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의 지퍼를 열고 (외 2편)
정대구
하늘 밖인가 하늘 안인가
바다 밖인가 바다 안인가
달아나는 바다와 하늘이 맞물린 지퍼
누가 열어 보았나
열고 나가 보았나 들어가 보았나 하 궁금해
배도 띄워보고 구름도 띄워보고
물고기들과 갈매기들을 풀어놓아 보지만
개벽 이후 아직도 열리지 않아
화끈 달은 그녀와 나
물오른 입맞춤으로 부드러운 혓바닥으로
처음으로 수평선을 열고 들락날락
바다와
하늘을 오르락내리락
나는 밥통, 나는 약주머니
나는 밥통이다 하루 세 그릇☓365, 거기에 다시 곱하기 내 나이를 먹은, 한 끼도 거를 수 없는, 거르면 큰일 나는, 나는 걸어 다니는 멍텅구리밥통
나는 약주머니다 어려서부터 병약한, 지금도 각기 다른 알약을 몇 병씩이나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복용하는, 딸랑딸랑 소리 나는, 나는 약주머니
밥과 약, 이밖에 또 무엇을 구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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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보의 율시 「강촌」에서 ; 多病所須唯藥物 微軀此外更何求
나를 찾습니다
TV 안에 있는 건지 TV 밖에 있는 건지
드라마 속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내가 나인지
나는 없고
드라마 속 주인공이 나인지
속으론 타면서 그녀 앞에 얼어붙는 나
불인지 얼음인지
불과 얼음이 만나 물이 되어버리는 나
갑돌이도 아니면서 그런 척 안 그런 척하는 나
어느 것이 나인지
매번 뭔가에 정신이 팔려
넋 놓고 먼 산 바라볼 때
나는 어디 있는지
나는 없고 먼 산만 있는 건지
그녀만 있는 건지
물밑 속에라도 숨어 있다가
아무도 모르게 불쑥불쑥 나타나는 나는 또 누구
지금 그렇게 저렇게 생각하는
그 나가 나인지 저 나가 나인지
그도 저도 까먹는 이 나가 나인지
—시집『너가 바로 나로구나』(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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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구 / 1936년 경기 출생. 숭실대 문학박사. 1972년〈대한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나의 친구 우철동씨』『무지리 사람들』『양산일기』등 다수, 수필집『녹색평화』『구선생의 평화주의』, 저서『김삿갓 연구』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