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백수선생님 댁에 다녀왔습니다.
9월 28일 10시, 이무식, 최상호, 황정희, 김순희 네 명이 김천으로
백수선생님을 만나 뵈러 떠났습니다. 한 번 놀러 오라는 당부 말씀도 계셨고
이사도 하셨기 때문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직지사 입구에서 산채정식을 맛있게 먹고 시비공원을 둘러 본 후
이사하신 부곡동 우방아파트 102동107호로 갔습니다. 자택과 찻집
자명紫明에서 네 시간 여 이어진 선생님의 말씀을 정리해 봅니다.
시를 쓰는 수칙 몇 가지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1. 정형을 지켜라 : 하되 고루하지 말고 너그러워라.
(한 구를 9자까지 허용하라고 지난번에 말씀하셨음.)
2. 가락을 잡아라 : 자수율字數律 뿐만 아니라, 음수율音數律도 중요하다는
말씀이겠죠.
3. 언어의 심도深度를 높여라 : 이미지를 심화시켜라.
- 예를 이렇게 들었습니다.
설악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산이고
지리산은 깊은 골에 들어 높은 영마루를 눈감고 생각하는 산이다.
4. 경지를 열어라 : 답답해선 안 된다. 특히 종장 처리가 시조의 핵심이다.
⃞ 예로 드신 자작시
희방사
소백산 연화봉 밑에 연적硯滴만한 절이 있어
먹물 옷 입은 스님이 맷 새처럼 숨어 살더라
먼발치 흘려 논 계곡물 촛불처럼 밝혀들고
코스모스 연가
흔들리고 싶어서 바람 앞에 섰습니다
그리움이 하도 높아 모둠발로 섰습니다
너 하나 너 하나 때문에 단엽單葉으로 왔습니다
(30대 때 지으신 연시라고 하셨습니다. 너 하나가 거듭된 것은 강조의 의미이며, 여기선 무리가 되지 않는다.)
세월의 하중荷重
봄이면 봄이라서 가을이면 가을이라서
꽃 피고 잎 지는 것인데 그게 무슨 대수라서
지축이 흔들리는가 내가 휘청거리는가
(스포츠는 감격이지만, 시는 감동이다.)
부목負木의 노래
아흔에 다시 세 구비, 구비 돌아 삼천리길
지칠 대로 지친 부목 짚신감발 다 닳았네
쌀 씻고 땔나무하고 구름 빨아 또 널고
(절에서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며 수련하는 불목한 이를 뜻하지 만,
역사를 짊어지고 가는 거인의 의미도 있다하시며 당신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신 반면, 당신의 뒤를 이을 사람이 없음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소
사람은 말하고 너스레를 부리지만
소는 꿈벅꿈벅 눈으로 말을 흘립니다
흘린 말 도로 주워서 새김질도 합니다
(쉽게 쓰되 생각을 하게 쓰라. 똑 같은 재료로 만든 음식도 숙수熟手의 손맛에
따라 맛의 차이가 난다.)
운문사
구름으로 지은 문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구름으로 지은 문 속에 사는 절이 어디 있는가
거짓말 엄청난 거짓말 엄청나서 쇠북이 운다
(수많은 시인들이 운문사에 대한 시를 썼지만 이 시를 뛰어넘는 작품은 없다.)
북대암(운문사에 있는 암자)
하늘 기대 사는 바위 바위 기대 사는 암자
어제는 청도 운문사 북대암을 다녀와서
오늘은 나도 북대암 하늘 기대앉았네라
(사람은 앞모습 보다 뒷모습이 좋아야 한다. 뒷모습이 좋다는 것은 한 번
만났는 데 평생 잊히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평생 잊히지 않는 사람으로 대전의 박용래 시인(자유시)을 들며
그의 작품을 외우셨습니다.
눌 더러 물어볼까 나는 슬프냐
장 닭 꼬리 날리는 하얀 바람에
내 고향 부여는 70리라네
눌 더러 물어볼까 나는 슬프냐
또 한 분, 전의홍이라는 분의 40년 전의 작품을 외우셨습니다.
꽃
차라리 오늘을 위한 오랜 세월이었다
차마 눈물일 수 없는 영역 이 영역에
아 꽃은 죽음보다 먼 곳에서 되살아온 불사조
몸과 마음은 다만 송이로 바쳐
미소로 날려보는 화려한 나날의 사랑
임 앞에 올리는 향연처럼 꽃은 피어 있는가
별이 몸을 잠구던 밤 이슬 젖은 그 보람도
펴나는 자리마다 하늘은 더 넓은데
(종장은 빼어난 작품을 마무리하는데 부족하여 매우 안타까웠다며
외우지 않으셨습니다.)
나무는
나무는 이 세상에서 제일 푸른 집 짓고 살고
나무는 이 세상에서 제일 푸른 옷 입고 살고
나무는 이 세상에서 제일 푸른 창 열고 삽니다
(여기서 제목을 ‘나무’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너무 오래 사셨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셨습니다.
99세를 구질九帙이라 하는데, 구질구질하다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고 하셨습니다.)
늦잠자리 있는 풍경
아득히 푸른 하늘을 나래 위에 불사르고
늦잠자리 한 마리가 꽃대 물고 졸고 있다
가을은 막막한 바다 저 꽃대는 외로운 섬
적막은 어디나 둥글어
우러르면 해와 달은 덩그렇게 높은 궁궐
굽어보면 인간살이는 조그마한 오막살이
적막은 어디나 둥글어 풀끝에도 이슬 답니다
정격을 지키시는 분인데 절장시조는 몇 수 쓰셨다면서 소개해 주셨습니다.
절장시조란 종장終章만 있는 시조인데 절장시조는 제목을 뒤에 단다고 일러 주셨습니다.
검둥개 짖지 마라 밤도 이미 오밤중
- 독거노인
소쩍새 너 울지 마라 나도 울고 싶은데
- 독거노인
세월아 너 가지마라 네월이가 운단다
- 세월이 네월이
어머님 하늘
언제나 고향산천엔 진땀이 흘러내립니다
소쩍새 울음소리엔 들깨냄새가 들려오고요
어머님 당신 하늘엔 콩 꽃 같은 별이 뜹니다
감나무 속잎 피는 날
빗발도 스쳐가고 바람결도 잠이 들고
추녀 끝 풍경소리도 엿듣고만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집 감나무 속 잎 피는 날입니다
끝 모를 시조사랑의 말씀이 이어졌지만 돌아오는 길이 멀어
오후 다섯 시에 작별인사를 드리고 떠나오면서 좀 더 가까이 계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곧 영주에 한 번 오시겠다고 하시면서,
가면 만당의 콩나물국밥 사주려는가 물으셨습니다. 그렇게 맛있게 드셨다면서...
예로 든 작품은 선생님이 구술하시는 것을 받아 적었기 때문에 원문과 다소 차이날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먼 길에 운전하느라 수고하신 작은 섬, 수고 많았습니다.
첫댓글 잘 다녀오셨습니다. 자세한 정리도 감사합니다. 10월 3일날 문학기행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