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러니(Robert Lunney). 그는 한국전쟁 때 22살로서 상선 빅토리호의 승무원이었다. 일반 뱃사람이 아니라 선박회사에서 파견된 직원이었다. 그 배의 선장은 라루(Leonard LaRue)라는 분이었다. 러니씨는 후에 코넬대 법대를 나와 현재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초신휴를 통해서였다. 소설을 쓰다보니 흥남철수 때 동원된 선박에 관한 자료가 필요해 초신휴에 의뢰를 해 1년 여 만에 배의 승무원이던 그를 찾아낸 것이다.
상선 메레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는 로버트 러니가 타고 있던 상선의 이름이다. 그 배는 2천 명을 실을 수 있는 배에 한국 피난민 1만 4천 명을 태우고 최후로 흥남부두를 빠져나온 배였다.
마침 그 배는 군사해양수송법에 의해 흥남에 있는 미군 취약지에 보급품을 운송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 배의 지하층에 비행기 연료로 쓸 3백 톤의 지극히 불붙기 쉬운 제트연료을 실은 상태였다. 그러나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에서 그것을 따질 겨를도 없었다. 당황한 피난민들은 그 배로 사정없이 모여들었고 뒤에는 중공군의 총탄이 쏟아지고 있었다.
"발리 발리(빨리 빨리).”
러니씨 등 미국인 선원들은 서툰 한국말로 피난민들을 독촉했다.
한 때 단체에 끼어 외국관광을 하며 한국사람들이 성질이 급해 '빨리빨리'란 말을 많이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저 경제성장을 급속히 하다보니 생긴 말이려니 했다. 그런데 그 '빨리빨리'가 벌써 50년 전에 흥남부두에서 쓰이고 있었다니!
그 배는 하늘이 도움으로 위험천만의 지뢰밭을 건너 300톤의 제트오일이 터지지도 않은 채 거제도로 가서 무사히 피난민들을 내려 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었는지, 지뢰밭을 호위도 없이 무사히 빠져 나왔는지 지금도 믿어지지 않아요.”
뉴욕의 러니씨 집을 방문했을 때 그가 말했다
러니씨는 뉴욕의 일류 변호사였다. 부인 역시 맨하탄의 존경받는 교육감이었다. 미국인에게도 부러움의 대상인 두 부부. 전형적인 뉴요커같아 보이는 그들 집에는 50여 년 전 흥남철수 당시의 사진 등 한국의 흥남철수에 관한 모든 것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그들이 사는 부호촌(케네디 대통령 일가가 살던 집이 있는 동네)의 호화스런 거실에서 나는 밤새도록 러니씨의 흥남철수에 관한 열 띤 ‘브리핑’을 들을 수 있었다. 요리사가 대기하고 있었고 정원의 몇 백 년이나 된 고목 아래에는 포도주도 준비되어 있었다.
"거제도로 향하는 동안 그 배에서 아기가 태어 났어요. 정말 난감했습니다. 다행히 한국 여인들이 서로 도와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한국말을 몰라 그냥, ‘김치 1’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이어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거제도에 도착했을 때 사흘 동안 모두 아이 5명이 태어나 ‘김치 5’까지 생겼지요. 한 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그는 한국사람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어 보였다. 단지 97년, 미국 유해발굴단의 참관인 자격으로 두 번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했다.
러니씨는 당시 장진호에서 흥남으로 내려온 미국과 유엔군들의 상황을 그가 탔던 빅토리호에서 상세히 볼 수 있었다.
"배는 해안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닻을 내리고 있었고 나는 쌍안경으로 흥남항을 지켜볼 수 있었지요. 군함 미조리호에서 부두를 향해 마지막 함포사격을 하고 있었고, 불꽃이 장관을 이루었는데 사람들은 그 위력에 슬픔마져 잊고 있었지요. 미군이 피난민을 태우기 위해 포기한 온갖 병기와 군용물자가 폭발하는 가운데 흥남부두는 핏빛으로 물들어 갔지요...”
그는 그 일주일을 하루하루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일지를 써서 보관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알아보니 그 배는 오래 전에 중국에 고철로 팔렸다고 해요.”
러니씨는 거실에서 브리핑을 할 때 내게 말했었다. 역사의 아니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한 때 중공군과 대치하며 미군을 돕던 배가 후에 중국에 고철로 팔리다니.
한국전쟁 때 가장 치욕적이고 잔인했던 '장진호 전투'(1950년 11-12월).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인간애의 꽃은 피어난다. 미해병 제1사단이 주축을 이루었던 장진호에서 퇴각한 미군과 유엔군은 한국인 피난민 10 만 명을 군함에 싣고 함께 내려온 것이다.
"사람들이 흥남부두에 많이 모여 있었고, 그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어요. 그래 구조한 것입니다.”
로버트 러니씨는 그 때 그 배의 선원들이 자신들이 입던 옷과 담뇨 등을 다 피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젊은 시절 1944년, 저는 해군수병으로 사이판 전투에 참전했었어요. 그 때 수 백명의 한국 민간인 징용자들을 한국에 되돌려 보내는 일을 맡았지요. 북한쪽이 고향인 한국사람들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노예처럼 혹사당하고 있었어요. 그래 그들을 북한쪽으로 보내주었습니다. 그들이 도움이 필요해 보였기 때문이죠.”
그는 회상했다.
한편, 당시 한국 피난민 만 사천명을 구조한 메레데스 빅토리호의 선장이던 라루씨는 그 후 신부님이 되었다고 한다. 본래 신앙심이 깊던 라루씨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본국으로 돌아가 신부로서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이름은 해양인을 상징하는 마리누스(Marinus). 마리누스 신부님은 러니씨와 같은 미국의 뉴욕 근처에 쌩뽈 수도원에서 수도를 하셨다.
"그런데, 마리누스 신부님은 내가 수도원에 찾아가서 '흥남철수' 당시 선장님의 활약상황을 다른 한국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하면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어요.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했는데 뭘 그러나?'"하구요.
몇 번 찾아갔지만 러니씨는 오히려 핀잔만 받고 돌아왔다고 한다. 나중에는 알은 채도 하시지 않아 서운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상선 메레데스 빅토리호의 흥남철수는 잊혀지고 말았다.
"마리누스 신부님은 신부가 된 후 일생 그 수도원 밖을 나오지 않으셨어요. 평생을 기도와 묵상으로 보냈습니다.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아주 높은 정신적 경지에서 사셨던 분 같습니다."
메레데스 빅토리호의 선장이던 마리누스 신부님이 수도하시던 수도원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길러 시장에 내다 팔아 유지하던 오래된 수도원이었다. 건물은 우아하고 500여 에이커의 농장이 있어 그림같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장소도 미국의 노른자위인 셈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신부의 길을 택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어서 그 숫자가 자꾸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80명 정도의 수도자로 시작한 수도원이 점점 그 수가 줄어들었다. 많은 수도자들이 사회의 부름을 받고, 또 결혼하여 그 곳을 떠났다고 한다. 그래 2000년에는 85세 이상 고령이 삼분의 일을 차지하는 10여 명 만이 수도원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마리누스 신부님의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의 일이다. 러니씨에게서 한 장의 편지가 날아왔다.
"전 작가님, 그런데 그만 그 쌩뽈 수도원이 곧 문을 닫게 되었어요.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들이 모두 고령이라 더 이상 크리스마스 트리를 기를 수가 없게 되었대요. 또, 요샌 플라스틱 제품에 밀려 크리스마스 트리가 잘 안 팔린데요. 그래 고령의 수도사들이 짐을 싸서 각자 다른 수도원으로 가던가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는 이야기예요.”
참으로 서글픈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어찌할 수도 없어 가슴만 태우고 말았다.
그런 절망적 상황에서 2001년 10월 14일, 마리누스 신부님이 눈을 감으셨다. 뉴욕 타임즈에는 '한국전쟁 때 흥남부두에서 피난민 14,000 명을 거제도로 싣고 간 메레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이었던 마리누스 신부님이 92세로...'라는 내용의 짧막한 기사가 실렸다.
그 후, 다시 한 장의 편지가 러니씨에게서 날아왔다.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 드릴께요. 뉴욕 타임즈 2004년 1월 11일자에 난 기사입니다. 내용인즉, 한국 왜관의 한국 신부님들이 라루 선장이 1950년에 흥남에서 실천하신 인간애적인 구조를 기억하여 쌩뽈 수도원을 인수하여 부활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폐쇄되었던 수도원에는 일요미사가 다시 시작되었고 정원에는 한국인의 손으로 무, 배추 토마토가 심겨졌다. 그리고 식당에는 치즈버거와 스프 그리고 한국의 김치가 제공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비가 새는 수도원 천정도 고쳤고 그 곳의 느린 다이얼식 인터넷도 하이 스피드 DSL로 바꾸었다고 한다.
또, 뉴욕과 미국 동부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구조의 손길을 뻗쳐왔다.
그들은 마리누스 신부님이 한국인들에게 도움을 주셨는데 우리도 무언가 해드려야 하지 않겠느냐며 여러 가지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멀리서 듣기만 해도 흐믓한 이야기였다.
또 상상치도 않은 곳에서 계속 도움의 손길이 왔다. 러니씨의 도움으로 이 메레데스 빅토리호에 관한 책 ‘기적의 배’를 썼던 워싱턴 포스트 기자 빌 길버트가 책을 2천 권을 기증했다. 그리고 한 미국의 기록영화 제작자가 이 이야기를 기록영화로 만들 것을 제의해 왔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홈페이지도 생겼다:'www.meredith victory.com', 'www.shipofmiracles.com'
"50년 전에 마리누스 신부님이 한국인들을 도왔고 이제는 한국인들이 이 수도원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도원은 바닥까지 내려갔었어요. 그러나 이제 소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라고 뉴욕 타임즈 기사는 전한다.
나는 이따금 생각한다.
그 수도원 깊숙한 곳에서 마리누스 신부님은 평생 무엇을 기도하고 계셨을까? 혹시 그의 기도목록 중 제1번은 ‘통일’이 아니었을까, 하고.
좋은 이야기입니다. 사람사는 이야기 같군요.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휴머니즘이 살아있고 그 휴머니즘의 주인공들이 좋은 삶을 사는것을 보니 보기도 좋습니다. 일전에 흥남부두 기록 영상물을 본적이 있는데, 정말 시각을 다투는 긴박한 상황이었어요. 모두 죽는냐 사느냐 하는... 고마운 분들께 진정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첫댓글 6.25에 참전했던 미군들과 그 주변의 이야기들을 수필로 쓴 영문소설가 전경애님의 감동적인 글입니다. 민족의 비극이 일어났던 날을 앞두고, 앞으로 몇개의 작품을 삽질해 올리겠습니다.
생각을 하면서 정독을 해야할 글이네요..(제머리가 나뻐서요^^) 인터넷세상이 되어서리 독서를 멀리하고 사는데 이렇게 게시판에 좋은 글을 올려주시니 인터넷 독서를 대신할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일반 소설과는 달리 역사성이 있어 좋습니다...모르고 있던 일들을 배울 수 있고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글입니다..
좋은 이야기입니다. 사람사는 이야기 같군요.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휴머니즘이 살아있고 그 휴머니즘의 주인공들이 좋은 삶을 사는것을 보니 보기도 좋습니다. 일전에 흥남부두 기록 영상물을 본적이 있는데, 정말 시각을 다투는 긴박한 상황이었어요. 모두 죽는냐 사느냐 하는... 고마운 분들께 진정 감사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