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캐나다로 출장을 가는 비행기 속에서 울고 있습니다. 은별이에 관한 기사를 보고 은별이 어머니가 50년 전 내 어머니가 터뜨렸던 울음을 흘리고 있을 것 같아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저는 국희의원으로 출마하면서 2011년 출판기념회를 했습니다. 책의 제목은 <어머니, 기쁘시죠?>입니다. 제 어머니는 돌아가신지 20년이 지났습니다. 제 아들은 특정 정당을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정치하겠다고 그 정당의 당협위원장을 맡게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갖게 된 반감이었습니다. 아들은 거세게 나를 몰아 붙였습니다. 그러다가 취업준비를 하다 보니 안타까웠는지 나를 만나자 했습니다. 그의 질문은 간단했습니다. “아빠, 어떻게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어요?” 아들의 이 말에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평소에 갖고 있던 ‘정직, 성실’을 말하면 아들은 저를 ‘보수꼴통’이라 할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꺼낸 말이 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말에 아들도 울었습니다. 피는 물보다 강했던 것 같습니다. 마침 출판준비를 하고 있는 터라 출판사 사장께 그 정황을 말했더니, 그는 불현듯 책 제목을 <어머니, 기쁘시죠?>로 하자고 했습니다. 은별이 어머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세요. 자기가 교사이면서도 그 딸이 다른 교사로부터 왼손잡이라고 매 맞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습니까? 애가 뇌성마비라 내놓고 말도 못하다가 그 담임교사에게 편지를 쓰시면서 얼마나 우셨습니까? 그래서 체벌은 없어졌으나, 딸의 친구들이 뇌성마비 걸음을 ‘거북이’라고 놀릴 때 가슴이 얼마나 찢어지셨을까요? 아, 그 마음을 저는 압니다. 제 어머니도 50년 전 그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남편 죽고 큰 아들이 요절한 후 작은 아들 군대 영장이 나왔을 때 제 어머니의 아픔이 그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아픈 마음을 미국에 사는 친정의 자매에게 전화로 상의하시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장애인에게 차별이 없는 미국 땅으로 그 딸을 보내라는 그 이모의 심정이야 어떠했겠으며, 궁리 끝에 딸을 미국으로 데리고 갈 때 비행기 속에서 얼마나 우셨겠습니까? 조국 대한민국을 얼마나 원망했겠습니까? 이제 은별이가 그 어렵다는 뉴욕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대학 장학생' 10명중 한 명이 돼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싸우는 변호사가 되겠다”고 하니 눈물이 쏟아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행정고시를 합격했을 때 제 어머니가 흘리셨던 눈물이 그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46살에 낳은 아들인데 5살도 안되어 남편이 죽고 또 큰 아들이 죽는 아픔을 안고 키운 아들인데, “행정고시에 합격하였다니”라며 눈시울을 붉히셨습니다. 저에게도 꿈이 있었습니다. 절대 제 어머니와 같은 눈물을 흘리는 나라가 아니라 어머니들에게 기쁨을 주는 공직자가 되겠다고 말입니다. 당진시의 어머니들께 임기가 끝날 때 자신 있게 “어머니들, 기쁘시죠?”라고 말하겠다는 각오로 의정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큰형님께서 유복녀를 남기시고 떠나셨습니다. 그 조카딸의 딸, 저에게는 조카손녀입니다. 그 아이가 최근 장애인 관련 연극을 하는 사회적 기업의 대표가 되어 직접 배우로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 갔었습니다. 그러나 그 연극을 보고 나오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직장 잡아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돌아왔고 전화로 조카딸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조카손녀는 은별이가 말했듯이 “한국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저도 한국사회의 장애인 편견을 없애려는 은별이와 조카손녀에게 힘을 보태겠습니다. 은별이가 한국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함께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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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제나 초심을 잃지않고 살아가는 자신이 되겠다 생각해봅니다.은별이 홧팅!
모두가 평등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터이지만,
그렇게 요원한 일은 아닐거라는 희망을 갖습니다.
양지와 음지는 항상 존재하지요...양지보다는 음지를 늘 배려하는 마음이
이 사회를 훈훈하게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