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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 지리산의 암자를 찾아 (1) / 지리의 관문 오도재
함양 지안재 (咸陽 蹄閑峙)
산이 높으니 국지성 호우로 많은 피해를 보는 곳도 지리산이다.
오늘도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지만 오후부터는 하늘이 갤 것이란 예보다.
함양읍에서 지리산 쪽을 향하여 24번 국도를 따라 좌회전하면 만나는 길이 1023번 지방도다.
지리산의 품안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대부분 이곳에서 마천까지의 고개 전체를 오도재라 부르지만, 함양사람들은 이 길을 지안재라 부른다.
몇 년전에 모 타이어광고에 등장한 배우 전도연이 스타로 부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길이다.
또한, 당시의 건설교통부(지금의 국토해양부)에서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힌 길이기도 하다.
속리산의 말티고개가 연상되는 이 길을 드라이브하는 맛은 마치 물 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의 지느러미를
움직이듯 S라인의 유연함을 만끽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지리산 제1문
지리산과 마주한 삼봉산(1187m) 중턱 함양읍에서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마을 위쪽 고개가 오도재·(悟道峙)다.
고개를 올라서면 지리산 천왕봉(1915m)에서 서쪽 반야봉까지 27km에 걸쳐 뻗어가는 지리대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오도재(773m)는 삼봉산 주능선 상에 있는 높은 고개이다.
지금은 도로 사정이 좋아져 함양읍 쪽에서 ‘지안재(·蹄閑峙)’를 경유하여 이 고개를 넘으면 지리산으로 들어가
는 길목인 인월을 거치지 않고도 바로 지리산 북쪽 기슭 마천에 닿는다.
오도재정상에 세워진 지리산 제1문은 2005년에 착공하여 2006년 11월에 준공된 팔작지붕 형태의 건물이다.
성곽길이 38.7m, 높이 8m, 폭 7.7m, 문루는 그 면적이 81㎡에 이르는 웅장한 자태다.
관문주변에는 지리산을 조망하는 전망대와 휴게소,이곳 함양출신은 물론 지리산을 찾은 시인묵객들의 시비
(詩碑)와 장승들이 열지어 있다.
청매선사(靑梅禪師) 시비(詩碑)
조선시대에 지리산 삼정봉 기슭 영원사(靈源寺)에 주석하였던 청매선사(靑梅禪師. 1548~1623)의 시다.
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1158~1210) 지눌이 이 고개를 넘다가 도(道)를 깨닫고, 지리산 삼정봉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견성(見性)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청매선사도 이 고개를 넘다가 도를 깨달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고개 이름도 오도재(悟道峙)다.
청매선사의 시비(詩碑)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알만한 대목이다.
청매선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장으로 승군을 이끌고 왜병에 3년간 맞서 싸웠으며, 이런 전쟁의 고통
속에서 도탄에 빠진 민중과 세상을 어떻게 구하느냐는 고심에 빠졌고 이후 크게 발심하여 깊은 수행 속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몇 번을 읽어도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청매선사의 유명한 오도송 12각시(十二覺時)다.
12각이란 한시(漢詩)에 쓰인 "깨달을 각(覺)"이 12자(字)인 것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十二覺時(12각시)
覺非覺非覺 (각비각비각)
覺無覺覺覺 (각무각각각)
覺覺非覺覺 (각각비각각)
豈獨名眞覺 (기독명진각)
깨달음은 깨닫는 것도 깨닫지 않는 것도 아니니
깨달음 자체가 깨달음이 없어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네
깨달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니
어찌 홀로 참 깨달음이라 이름하리요
장승군(長丞群)
갖가지 표정의 장승들이 비를 맞고 서 있다.
오도재는 색(色)의 심볼이자 대명사인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있는 곳이라, 더러는 보기 민망한 모습의
장승들도 있다. 그저 해학적으로 보고 웃어 넘길 일이다.
점필재 김종직 (佔畢齋 金宗直. 1431~1492)
- 엄천사에서 자다 -
엄천사에서 유호인,임대동
함께 세 사람이
차 달여 마시며 청담으로
회포를 풀었네
하룻밤 동안 벼슬살이
모두 잊었었는데,
여울소리에 꿈을 깨어
문득 시름 찾누나.
점필재 김종직 (佔畢齋 金宗直).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문신으로서 본관은 선산(善山)
죽은 지 오륙년이 지나서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마저 찢긴 비극의 정치인.
생전에 지은 문집마저 불질러 버리라고(분서:焚書)임금이 엄명한 비운의 문인. 그럼에도 영남
사림파의 개조(開祖)로 불리는 대학자. '아닌 것은 아니오', 송곳 같은 정신을 내보인 풍운아.
연산군 무오년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김종직의 글 한 편, 조의제문(弔義帝文).
김종직은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다.
이것은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端宗)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다.
이 글을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사초(史草)에 적어 넣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편찬책임자는 이극돈
(李克墩)으로 이른바 훈구파(勳舊派)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일손의 사초 중에 이극돈의 비행(非行)이 기록되어 있어 김일손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던 중,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 중에서 발견한 이극돈은 김일손이 김종직의 제자임을 기화
(奇貨)로 하여 김종직과 그 제자들이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는 사림파(士林派)를 숙청할 목적으로,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 일파를 세조에 대한 불충(不忠)의 무리로 몰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움직여, 큰 옥사(獄事)를 일으켰다.
이것이 무오사화(戊午史禍)인데, 그 결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고, 김일손·
문하생으로는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
등이 있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금재 강 한 (琴齋 姜漢)
- 두류산책 -
두류산 고운 경치 창가에서 읊조리니
명옥탄 여울 물소리 흥미롭게 젖어드네
임고의 세월을 이렇듯 즐기고 있으니
다시는 꿈 속에라도 세속으로 나갈소냐
조선 초기의 서예가로서 학행이 뛰어나고 필법이 정교하여 당대의 명필로 유명하였다.
자는 종우(宗于)이며 호는 금재(琴齋)이고 본관은 진주이다.선생의 아버지인 현감 강이경이
적개공신 남이 장군으로 인하여 화를 입었는데 이 때 어려서 강보에 싸인채로 어머니와 함께
이곳 함양으로 유배되었다.
1496년(연산) 사마시에 급제하여 관리의 길에 올랐으며 현감으로 있을때 모친상을 당하자 상례를
치룬뒤 어지러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중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일두 정여창 (一斗 鄭汝昌. 1450∼1504)
- 지리산 -
갯부들 바람에 한들한들
가볍게 너울대고 사월 봄날에
꽃이 피는데,보리는 이미 누우렇구나
두류산 수 많은 봉우리들을
모두 다 구경하고 큰 강물에 배를 띄워서
고요히 아래로 흘러가누나
조선 사림의 조종(祖宗)으로 꼽히는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였으며, 연산군 시절 사화로 목숨을
잃었고,광해군 시절 문묘에 배향되며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추앙돠었다.
동방오현은 조선 성리학자 중에서도 공자의 묘인 문묘에 배향된 다섯 사람을 말하는데
일두 정여창(一斗 鄭汝昌),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회재 이언적
(晦齋 李彦迪),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그들이다.
정여창은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한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화(1498년)때 유배형에 처해졌다가
1504년 4월 함경도 유배지에서 숨을 거뒀다.
함양읍내에는 그의 고택과 신도비, 그를 배향하는 남계서원이 있다.
정여창의 고택은 드라마 "토지"의 촬영장소로 이용되면서 널리 알려져 많은 발길이 오고가며,
남계서원은 백운동서원(죽계,소수서원) 다음으로 국내에서 두번째로 창건된 서원이다.
뇌계 유호인 (雷溪 兪好仁)
- 두류산 노래 -
천왕봉 위에 올라 신선세계 예를 표하노니
번쩍이는 환한 빛 안개 구름 사이로 솟아 오르네
고개들어 우러러 보면 고금의 사물이 눈 아래 있고
한 세상 모든 것이 부질없이 아득하여라
천왕봉 아니라면 우러러 볼 산이 어디 있으랴
한밤에 해가 돋는 동쪽바다 부상나라의 새벽
동남으로 수 만리 멀리 공간을 바라보니
한 가닥 희미하게 푸르른 섬 구름바다 위로 떠 오르네
유호인은 자가 극기(克己)이고 호는 뇌계(雷溪)다. 문과에 올랐고, 김종직의 문인이다.
그의 집이 선산에 있었는데 노모를 모시고자 돌아가려 했다. 임금(성종)이 친히 전별하며 술에
취하여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있으렴 부디 갈따 아니 가든 못할소냐.
무단히 싫더냐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려도 하 애도래라 가는 뜻을 일러라.
유호인이 감읍하였고 좌우에서도 감격하였다. 임금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그 가는 데를 밟아보게
하고, 이르기를 "나는 그를 생각하여 잊지 못하는데 그도 나를 생각할까"라고 했다.
명을 받은 자가 역정(驛亭)에 들었는데, 공이 누각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오래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벽위에 율시 한수를 지어 "북쪽으로 멀어지는 임금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가까워지는
어머니를 보러 가네."라 썼다. 돌아와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조용히 영탄하기를 "호인은 비록
밖에 있지만 마음은 나를 잊지 않았구나."라고 했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멀지않은 하동땅 평사리에는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최참판댁이 있다.
최참판댁 사랑채에 걸려있는 주련의 글귀도 유호인의 시를 적어 놓은 것이다.
구졸암 양희 (九拙菴 梁喜)
- 지리산 -
산 아래에서는 꽃이 피는데 산 위에는 눈이 있네
산을 내려오면 홑옷입고 산을 오르면 갖옷입네
한 산에서 일어나는 원기가 아래위가 같지 않으니
하루에도 사계절의 놀이를 여기에서 누리겠노라
양희는 함양 수동면 효리에서 중종 10년(1515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그 성품이 바르고 항상 바른 길을 추구하여 마치 청백리 중에 청백리로 꼽히는
조부 양관을 닮았다.
그는 강희보를 스승으로 삼아 대사헌 예조 병조판서까지 오른 노진선생과 호조판서에 이어 영양군으
로 피봉된 이후백과 함께 공부하여 당대 천령 3걸(三傑)이라 하였다.
그는 일찍이 조그만 서재를 지어서 구졸(九拙)이라는 서재를 짓고 그 안에 서책을 쌓아두고, 밖에는
송죽을 심고 시(詩)를 써서 구졸의 뜻을 읊었다.
구졸(九拙)이란 성품이 졸하고 말이 졸하고 글이 졸하고 얼굴이 졸하고 벼슬이 졸하고 정치가 졸하고
벗과 사귐이 졸하고 몸을 위함이 졸하고 자손을 위한 꾀가 졸하다는 것이다.
졸(拙)하다는 의미란 끝없는 절제와 겸양, 감춤이다.
그는 풍류를 좋아하여 당대의 유명 문인들과 자주 노고대를 찾아와 시를 읊고, 또한 지리산을 좋아하여
"지리산"시 한 수가 전해져 온다.
고운 최치원 (孤雲 崔致遠)
- 청산경불환(靑山更不還) -
승려야 너 산이 좋단 말 빈 말이 아니더냐
정말 산이 좋다면 왜 다시 나오는가
두고 보아라 내 언제인가 산에 들어간다면
푸른 산 속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
이 글은 최치원의 입산(入山)이란 시를 옮긴 것이다.
入山 (입산)
- 산에 들어가면서 -
僧乎莫道靑山好 (승호막도청산호) 중아, 너 청산 좋다 말하지 말라.
山好何事更出山 (산호하사경출산) 산이 좋다면 무엇하러 다시 나왔나.
試看他日吾踪跡 (시간타일오종적) 나중에 나 어찌하는지 두고 보거라.
一入靑山更不還 (일입청산경불환)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
최치원은 청산이 좋다고 떠벌려 놓고도 세상살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뛰쳐나가는 무리들의
근본 없음을 한탄하면서 한번 굳게 먹은 마음을 변함 없는 소신으로 지키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고운(孤雲, 857~?) 최치원은 호를 해운(海雲)이라고도 한다.
869년(경문왕 9년)에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유학한 지 6년 만인 874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중국에서 벼슬을 살다가 885년에 귀국하여 신라에서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등의
벼슬을 살았다.
후에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하여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문장이 뛰어나서 사산비문(四山碑文)이 유명하다.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국운을 뒤로 하고 가야산에 들어가서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아무튼 세상과 인생을 버리고 입산하러 가다가 산 어귀 홍류동에서 산을 내려오는 스님들을
만났다. 산이 좋아 세상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서 산다는 사람들이 다시 산을 내려오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세상을 등지고 산으로 들어가는 최치원에게는 가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은 시다.
그는 이 시를 짓고 가야산에 들어간 이후 다시는 세속에 내려오지 않고 뒷날 신선이 되었다는 말만
전해질 뿐이다.
그 징표로서 지금도 해인사의 학사대에는 최치원이 꽂아 두었던 지팡이가 큰 나무로 자라있다.
해인사 건너편 산에는 그가 살았다는 고운암도 있다.
탁영 김일손 (濯纓 金馹孫. 1464~1498)
- 두류시 -
푸른 물결 넘실넘실 노젓는 소리
부드러워 소매가득 찬 맑은 바람 가을인양 서늘하다.
머리 들어 다시 보니 정말 그 모습 아름다워
한가한 구름은 자취없이 두류산 넘어가네
본관 김해. 자 계운(季雲), 호 탁영(濯纓), 시호 문민(文愍).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전라도관찰사 李克墩(이극돈)의 비행을 직필하고, 그 뒤 헌납(獻納)때
이극돈과 성준(成俊)이 새로 붕당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하여 이극돈의 원한을 샀다.
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할때 앞서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것이
이극돈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려져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많은 사류(士類)도 화를 입었다.
이름하여 무오사화(戊午史禍)다.
이를 계기로 새로 등장한 신진 사림(士林)은 집권층인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거세되었다.
중종반정(1506)후 신원(伸寃)되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청도의 자계서원
(紫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산신각
변강쇠전(신재효본)에 의하면 변강쇠가 옹녀와 함께 등구 마천 가는 길, 지리산으로 살림을 이고 지고 가다가
팔각지붕으로 만든 집을 보고 "임진왜란 7년 동안 어느 부자가 피난하여 와서 지은 집인가. 내가 올 줄 알고
이런 집을 지어 두었는고"하고 그 집에서 살림집을 풀고 산 곳이 바로 이곳 산신각자리라고 한다.
물론, 당시에는 지금의 건물규모인 산신각은 아닐 것이다.
산신각 옆에 있는 복원비에는 "가락국 제 10대 구형왕은 서기 532년 신라가 침공차자 선량한 백성을 전쟁의
제물로 삼을 수 없다 하여 나라를 신라에 양국하고 9만 대군을 거느리고 함양의 제한역 아래 와서 머물렀다.
그리고 오도재 너머 촉동에 대궐터를 잡아 역사를 시작했으나 적을 방어하기 어려운 지형이라 칠선계곡으로
들어가 추성을 쌓고 피란하였다.
그때 9만 대군이 머물렀던 곳을 대군지라 하며 구만동이란 마을이 형성되었고 활개미란 곳은 활을 쏘며 무술을
연마했던 곳이다
촉동에는 빈대궐터가 있고 추성에는 석성과 대궐터, 파수대, 뒤주터 등 옛날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곳 오도재는 마천, 하동, 구례로 통하는 고갯길이었는데 구형왕후인 계화부인이 올라와 제단을 쌓고 망국의
한과 선왕(先王)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로부터 성황당이 생기고 지나가는 길손이 기도하고 주민과 무당들이 지리산의 천왕신을 모시고 제를 지내던
곳인데 퇴락하여 이를 복원하고 비를 세운다. 2006년 11월 함양문화원/ 산신각복원 추진위원회." 라고
각인되어 있다.
설명에 나오는 가락국 구형왕의 무덤은 함양군 유림면 경호중고등학교 뒷산에 있다.
오도령수호신위(悟道嶺守護神位) 산신비(山神碑)
오도령수호신위(悟道嶺守護神位) 산신비(山神碑)는 옛날에 삼봉산과 법화산을 잇는 준령인
오도재에 성황당이 있었던 자리로 고개를 넘나드는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어 소원을 빌었던
곳이다. 2003년 11월 30일 지리산 가는 길 개통식 때 산신비(山神碑)를 세워 객인들의 소원을
빌 수 있도록 하였다.
보한재 신숙주(保閑齋 申叔舟 , 1417~1475)
관문의 문루를 오르려 걸음을 옮기다가 앞서 본 시비(詩碑)들의 주인공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름이
띄었다. 보한재 신숙주다.
사림파의 시비들이 함양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훈구파인 그의 시비가 반대방향인 마천 쪽을 바라보는 것은
우연일까 계획된 배치였을까...
- 두류산 바라보며 -
아득히 두류산이 하늘 중턱 솟았는데
호남을 바라보니 하늘 구름 속에 쌓였구나
세운루 올라서서 난간에 기대어 보니
천고에 푸른 산이 굽이굽이 한결 같구나
문루의 내부
문루의 성벽 사이로 보이는 비에 젖은 지리산. 앞은 지리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장소다.
마천으로 넘어가는 도중의 토종벌통
와불(臥佛)모습의 산능선 (자료사진)
다음 행선지로 정한 서암정사와 벽송사를 향하여 오도재의 종반부에 들어섰을 때 도로변에 "와불"이라는
작은 사진이 하나 걸려있다. 다가가서 보니 건너편의 산능선이 부처가 누워있는 모습이라고 적혀있다.
흩뿌리는 비 때문에 정확한 형태를 알아볼 수는 없으나 그렇게 생각하고 바라보니 닮은 듯도 하다.
오도재를 거의 다 내려왔을 때 건너편의 산 위로 눈길이 갔다.
높은 산 위에 장비를 동원하여 바위를 깎을 경우라면 채석장이 일반적이다. 흐릿하게 보이지만 단순한 채석장
이 아닌 것 같아 카메라를 당겨보았다.
놀라운 광경이다.
붉은 화염광배가 보이고 불두(佛頭)인 듯한 석조물을 조성하고 있었다.
경주 남산의 용장사 3층석탑이 남산전체를 기단으로 삼았다면, 이 석불 또한 산 하나를 차지할 만큼 거대한
규모임에 틀림없다. 보기에 따라서 다른 평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저런 불사를 기획한 분의 대담하고 두둑한
배짱이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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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인연입니다~~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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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재를 두러보는 맛이 또한 일품중의 일품이지요. 감사합니다. 사진으로 보니 더욱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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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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