있다.
—《문학들》2014년 여름호
--------------
채호기 / 1957년 대구 출생. 1988년《창작과비평》여름호로 등단. 시집『지독한 사랑』『슬픈 게이』『밤의 공중전화』『수련』『손가락이 뜨겁다』『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